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녀석 덕분에 반올림 27
이경혜 지음 / 바람의아이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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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골목길을 빠져나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지금쯤 학원에서는 족집게 강사의 열강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연저에게 물었다.
- 넌 무슨 과를 가고 싶은데? 국문과나 영문과?
- 이 순진한 도련님아! 우리 집에 와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
- 응?
나는 당황해서 얼굴이 붉어졌다.
- 대학 갈 돈이 어딨니? 우리 아버진 쓰러져서 몸이 말을 안 들어. 그래도 똥오줌 칠 정도가 아니라 정말 다행이지만. 우리 엄마 라면 판 돈, 그거 갖다 바칠 만큼 대학이 대단하단 생각은 안 들거든. 돈이 남아 돌면 갈 만은 해. 언젠가 그렇게 되면 그때 가지, 뭐. 그러면 도서관학과에 가고 싶어. 사서를 하면 좋을 것 같애. 섹시한 직업이잖아?(단편 [Reading is sexy!] 53쪽)-53쪽

지현이의 팔에 안겨 양호실로 가는 내 뒷모습에 친구들의 눈길이 표창처럼 타닥타닥 꽃혀 오는 게 느껴졌다. 이 기분이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나는 어지럽고 혼미할 뿐이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 바퀴벌레와 교련 사열, 거기에 나는 저 독재자 박정희를 더 첨가해야만 하겠다. 도대체 이런 상황에 나를 처하게 만들다니, 이 모든 것은 다 그 사람 때문이다.(단편 [학도호국단장 전지현] 91쪽)-91쪽

- 인간들이란 워낙 이상한 동물이긴 하지만 고3은 그중에서도 정말 이해가 안 가. 우리 바퀴야 언제 죽을지 모르니까 항상 지금 현재를 즐기지. 삶이란 원래 현재형일 뿐이야. 미래는 곧 현재가 되잖아? 그런데 너희들은 오직 있지도 않은 미래를 위해서만 살아. 미래는 또 현재가 되고, 그 미래는 또 현재가 되고... 끝없이. 그러다 죽는 거지. 한 번도 제대로 살아 보지 못한 채!(중편 [그 녀석 덕분에] 127쪽)-127쪽

아아, 이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말로는 도무지 할 수 없다. 그냥 살아 있다는 실감이 온몸으로 짜릿하게 퍼져 나갔다. 나는 그동안 거의 죽어 있었던 것이다. 내가 어떻게 저 기억을 잊고 살 수 있었는지 나는 의아해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나는 그 답을 알았다. 온몸으로 번개를 맞듯이 깨달았다. 그건 내가 거의 죽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죽은 채로 살았다. 3년의 시간 동안 시체처럼, 허수아비처럼, 꼭두각시처럼, 그림자처럼 살았다. 그것을 깨닫게 된 것은 지금 내가 살아났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는 지금 이 순간, 살아 있다. 나 장양호는 살아 있다!-157쪽

황당한 설정에 가볍게 몰고 간 소설이라 글 쓰면서 잘 우는 나도 전혀 울지 않고 써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표를 찍은 뒤에 뜻밖에도 왈칵 울음이 쏟아졌습니다. 쓸 때까지는 아이들에 이입되어 있던 내가 그새 어른으로 돌아와 그들이 겪을 험난한 길을 보니 마음이 아팠던 것입니다.([작가의 말] 196쪽)-1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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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삼촌 브루스 리 2
천명관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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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식과 함께 병문안을 온 장 관장은 깁스를 하고 누워 있는 삼촌을 보고 잔뜩 속이 상한 듯 무리하게 공중삼회전을 시도한 삼촌을 탓했다.
- 내가 뭐라고 그러디? 첫째도 몸조심, 둘째도 몸조심, 응? 자기 몸 자기가 안 챙기면 우리 같은 놈들(액션영화 단역) 챙겨줄 사람 아무도 없어. 막말로 우리가 영화 찍다 뒈지면 개 값도 안 나오는 거 몰라?-92쪽

