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절판


"엄마, 정말 안 올래요?"
"안 간다, 그랬잖아."
크게 소리 지르니까 태일이가 집에서 나와 고개를 넘어 큰길에까지 나서 갖고 나를 이렇게 쳐다보고 서있어.
"정말 안 오지요?"
"못 간다 했잖아."
그라니까 내가 서있으니 저도 서서 나를 쳐다봤어. 왜 저렇게 오늘 깨끗이 입었을까, 계속 그 생각이 나. 나는 죽는다는 생각은 못 하고 어디 가려나 보다 했어. 나를 쳐다보고 서있길래, 내가 빨리 가라고 손짓하니까, 저도 손을 흔들면서 가더라고.
다음 날이 금요일이지. 그게 1970년 11월 13일 아니냐. 구역예배 보러 갔는데, 나를 부르러 사람들이 왔길래, 뭔 일이냐고 물어보니까, 집에 가면 안다고 그래. 집으로 오는데 스피카에서 소리가 나는데.... 그 시절엔 테레비도 잘 없었어. 가난하고 무허가고 그라니까. 테레비 있는 집도 없었어. 국수집에 테레비 조그만 것 하나 있었는데, 밤에 테레비 본다고 애들이 국숫집에 몰려가고 그랬지. 근데 국수 가게 스파카서 막 소리가 나는데, 도봉구 쌍문2동 208번지 전태일이가 뭐 기름을 붓고 불을 붙였다고, 그런 소리가 막 나와. 가슴이 와르르 무너지고 시퍼런 하늘이 폭삭 내려앉는 거야.
-79쪽

기어이, 기어이 기름을 붓고 말았구나!

(눈자위가 붉어지며 옷가슴을 여며 잡더니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숙인 채 숨을 크게 내쉬며 한동안 말을 잃는다... 한참 뒤 안경을 벗고 수건을 눈에 대고 꾹 누르고 있더니 뿌연 안경알을 닦는다.)-80쪽

"학생들하고 노동자들하고 합해서 싸워야지 따로따로 하면 절대로 안돼요.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가 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돼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뚫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그래 아무 걱정 마라. 내 몸이 가루가 되어도 니가 원하는 거 끝까지 할 거다."

"엄마, 배가 고프다..."

그게 태일이 마지막 말이었어. 배가 고프다. 그 말을 들으니 기도 차지 않았어.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나도 정신을 잃었어.-83쪽

(헌옷가지를 팔아) 돈이 생기면 이소선은 조합으로 달려가 끼니를 거른 조합 간부들에게 라면을 끓여 주었다. 평화시장 옥상에다 큰 들통을 걸어 놓고 나무를 지펴 물을 끓였다. 땔감으로 쓰기 위해 신진철이 동대문시장을 돌아다니며 주워 온 생선 궤짝은 축축해서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햇볕에 한참 말리거나 석유를 뿌려야 불을 지필 수 있었다. 라면을 끓이면 라면냄새보다는 궤짝이 타서 뿜는 생선 냄새가 평화시장 옥상에 가득했다. 라면 여덟 개를 가지고 열여섯 사람이 먹는 것은 보통이고 많을 때는 스물네 명이 먹기도 했다. 한창 젊은 스물 초반의 이들에게는 간에 기별도 가지 않았다. 이소선은 국물이라도 배불리 먹게 일부러 물을 많이 넣고 끓였다. 면도 퉁퉁 불 때까지 삶았다.-109쪽

'배가 고프다'며 죽어 간 전태일. 한번 배불리 먹고나 죽자며 석유통을 옆에 두고 갈비탕을 시켜 먹던 청계 조합원들. 그리고 38년이 지난 오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사람답게 살고자 곡기를 끊고 공장 앞에서 천막 농성 중이다. 강산이 서너 번 바뀔 만큼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고통받고 소외받는 사람의 신음이 끊이지 않는 이 현실에, 시큰하게 아려 오는 뼈마디를 주무르며 이소선은 밤마다 끙끙 앓는다.-129쪽

