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함께 글을 작성할 수 있는 카테고리입니다. 이 카테고리에 글쓰기

대관령

 

1. 문막과 대관령 사이

 

막막하게

막막하게

눈은 내리고

우리들의 따스한 목적지

어디인지

 

끝없는 동굴이던 가슴 속

분분하게 눈이 내리는데

침묵의 여행은 계속된다

 

회갈색의 낙엽송 눈꽃 숲 아래

산이 완강하게 언다

베어문 아랫 입술

피가 배이고

수 만 마리의 흰 나비떼

날아오르는 일순

박제가 되는 문막 고빗길

 

언 강을 가로 질러간

발자국들

이 눈발 속에

피붙이의 장례라도 치른 것인지

황망한 발자국마다

눈물 자죽 얼어 있다

 

 

2. 대관령 청솔

 

시퍼런 뿌리 드러내고

무릎 깨어져 흐르던

검붉은 피 내려다 보며

마른 손 잡아 주기를

몇 밤이나 기다렸는가

 

그대들

이 밤도 산에 오르지 않고

칼끝 같은 달빛

청솔 검푸른 가슴

마구 자른다

 

 

3. 대관령 아흔 아홉 구비를 돌며

 

오리나무 겨울 눈 움켜 쥐고 있는

저 붉은 손을 보아라

시린 해풍 영 넘어와

터진 줄기에

겨울 바다 그 낮은 이야기를 새기고

오리나무는

주먹 쥔 손 펼쳐보이지 않은 채

바다 건너오는 춘삼월 소식에

귀를 연다

 

산갈대 해풍에 꺾여 눕지 못하고

겨우내 능선에 서서

서걱이는 이웃이 되어

오리나무 주먹 쥔 손

펴보아라 펴보아라 소리친다

 

그대들

오리나무 겨울 눈 움켜쥐고 있는

저 붉은 손을 보아라

 

 

4. 겨울밤 모래톱에서

 

그대들

겨울 밤바다에 섰을 때

엄동에도 식을 줄 모르는

뜨거운 피를 달래며

검푸른 생각 뒤척이는 소리

그대들 가슴을 쳐

그대들은 어두운 해변

언 모래톱의 어디쯤 떠밀려 있는

조개껍질이던가

무수한 맨발자국 뒤축에 수줍게

누워 있는 여름 날 작은 계집아이들의

빛 고운 생각이던가

 

그대들 밤바다에 혼곤이 젖고

그대들의 혼돈이 키운

맑고 따뜻한 안개를 헤치며 오는

높새바람

젖은 살을 파고 드는

겨울 밤바다에 서 보라

 

 

5. 대관령에 밤이 오면

 

밤이 오면 나는 눈을 감는다

그대들의 따스한 손바닥 쥘 수 없어

그저 그대들 앞에 무너지는

어둠이기 위해

나는 밤이 오면 눈을 감는다

 

강물은 밤의 어디쯤서 풀려오는지

저무는 강물은 낮게 차오르고

겨울 철새들의 차가운 날개에 실려

그대들의 말소리 떠난 후에

어둠의 자락 강물에 젖는다

 

 

- <겨울 숲에서>. 열음사(부산 소재 출판사). 198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미천골의 밤

 

미천골의 어둠은 짐승 같아서

외딴곳에서 마주치면 서로 놀라기도 하고

서늘하고 퀴퀴한 냄새까지 난다

나는 그 옆구리에 누워 털을 뽑아보기도 하고

목덜미에 올라타보기도 하지만

이 산골에서는 그가 제왕이고

상당한 재산을 불야성에 바치고

어느날 앞이 캄캄해서야 나는

겨우 그의 버러지 같은 신민이 될 수 있었다

저녁 밥숟갈을 빼기 무섭게 시커먼 밤이 내려오면

구렁이처럼 친친 감아오는 어둠에 숨이 막히거나

커다란 젖통에 눌린 남자처럼 허우적거리면서도

나는 전깃불에 겁먹은 어둠들이 모여 사는

산 너머 후레자식 같은 세상을 생각하고는 했다

또 어떤 날은 산이 노루새끼처럼 낑낑거리는 바람에 나가보면

늙은 어둠이 수천 길 제 몸속의 벼랑에 몸을 던지거나

햇어둠이 옻처럼 검은 피칠을 하고 태어나는 걸 보기도 했는데

나는 그것들과 냇가에서 서로 몸을 씻어주기도 했다

나는 너무 밝은 세상에서 눈을 버렸고

생각과 몸을 감출 수 없었지만

이곳에서는 어둠을 몸처럼 입고 다녔으므로

나도 나를 잘 알아볼 수 없었다

밤마다 미천골의 어둠이 더운 고기를 삼키듯 나를 삼키면

그 큰 짐승 안에서 캄캄한 무지를 꿈꾸거나

내 속에 차오르는 어둠 때문에

나는 때로 반딧불이처럼 깜박거리며

그 속을 날아다니고는 했다

 

 

 

- <창작과비평> 108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파란여우 2008-02-12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원도 양양 미천골을 말하는게지요?
선원사지 절터가 남아있고, 불바라기약수가 있고 휴양림이 있는.
어느해 9월의 깊은 밤의 추억이 있습니다.
짐승같은 어둠속에서 계곡물소리를 듣던.