- 아냐. 솔직하게 얘기해 줘서 오히려 고마워. 나한테 그렇게 얘기한 사람 아무도 없었거든.
경희가 환하게 웃으며 잔을 부딪쳤다.그러고 보면 경희는 아무것도 변한 게 없었다. 오래전에 부서져버린 세계를 고집스럽게 부둥켜 안고 썰물처럼 모두가 빠져나간 자리에 혼자 남아 엉거주춤 맴도는 것이 어떤 면에선 삼촌과 닮아 있기도 했다. 그것을 순정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나이가 들어도 결코 뻔뻔스러움은 늘지 않아 아무 데도 선뜻 발을 담그지도 못하면서 늘 구원을 꿈꾸는 그 가난한 마음을? 차마 말하지 못하고 감히 말할 수 없는 것들 사이에 갇혀 아무런 확신도 없이 늘 생의 언저리를 겉돌기만 하는 그 수줍음을? 그러고 보니 삼촌이 교도소에 수감된 지도 어느덧 3년이 지나 있었다.-328쪽

나는 한동안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주저앉아 있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그런데 어라! 어찌된 일인지 그렇게 열심히 쫓던 말티즈가 바로 코앞에 서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뜀박질이 그렇게 느려 터져서야 어떻게 이 험한 세상을 살아가겠냐는 듯 한심한 표정이었다. 나는 당장 목을 졸라 죽어버리고 싶은 적개심을 감춘 채 조심스럽게 강아지를 불렀다.
- 해, 해피야, 착하지. 이리와.
나는 비굴하게 혀를 차며 강아지를 얼렀다. 그런 언해피한 상황에서 어쩌다 해피라는 이름이 튀어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강아지의 이름은 즉석에서 해피로 정해졌다.-3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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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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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비터 문>의 이야기 구조(로만 폴란스키 감독, 1993)...-62쪽

생은 결과적으로 내게 아무런 위로도 주지 않았다. 나는 언제나 조심했고, 억눌러 견디었다. 시가 감정의 분출을 받아쓰는 것이라고 여긴 일은 한 번도 없었다. 감정은, 일종의 얼룩에 불과했다. 싸구려 얼룩들을 지워야 맑은 유리 너머로 참된 세계 구조가 보일 거라는 게 나의 시론이었다. 그것을 '내 시론'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내 것이엉ㅅ나.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면서, 나는 다만 전투적으로 나를 억압하고 산 것뿐이었다. 이를테면 囚人으로서 나는 시간을 거의 다 써버렸다고 할 수 있었다.-130쪽

(골프를 빗댄 필연과 우연에 대한 대화 이후..) 다른 일행까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뛰어오기 시작했다. 내가 먼저 달려들어 선생님의 머리를 안아 올렸다. 머리가 내 품으로 들어오는 순간, 선생님이 눈을 반짝 떴다. 장난기가 가득 담긴 눈이었다. 그리고 곧 한 쪽 눈을 찡긋하더니, 내 귀에 대고 재빨리 속삭였다. "나한테 팔씨름 진 거, 이것으로 원수 다 갚았지?"-1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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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산주유소 - 가격보다 확실한 감동
문성필 지음 / 시간여행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자영업자 600만 명의 시대.

자기 분야에서 최선을 다해, 일가를 이룬 저자의 삶이 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친근하게 서술한 책을 읽다.

'행복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 자신의 삶을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품격이 있는 서비스로 고객을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직원들의 품격이 있어야 한다. 간절한 바람이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간절한 희망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쉽다. 고객의 바람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고 접객할 수 있다.'(123쪽)

주유를 하면서, 우리는 주유원분들의 신분을 가볍게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주유소 식구들을 '우선'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솔선수범이 최고의 주유소를 만든 요인이 아닐까..

사람이 모든 일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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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 제주 애월에서 김석희가 전하는 고향살이의 매력
김석희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애월(涯月)...

물가 涯에 달 月

'물가에 어린 달'이라는 뜻이다.