(수사관)"북한에서는 모두들 김일성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남한에서는 모두들 이소선을 어머니라고 부르니, 김일서과 똑같은 빨갱이 아니오."
이소선은 어이가 없었다.
"아, 그게 말이냐 막걸리냐. 수준 이하다. 내가 수준도 안 되는 니들하고 무슨 말을 하냐. 같잖은 것들이 내 앞에서 꼴값을 떠네. 어차피 빨갱이 만들어 죽일 테니, 말해서 뭐햐냐. 어서 죽여라. 썩을 것들아!"-189쪽

"어머니, 이렇게 기쁜 날 춤 한번 춰야지요."
문익환 목사가 춤을 추라고 부추겼다. 문 목사는 이소선보다 나이가 열한 살이나 더 많다. 하지만 늘 어머니라 부르며 존대했다. 전태일이 세상을 깨우고 나를 깨우치게 했으니 당연히 전태일의 어머니는 노동자의 어머니고 자신의 어머니라고 했다. 그럴 때마다 이소선은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랐다.-213쪽

(86년 구로 신흥정밀 박영진 분신항거)
이소선은 소리 나는 쪽으로 갔다. 검게 타서 팅팅 부은 얼굴, 머리카락은 홀랑 타버리고 눈은 제대로 뜨지도 못하고 있다. 부어터진 입술 사이로 하얀 이가 살짝 드러났다.
"나, 태일이 엄마다."
"저, 정말이야? 전태일 엄마 맞아?"
박영진은 떠지지 않는 눈을 꿈틀거렸다.
"그래, 태일이 엄마다. 왜 이랬어?"
이소선은 타버린 몸을 이리저리 만졌다.
"와! 나는 진짜 운 좋은 놈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박영진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다 죽게 생겼구만 뭐가 운이 좋냐?"
"엄마, 태일이 형한테 가면 할 말이 있잖아."
"살아서 싸워야지, 태일이한테 뭐하러 가냐."
"나 태일이 형 만나면 엄마 열심히 싸우고 있다고 말할 거야."-221쪽

한울삶 벽에는 독재에 맞서 항거한 자식들의 얼굴이 커다란 액자에 담겨 걸려 있다. 이소선은 그 액자 바로 밑에서 잠을 잤다. 유가협 어머니들은 한울삶에 오면 액자 속에 있는 자기 자식들과 한참을 이야기했다. 마치 산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다. 이소선은 전태일만이 아니라 액자 속에 담긴 자식들 누구하고도 이야기를 나눴다. 유가협에 처음 온 사람들은 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언젠가 너거한테 맺힌 한을 풀어 줄게. 좋은 세상 올 때까지 열심히 우리가 싸워서 너거가 원하는 세상을 이 엄마가 꼭 만든다고 약속할게."
이소선은 액자 속 자식들을 보며 약속했다.-2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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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 이소선, 여든의 기억
오도엽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2월
평점 :
절판


'지겹도록 고마운..'이라는 책 제목은 생소하다. 고마움이 지겨울 정도라니... 하지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그 의미는 확연하게 가슴에 새겨진다. 어떠한 수사보다 더 강렬한 어머님만의 표현이 새겨진다.

대한민국 현대사의 질곡을 오직 한 길로 헤쳐나오신 우리들의 어머니, 오직 아들과의 약속을 위해 팔십 평생을 살아오신 전태일 동지의 어머니 이소선님. 그 분의 육성기록이 오도엽 시인의 글을 통해 책으로 태어났다.  

진보하는 역사의 주체가 일하는 사람이기에, 어머니의 구술은 대한민국 현대사 한 가운데를 관통하고 있다. 아니, 언제나 그 선봉에 계셨던 분이다. 매 순간의 현장에 계셨던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현대사를 다시 만나보는 일은 감격스러운 일이다. 

이제 '지팡이를 절대 짚지 않겠다던 이소선은 결국 지팡이를 짚을 수밖에 없'고,  '눈에 백내장이 끼였다고; 하며, 수술을 하려 해도 '당뇨와 혈압이 높아 수술을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고, '처음 만날 때 두 주먹이었던 약이 세 주먹이 되'었다고 한다.(에필로그에서 인용) 책을 읽고 난 뒤, 어머니의 육성을 이렇게 남겨둘 수 있는 것이 참 고맙고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기록이 몇 번이라도 콧물을 훌쩍이며 눈물을 찍어내게 만드는 요인은 진실, 그리고 가없는 실천이 주는 감동의 파장 때문이 아닐까.  내 삶이 때로 어렵게 느껴질 때면 이 책을, 그리고 <밑줄긋기>에 옮겨놓은 글귀를 통해 나를 추스릴 수 있을 것이다. 책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은 때, 우연한 기회에 오도엽님을 한 번 뵌 적이 있다. 혹여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찬 소주라도 한 잔 나누고 싶다.  

