그날 저녁에 환자가 필담을 요청했다. 나는 유언을 남기시려는 것으로 생각하고 가족들을 중환자실 내로 모두 불렀다. 그런데 인공호흡기가 달린 채 환자가 팔을 움직여 겨우 힘들게 쓴 글자는 '시신기증'이라는 네 글자였다.-25쪽
나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이래 수없이 많은 아이들의 죽음을 보아왔다. 태어나자마자 선천성 기형으로 인한 수술을 받다가 혹은 일반인들은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끔찍한 질병의 희생자가 되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떨어져버린 그 많은 아이들의 죽음 앞에서 나는 때로는 관성으로 둔감해지고, 때로는 상처를 받으면서 그렇게 점차 단련이 되어왔다. 마치 전장에서 총을 맞고 쓰러져가는 죽음에 무뎌져가는 병사처럼 말이다. 그러나 가끔 응급실에서 이미 생명이 떠난 환자를 맞이하면서 혹은 방금 숨을 거둔 환자들 뒤로 하고 돌아서서 손을 씻으면서, 내 심장 속에 어느덧 그렇게 길들여진 차가운 피가 흐르고 있음을 문득 깨달을 때 비로소 제자리로 돌아와 다시 타인의 죽음을 생각하고 돌아보기를 반복하곤 했다.-60쪽
"선생님, 나 이 안에 그냥 있게 해주면 안 되겠소? 여기는 하루에 10분씩밖에 면회가 안 된다는데, 나 정말 귀찮게 안 하고 가만히 있을 테니, 나 그냥 할아버지 옆에 있으면 안 되겠소?"-122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병환자의 정상적인 2세인-인용자) 미감아들의 이런 생활을 알게 되면 "아무리 그래도 천륜이 있지, 어떻게 부모를 버리고 모른 척하고 살 수가 있나." 하며 그들에게 또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이 부모를 버리게 만든 사람들이 바로 누구이던가? 바로 우리가, 우리의 편견이, 우리의 질시가 그들이 부모를 버리게 하고 그들 부모와 자식을 갈라놓은 것이 아닌가.-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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