 

제주 애월은 시오노 나나미의 역작 <로마인 이야기>를 비롯하여, 쥘 베른 걸작 선집 등을 직접 번역한, 대한민국 번역계에서 일가를 이루신 김석희 선생의 고향이다. 그가 제1회 한국번역상 대상을 수상한 경력만을 보아도 번역계에 이바지한 그의 노고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작가로 데뷔하여 <이상의 날개> 등의 소설을 발표하기도 했다.

 

이 책은 타향살이 40년을 접고, 고향 애월에 귀향한 김석희 선생이 온라인 카페에 '애월통신'이라는 연재한 '귀향살이 3년의 기록'이다. 작가 스스로 '그렇다고 귀거래사를 읊거나, 귀농일기 같은 땀의 흔적을 담거나, 자연과 세상에 대한 성찰이나 담론을 보탠 것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것과는 거리가 먼, 마음이 가고 시선이 가는 대로 마음과 눈길에 붙잡힌 평범한 일상의 소소한 풍경을 그려보려고 했습니다.'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40년만에 귀향한 노작가의 혜안이 감춰질 수는 없겠다.

 

'제주 여행은 언제가 좋으냐는 질문을 받으면, 나는 망설이지 않고, 10월 말에서 11월 초라고 대답합니다. 이유는 여러 가지 생각할 수 있지만, 억새와 고등어 때문입니다..(중략)..바다를 뒤덮는 물결과 들판을 휩쓰는 억새의 물결. 자연 풍광을 묘사할 때 쓰는 표현은 다양합니다만, 나는 아직도 제주 가을의 산야를 어떻게 묘사할지, 그 적당한 표현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중략)..소싯적엔 구이와 조림이 고등어를 먹는 방식이었지만, 이제는 생선회로도 먹을 수 있게 되었지요. 특히 가을이 들면서 살이 통통해지고 거기에 기름기가 배어, 그 느끼하면서 고소한 맛이 실로 각별합니다. 이 맛을 제주에서는 '배지근하다'고 표현하는데, 표준어로 말하면 '감칠맛'에 가깝습니다.'(139쪽)

 

고향에서의 기억과 일상을 다시 회복하고 향유하는 작가의 모습이 부러울 따름이다.

 

출판계의 지나온 궤적을 어슴프레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는 입장에서 볼 때, 우리나라의 번역 현실은 매우 척박했다. 번역을 단지 하나의 '기술'로 치부하던 시절이 있었고, 번역 작가의 위상은 인정받지 못한 시기가 그리 먼 옛날의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번역서를 고를 때 먼저 번역자를 확인해보는 정도로,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는 번역에 대한 인식이 점차 확대과정을 거치고 있다. 근대화 시기 서양문물을 수용하는 동아시아 3국(한국,중국,일본)의 향후 역사전개 과정을 비교하는 작가의 글을 통렬하기도 하다. 또한 평생을 책과 함께 한 작가의 '책'에 대한 다음과 같은 문장은, 비록 타인의 문장을 옮겨온 것이지만 깊이 새겨볼만 한다.

 

'책이란 무엇인가?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는 책을 '인간이 상용하는 여러 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발명품'이라고 말했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에 불과하다. 현미경과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고, 전화는 음성의 확장이고,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른 것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의 확장이다.'(149쪽)

 

고향 제주에서(그가 평생 몸담은 분야가 '번역'이다 보니, 앞으로도 지역적인 제한이 없다는 점이 장점일 터인데..) 작업을 이어가는 노 작가의 모습이 책을 통해 그려진다. 또한 더 맑은 시선으로, 좋은 작품을 지속적으로 소개해주시길 기원한다.

 

'아침 여섯 시경 먼동이 트고, 그 희붐한 햇살에 저 멀리 한라산도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떠났던 고향. 떠나고 싶어 했던 고향에 돌아온 것입니다. 금의환향은 아니지만, 타향에서 낙오자 신세로 갈 곳이 없어 낙향한 것은 아니니, 그것만으로도 고맙고 다행한 일이지요.'(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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