이 땅 모든 사람들의 어머니이신 작은 선녀님, 부디 오래 강령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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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퇴행, 안전하고 쉬운 돈벌이의 유혹
중독성 짙은 후렴구 반복 ‘30초짜리 음악’
이혼·파혼·악녀…‘클리셰’ 남발 드라마
찍어내는 그림 ‘지클리’…‘뮤비컬’ 되풀이
 
 
한겨레 길윤형 기자 하어영 기자
 








 
‘불황 때는 미니스커트가 유행’하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지친 마음을 풀기 위해 말초적 자극을 선호하고, 그에 기댄 문화 자본은 쉬운 돈벌이를 찾는다. 혁신적 사고는 멈추고, 비슷한 관습이 되풀이되며, 문화적 활력은 질식된다. 이른바 문화의 ‘퇴행’이다. 2009년 한국 문화계에 이 퇴행의 바람이 몰아칠 기세다.




 

» 원더걸스(사진)
 
■ “미쳤어, 미쳤어~!”…중독된 사람들

퇴행의 징후는 ‘30초 음악’들이 석권한 대중 음악계에서 분명하게 감지된다. ‘30초 음악’은 ‘싸비’나 ‘훅’이라고 불리는 중독성 짙은 후렴구로 무장한 가벼운 댄스곡이다.

30초 음악은 2007년 ‘원더걸스(사진) 신드롬’을 몰고 온 <텔미>에서 시작됐다. 박진영이 작곡한 이 노래는 기승전결로 이어지는 기존 노래 형식을 과감히 포기하고, 인상적인 후렴구를 반복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중독시켰다. 이후 ‘싸비’의 반복으로 곡을 단순화한 작곡가 ‘용감한 형제’가 곡을 쏟아내면서 30초 음악은 보편화됐다. 지난 한 해 동안 그의 손을 거쳐 손담비의 <미쳤어>, 빅뱅의 <마지막 인사>, 브라운 아이드 걸스의 <어쩌다> 등이 성공을 거뒀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시장 구조의 변화가 있다. 음반 시장의 불황에도 불구하고, 2007년 음악 시장 전체 매출은 4350억원(추정치)을 기록해, ‘황금기’인 1997년의 4104억원을 넘어섰다. 그러나 음반(시디) 매출은 전체의 15%(650억원)에 불과하다. 나머지 3700억원은 벨소리·컬러링·홈페이지 배경음악 다운로드 등 디지털 시장에서 나왔다.

디지털 음악 소비자들은 ‘벅스뮤직’ 등 음악 사이트에서 무료 ‘30초 듣기’를 통해 구매 여부를 결정한다. 음악평론가 김작가는 “이런 흐름이 이어지면 10곡 정도 일관된 흐름을 가진 앨범의 중요성은 줄어들고, 3~4분 짜리 싱글, 그 안에서도 30초 정도의 후렴구로 음악의 가치가 판단되는 매우 부정적인 상황이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때문에 실력 있는 뮤지션들은 정규 음반을 포기하고, 3~4곡을 묶는 미니 음반이나 싱글 음반으로 전환하는 추세다. 한때 200만장 넘는 판매고를 기록한 신승훈은 지난 9월 ‘모던 록’을 가미한 새로운 음악적 시도로 평단의 주목을 받았지만, 최악의 음반 판매를 기록했다.



 

» 너는 내 운명
 
■ ‘조폭에서 막장으로’…파국의 초입?




‘퇴행’의 또 다른 무대는 브라운관이다. 최근 한국 드라마를 설명하는 열쇳말은 ‘막장’이다. 9일 종영하는 한국방송 일일드라마 <너는 내 운명>(사진), 에스비에스 <아내의 유혹>, <유리의성>, 문화방송 <내 인생의 황금기> 등은 극단적 고부관계, 이혼·파혼, 악녀·나쁜 남자 등 80~90년대 한국 드라마의 ‘클리쉐’들을 남발하며 막장으로 치닫는 중이다. 문화방송 <에덴의 동쪽>은 또 다른 막장 드라마 <흔들리지마>의 작가를 영입하기도 했다.

