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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의 풍경 - 이시영

 점심 시간도 훨씬 지난 시간, 시장에서 반찬 가게를 하는 김씨 아줌마가 모자를 쓴 중학생 아들의 손목을 잡고 들어서며 큰소리로 "여기 냉면 둘이요!"를 외치고는 커다란 손을 들어 이마의 싱그러운 땀을 닦는다.

- <조용한 푸른 하늘>, 솔.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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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비둘기 - 김득수

길을 꺾으며

길고 높은

미 8군 철조망이 이어지는

일방통행로

남영동 부대찌개 골목

일본집 적산가옥을 개조한 부대고기집 앞에는

이른 새벽

밤새 얼어 발이 단풍잎처럼 빠알간 비둘기들이 몰려와

어젯밤 회사구조조정 송별회에서 이부장이 토해낸

꽁꽁 언 햄조각을 쫀다

알코올 섞인 소시지 조각을 뜯는

클랙슨을 눌러도 날아가지 않는 비둘기들

눈알이 빠알갛다

- <시평> 21호.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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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6-09-06 1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북동 비둘기가 떠오르네요. 이 시 너무 리얼해요. 슬프게시리...

달빛푸른고개 2006-09-07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 _;
 

추석 - 이성복

밤하늘 하도 푸르러 선돌바위 앞에

앉아 밤새도록 빨래나 했으면 좋겠다

흰 옥양목 쳐대 빨고 나면 누런 삼베

헹구어 빨고, 가슴에 물 한번 끼얹고

하염없는 자유형으로 지하 고성소까지

왕복했으면 좋겠다 갔다 와도 또 가고

싶으면 다시 갔다 오지. 여태 살았지만

언제 살았다는 느낌 한번 들었던가

-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지성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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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함께 길을 가는 것(부제:박영근에게) - 김해화

형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

장난인 줄 알았다 눈물의 씨앗이라고 노래해쌓드만

미안하다 그래서 장난으로 대답했다

형 나 진지하게 묻고 있는 거야

 

함께 길을 가는 것

나란히 손을 잡고 갈 수도 있지만

남남인 듯 나뉘어 갈 수도 있고

보이지 않을 만큼 앞서 가고 뒤따라갈 수도 있고

그러나 마음은 함께 길을 가는 것

내 사랑이 그러함으로

 

길 위의 사랑이라 -

너는 고개를 푹 수그리고

울었다 형 나 많이 외로워

영근아 지금 너 가는 길 얼마나 외로우냐

 

친구들 등에 업혀

병원에 가 누웠다는 소식 뒤로 자주 비 내렸다

진창이 된 공사장 엿새 만에 일 나가 철근 세우는데

너 길 떠났다고 김청미가 전화했더라

 

자꾸 눈물이 나더라 일하다가

고개 푹 수그리고 울었다

내가 길을 바꾸지 못했으니

니가 건너지 못한 길은 나도 못 건너겠지

그래도 사랑은 함께 길을 가는 것

사랑한다 영근아

 

오늘은 가버린 너를 보러 서울 가야 하는데

눈물이 앞을 가린다

자꾸 늦어진다

- <창작과비평> 133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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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프랑스 - 정지용

"아아, 바로트씨! 굿 이브닝!"

"굿 이브닝!"

------ 사장님, 안녕하세요? ------

튤립 양은

오늘 밤도 사라사의 커튼 아래서

쉬고 있지요.

 

나는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다.

손이 너무 희어 슬프다.

 

나는 나라도 집도 없다.

대리석의 테이블에 스치는 뺨이 슬프다.

 

아아, 이국종 강아지여

발끝을 핥아주어라.

발끝을 핥아주어라.

- <긴다이후께(近代風景)> 1926년 1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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