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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비. 1978.

 

평생 시인으로, 선생님으로 살아오시면서 지금까지 남기신 시집은 모두 네 권인 시인의 대표작이다. 1978년에 발표된 이 시는 30여 년 전의 우리네 삶을 그대로 대변하는 시로, 노동시의 효시로도 꼽힌다. 신경림 선생의 <농무>가 연상되기도 하는 詩. '강변에 나가 삽을 씻는' 장면(풍경)만으로도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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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폰을 버리다 - 류민영

맨홀 구멍 스치듯이 보았을 때,

그만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순간의 일이었다

 

(걸려오지 않을 전화가 걸려올 것 같았다)

 

환청으로 울리던 전화벨 소리

확인하지 않은 문자

수없이 쌓여 있을 음성 메세지

 

법문을 지워버린 낙산사 홍련암 법당의 구멍

같은 하수구

질퍽한 오수 아래 떨어트린 핸드폰

 

벨 소리는 울릴 것이다

죽어가는 기계에서 상냥한 목소리 젊은 여인이

나의 부재 끊임없이

 

<핸드폰을 버리다>(시평 24호), 시평사. 2006

 

핸드폰이 '병원'에 갔을 때 느꼈던 불안감이 어느덧 진화하여 공식적인 '꺼짐' 상태를 오히려 즐겼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그 불안감이 일탈 또는 휴식이 되기 위해서는 적잖은 감정기복 역시 있었고... 던져버리기 보다는 스스로 꺼놓을 수 있는 여유를 갖고 살아야 하지 않을지. 정작 필요하여 '소통 중단'을 연락할 사람은 돌이켜 세어 보면 많지 않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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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 - 도종환

노래방에 갇혀 노래를 부르면서

정작 노래를 잃어버렸다

텅 빈 하늘을 향해 서서

목이 터져라 부르던 노래

바람이 머리칼을 흔들면

걸음을 뗄 때마다 저절로 나오던 노래

물가에 앉으면 가슴이 먼저 젖어 흘러나오던

그런 노래를 잃어버렸다

노래의 마음인 노랫말이 우리 마음을 움직이고

노래의 몸인 소리가 우리 몸을 흔들던 그런 노래들

어떤 날은 노래가 깃발이 되어

우리를 끌고 가고

어떤 날은 수천 수만의 사람을

한 방향으로 한 발짝씩 나아가게 하던 노래

혼자서 돌아오는 밤길 낮은 소리로 읊조리는

내 노래에 내 볼이 젖던 노래

그런 노래들을 잊어버렸다

혼자 부르고 또 불러서

온전히 내 노래가 되던 노래

노래 한 곡이 술 한 잔을 마시게 하고

노래만으로도 온 밤을 깨어 있게 하던

그런 노래들이 우리 곁을 떠나버렸다

중심도 방향도 놓친 뒤부터

바람도 물소리도 멀리한 뒤부터

 

- <슬픔의 뿌리>, 실천문학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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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9-16 09: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의 공원에서 빙 둘러앉아 한 명씩 호명하여 노래 부르던 날들이 그립군요.
시구처럼, 노래방이 생기면서 노래를 잃었다는 생각이.....

달빛푸른고개 2006-09-18 0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햇수로 헤아려보니 노래방을 자주 갔던 기간이 약 3~4년인 것 같고, 그로부터 또 멀어진 시간도 그 정도 되나 봅니다. 반주 없이도 부르던 노래가 심금을 울리는 장면도 있었고... 그런 기억을 더 만들어가야 할 듯...
 

대수리 - 정우영

간에 좋대요, 아내 말 한마디에

옷핀 편 꼬챙이로 부지런히

대수리* 속살 콕콕 찔러 빼먹는다.

머릿속으로는 그 여린 생명 앗는 것을

송구스러워하면서도 솔깃한 유혹 물리치지 못한다.

머리와 유혹 사이 어중간한 공간을 비칠비칠 헤매는데

그림자 키워 창밖에서 그윽히 건너다보던

대추나무가 실실 키득거린다.

제 발치에 대수리 껍질 수북이 쌓아놓고

햇살 담뿍 머금어 푸른 대추 알알이

반짝반짝 살찌운 내 또래 대추나무,

간 없이도 건장한 어깨 들썩거린다.

민망해진 나는 그럴수록 더 빠른 손놀림으로

대수리 집어들고 꼬챙이 잇달아 쑤셔대는 것인데,

그러다보니 내가 대수리를 까먹는 게 아니라

대수리 스스로 내가 불쌍타는 듯

내 입으로 훌훌 날아드는 것만 같다.

제 몸 내게 기꺼이 보시하겠다는 듯

지들끼리 앞다투어 뛰어내리는 것만 같다.

 

* 전라북도 임실에서는 '다슬기'를 '대수리'라 부름.

- <집이 떠나갔다>, 창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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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 - 이시영

심심했던지 재두루미가 후다닥 튀어올라

푸른 하늘을 느릿느릿 헤엄쳐간다

그 옆의 콩꼬투리가 배시시 웃다가 그만

잘 여문 콩알을 우수수 쏟아놓는다

그 밑의 미꾸라지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봇도랑에 하얀 배를 마구 내놓고 통통거린다

먼길을 가던 농부가 자기 논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만히 들여다본다

- <조용한 푸른 하늘>, 솔.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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