이는 영화계의 ‘조폭 코미디’ 제작 붐과 비교된다. 영화계는 <쉬리> 이후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자 큰 제작비를 들이지 않고도 관객들을 모을 수 있는 <조폭마누라>류의 ‘조폭물’을 되풀이해 제작했다. 당장 관객몰이에는 성공했지만, 장기적으로는 ‘독배’를 든 꼴이었다. 그 결과가 최근 영화 산업의 위기다.

드라마의 ‘막장화’도 산업적 근거는 있다. 드라마 산업은 배우와 제작자 사이에 출연료 분쟁이 시작될 정도로 위축됐다. 막장 드라마는 싼 제작비로 기본적인 시청률이 보장된다. ‘나쁜 남자-가련한 여자’(또는 반대의 설정), ‘출생의 비밀’, ‘복수를 위한 성공’ 등은 80년대 임채무·김희애 주연의 <내일 늦으리>, 90년대 이종원·심은하 주연의 <청춘의 덫> 등 수많은 인기드라마 속에서 되풀이돼 왔다. 이런 점에서 막장화는 복고화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대중문화평론가 강명석씨는 “2000년대 이후 드라마들이 새로운 시도로 한국 드라마의 부흥을 몰고 왔지만, 최근은 80~90년대로 돌아가는 복고의 흐름”이라며 “이는 분명한 퇴행”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드라마 산업 전반의 장기 위축에 대한 우려가 나오고 있다.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은 2001년 이후 해마다 40~70%씩 고성장을 한 드라마 등 방송물의 수출 증가세가 2008년에는 5% 안팎으로 꺾였을 것으로 추정했다.

■ ‘판화처럼 찍어내는 그림’…새로운 시도는 없다 미술과 뮤지컬도 예외는 아니다. 미술계에서는 최근 ‘지클리’라고 불리는 새로운 작품 제작·판매 방식이 등장했다. 지클리는 원작을 슬라이드로 찍어 특수 캔버스에 인쇄한 뒤 작가가 그 위에 물감을 덧칠한 그림이다. 지클리를 두고 그림을 싼 값에 사고 팔 수 있는 새로운 기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예술가의 새로운 창작 욕구를 가로막는 독약이라는 혹평이 제기되고 있다.

지난해 뮤지컬계의 흥행 화두는 ‘뮤비컬’이었다. 영화나 드라마로 검증된 각본을 토대로 만든 뮤지컬이다. 그 흐름은 2006년 <싱글즈>에서 <안녕 프란체스카>, <파이란>, <내 마음의 풍금>, <대장금>을 거쳐 최근 흥행작인 <미녀는 괴로워>까지 이어진다. 대작이 사라지고 2~3명의 스타를 내세운 로맨틱 코미디로 뮤지컬이 소품화하는 현상도 문제로 지적된다.


길윤형 하어영 기자, 김학선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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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기자는 빈 컵… 뭐가 담길지 기다릴뿐”









“무섭게 생겼다고요? 중학교 이후로 싸움 해본 일 없어요.” 지난해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휩쓴 배우 김윤석은 “배우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며 “어떤 배우가 자신이 정점에 있다고 생각한다면 엄청난 착각일 것”이라고 말했다. 손택균 기자
지난해 ‘추격자’로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 독식 김윤석

《실핏줄 터져 붉어진 흰자위. 다듬지 않은 거친 수염. 지난해 6개 국내 영화제 남우주연상을 독식한 ‘추격자’의 여광()은 없었다. 하반기 개봉할 영화 ‘전우치’ 촬영에 새해 벽두부터 전력투구하고 있는 배우 김윤석(42)을 3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연말 술자리 때문에 얼굴이 안 좋으냐고요?(웃음) 전국을 누비는 ‘전우치’ 촬영에 기분 낼 짬이 없었습니다. ‘범죄의 재구성’ ‘타짜’의 최동훈 감독이랑 세 번째 같이 하는 영화인데, 액션 장면이 많아 재미있는 만큼 힘이 좀 드네요.”

