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저문 강에 삽을 씻고>, 창비. 1978.

 

평생 시인으로, 선생님으로 살아오시면서 지금까지 남기신 시집은 모두 네 권인 시인의 대표작이다. 1978년에 발표된 이 시는 30여 년 전의 우리네 삶을 그대로 대변하는 시로, 노동시의 효시로도 꼽힌다. 신경림 선생의 <농무>가 연상되기도 하는 詩. '강변에 나가 삽을 씻는' 장면(풍경)만으로도 당시의 시대상을 그려볼 수 있는 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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