범죄의 재구성에서 배경 인물로 나왔던 그가 연기파 주연배우로 발돋움하는 데 걸린 시간은 4년. 하지만 김윤석의 연기 데뷔는 198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고향 부산의 극단 ‘현장’이 올린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첫 무대였다. 3분 정도 나오는 신문팔이 소년 역할이었지만 긴장해서 잘 걷지도 못했다.

1995년 장사를 하겠다며 무대를 떠났다가 2000년 돌아왔을 때, 극단 연우무대에서 함께 활동했던 송강호는 최고 배우로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동갑내기 친구가 연말 영화제를 휩쓰는 모습을 그는 오랫동안 TV를 통해 지켜봤다.

“질투요?(웃음) 강호 씨가 잘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신나요. 가장 좋아하는 배우고 항상 생각하는 친구인데요. ‘연기 다시 같이 하자’고 채근하던 강호 씨가 시상식 무대에서 건네 준 상패를 손에 쥐었을 때 ‘이렇게 벅찬 순간이 살면서 몇 번이나 있겠나’ 싶었습니다.”

불혹() 뒤에 거머쥔 성공에 대해 김윤석은 “실감이 안 나고 부담도 없다”고 말했다.

“좋은 영화를 만난 덕분에 최고의 한 해를 보냈죠. 배우 혼자만의 능력으로 거둘 수 있는 성취는 없어요. 좋은 작품, 감독, 배우가 모여야 하죠. 모든 작품이 그렇게 베스트일 수 있나요. 느낌대로 편안하게 가면서 주어진 일에 집중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면 또 최고의 순간이 오겠죠.”

그는 인터뷰 뒤 사진 촬영에서 좀처럼 웃지 않았다. 셔터를 누를 때마다 어떻게든 웃겨 보려는 기자에게 미안한 듯 말했다.

“가식적으로 밝은 표정 짓는 걸 싫어해요. 억지웃음을 짓기보다는 무표정하게 사람들 얘기를 조용히 듣고 있는 게 좋아요.”

멜로드라마 주연을 맡겨도 무뚝뚝한 표정을 고집할까.

“험악해 보인다고요? 선입견 참 무섭네요. ‘타짜’ 전에 알던 사람들은 ‘당신처럼 순하게 생긴 사람이 무슨 악역을 하느냐’고 했다니까요. 김윤석이라는 배우의 독특한 ‘결’은 있죠. 하지만 그 결 위에는 어떤 캐릭터든 다 담아낼 수 있습니다.”

무대에서나 일상생활에서 한복을 거의 입어 본 적이 없는 그에게 ‘전우치’의 화담 서경덕 역할은 색다른 도전이다. ‘천하장사 마돈나’ 때 딱 한 번 경험한 와이어 액션을 거의 매회 해야 하고, 신비한 도인 화담의 캐릭터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만들어 내야 한다.

“사료에 기록된 선비 화담과 야사 소설에 등장하는 도사 화담의 이미지가 많이 달라요. 500년의 시공을 넘나들면서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는 인물로 새롭게 그려보려 하고 있습니다.”

김윤석의 2009년 첫 작품은 상반기 개봉할 코믹 스릴러 ‘거북이 달린다’. 그는 평화로운 시골 마을에 나타난 탈주범을 쫓는 어수룩한 형사로 나온다. 전우치의 화담도 주인공을 잡으러 다니는 인물. ‘추격’하는 캐릭터로 관객에게 각인될 염려는 없을까.

“멜로도 결국 남자와 여자가 서로 쫓고 쫓기는 얘기잖아요.(웃음) 쫓아야지 관계가 생기고 드라마가 이뤄지죠. 저는 배우가 빈 컵이라고 생각해요. 추격자 같은 강한 블랙커피를 비운 뒤 우유가 담길지 물이 담길지 컵은 알 수 없죠. 그저 잘 비우고 닦으며 기다리는 거예요. 촬영현장 사람들과 함께 느끼는 저릿한 ‘정점’을 기대하면서 말이에요.”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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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기획]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① [중앙일보]


숨기고 싶은 속마음을 끝내 발가벗기는 집요함
신경숙 → 박완서의『친절한 복희씨』



 
  신경숙(46)씨의 글은 사람을 울린다. 실컷 울고 난 뒤 툭툭 털고 일어나게 한다. 출간 한 달 만에 15만 명이 읽은 장편소설 『엄마를 부탁해』(창비)가 그랬다. 한국 문단의 든든한 기둥으로 자리잡은 그녀는 “(독자도, 작가도) 행복하라고 (글을) 쓴다”고 했다. ‘작가가 뽑은 작가의 책’ 원고를 쓰면서도 그랬단다. [창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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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박완서 선생의 새 책을 갖게 되면 일단 읽기 전에 그 책을 품에 꼭 안아본다. 뺨에 대고 부벼도 본다. 무조건 감사해서다.

그 연세에 그것도 수많은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작품을 계속 쓰고 계시다는 것은, 매번 글을 쓸 때마다 무슨 커다란 장벽 앞에 선 듯해 아득해지는 나 같은 후배에게는 무조건 우러러보이는 일이다.

『친절한 복희씨』(문학과지성사)를 읽었을 때 선생에 대한 탄성은 최고조였다. “아휴, 선생님도 참!” 연발, “아휴, 선생님도!”하면서 이미 계간지에 발표될 때마다 챙겨 읽었는데도 단행본으로 묶여져 있는 9편의 단편들을 매편 아껴가며 그러나 아주 빨리 읽었다. 좀 천천히 읽고 싶어도 박완서 선생의 소설은 그럴 수가 없다. 이유는 독자들이 더 잘 알 것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시선을 벗어날 길이 없다.

그것도 내가 숨길 수 있으면 숨겨서 남은 모르게 하고 싶었던 것들이 속속들이 발가벗겨지는데, 참 기묘한 것은 그것이 통쾌할 뿐 아니라 마음이 치유되는 느낌까지 든다는 것이다.

『친절한 복희씨』에 실린 작품들은 선생 세대를 위해 바친 글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그 세대들이 겪은 노고와, 그리고 아직 끝나지 않은 꿈(가끔 그 꿈은 사랑이나 복수로 실현되기도 한다)들이 때로 격렬하게 때로 여일하게 흘러가는 강물처럼 살아서 꿈틀거린다. 인생을 거의 다 살아낸 이들이 화자로 등장하기 때문인지 ‘실버 문학’의 탄생이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지만 나는 지하철 안에서 오히려 젊은 친구들이 『친절한 복희씨』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내 대학생 조카의 책상 위에도 『친절한 복희씨』가 놓여 있었다. 내가 무심코 조카에게 “재밌냐? “ 물으니 바로 “네, 재밌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느 세대에도 갇히지 않는 소통의 힘이 『친절한 복희씨』 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는 증거다. 나는 그 힘을 인생에 대한 깊은 연륜을 바탕으로 한 박완서 선생의 통찰이 이룬 쾌거라고 본다.

이처럼 선생의 소설은 재미있게 단숨에 읽히지만 오래 두고두고 되씹게 만든다. 거기엔 인생의 단맛과 쓴맛, 인간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두루 꿰뚫어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풍부한 울림이 담겨 있다. 선생의 글은 신랄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애정의 끈을 놓지 않으며, 웃음을 자아내면서도 쉽사리 현실에 안주하게 만들지 않는다. 선생 특유의 긴장, 유머, 까탈스러움이 새해에도 계속되어 어서 다음 책을 품에 안아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친절한 복희씨』=박완서(78)씨가 2007년 발표한 소설집이다. 표제작 ‘친절한 복희씨’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2005)의 제목을 패러디했다. 열 아홉 꽃다운 나이에 애 딸린 홀아비와 결혼해 오남매에다 손자 손녀까지 길러냈지만 말년에 중풍 걸린 남편을 돌봐야 하는 처지에 놓인 화자 복희씨의 이야기다. 2001년 제 1회 황순원문학상을 받은 ‘그리움을 위하여’도 담겨있다. 총 9편의 단편은 대개 황혼에 접어든 노인들의 신산한 삶을 따뜻하게 보듬는 작품이다.





◆신경숙=1963년 전라북도 정읍 출생. 85년 ‘문예중앙’으로 등단했다. 대표작으로 『풍금이 있던 자리』 『오래 전 집을 떠날 때』 『외딴방』 『기차는 7시에 떠나네』 『리진』 『엄마를 부탁해』가 있다. 한국일보문학상·현대문학상·만해문학상·동인문학상·이상문학상·오영수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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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무집 2009-01-10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친절한 복희씨>는 두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더랍니다.
두 분 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