달빛푸른고개 2008-02-12 16: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원도의 순수함이 뭍어나는, 소박하고 정감있는 시를 쓰시는 이 시인은 제가 항상 존경하는 분입니다.
'언제 한번 놀러오라' 하시면 언제라도 달려가고 싶은...
 

최민식

 

 날 때부텀 가난 구뎅이에 빠진 사람이 있거덩. 가들은 구걸하는 어매 등에 업히가 거리에서 자라고 걷게 되믄 알아서 지 묵을 걸 찾아야 되는 기라. 혹은 지 건강을 다 바쳐 일해야 겨우 입에 풀칠하는 사람들이 있지. 가들은 나이 묵으믄 더 팔 수 있는 건강도 없어가 길거리에 나앉아야 한다꼬. 가들의 땀에 쩔은 생활을 찍고 있으믄 살과 뼈로 이롸진 빈곤의 몸통을 덥썩 만져보는 것맹키로 섬찟한 기라.

내는 사진 작업 할라꼬 현실적 고통을 차라리 즐깄거덩. 어떤 어렵음도 사진의 거름이 된다꼬 여깄으니까. 어떤 불행도 쾌감으로 수용할 수 있다 카는 오기로 넘몰래 미소짓곤 했지. 쌀 사놓으믄 연탄 떨어지고 연탄 들라노면 쌀 떨어진 적이 한두 번이 아닌 기라. 아픔맹키로 우리를 깊게 하는 기 없고 가난한 자의 행복만큼 진실한 거는 없어. 내 생애는 젤로 낮고 더럽은 땅을 입맞추믄서 흐르는 물로 남을 기야.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사. 200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잃어버린 안경

 

올해 잡아먹은 안경이 네 개째다

5년째 안경 하나로 버티는 아내는

어디 재벌집 아들하고 살지

같이 못 살겠다고 한다

 

하나는 지역 민중연대 발대식 날이었다

새로운 조직을 띄우는 날

난 이제 구로지역 일에서는 좀 빠지겠다는 생각이었다

십몇년 쫓던 일에서 빠진다 생각하니

뭘 하나 잃어버린 듯 허전했다

안경 하나쯤이야 했다

 

또 하나는 여름에 잃어먹었다

남들이 이젠 그만 하라는, 하지 않아도 된다는

노동자캠프 어쩌고 하는 일을 또 벌이면서다

변통은 물론 술이었지만

하지 말라는 일을 또 하나 저질렀다는

무거움이 뭐 하나라도 덜어내려마 했다

안경 하나쯤이야 했다

 

세번째는 얼마 전 농민대회에 나가서다

해 저물녘 제일 악독하다는 1001부대와 맞서 싸우다였다

아차 싶은 순간에 안경이 휙 날아갔지만

내달리지 않으면 머리가 깨질 참이었다

오십대도 찾아보기 힘든 농민들

그 어른들 싸움에 안경 하나쯤 내놓는 거야 뭐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그런데 어제 또 하나를 잃어먹었다

잊고 지내던 구로공단 옛사람들을 만난 날이었다

386이 정권을 잡았다고 떠들어대는 세상에서

하나같이 잊혀진 사람들

대우어페럴 서광 에이엠케이 나우 협진정밀

가리봉전자 삼경복장 대성전자 슈어프로덕츠

그곳에서 처음 노동운동을 열었던 노출 1세대들

아직도 참가비 만원에 허리가 휘는 사람들

비정규직으로 일한다는 선배

얼마 전 빔에 깔려 네 손가락이 뭉개졌다는 선배

악수를 하다보면 손가락이 없어 허전한 이들 많았다

기쁨과 설움을 많이도 처먹었던가보다

집에 들어와보니 안경이 없었다

 

처음엔 안경 한두 개쯤이야 했다

사람들은 다시 또 죽어나가고

세상에 보기 싫은 꼴이 한둘 아닌 마당이다보니

난 자꾸 안경이라도 잃어버리며

보기 싫은 세상에 작은 항거라도 하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 난 억울하다

내가 왜 이 못된 세상에 안경까지 잡아먹혀야 하나

힘없는 아내에게 그 짐을 늘 지게 할 수도 없다

그래서 나는 이제 바란다

편파적으로 구체적으로 바란다

안경이나 뺏어가는 소극적 싸움이 아닌

진정한 싸움을, 내게 걸어달라고

차라리 내 영혼의 눈을 거둬가달라고

 

 

- <창작과비평> 131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화개일기 6

 

노산악인의 어깨에 산그늘이 희미하게 내려앉는다

이미 자랑이랄 것도 없이 되어버린 과거의 행적들이

온통 주름으로 남은 듯한 얼굴을 돌려 천천히 등을 보일 때

아, 선한 사람의 세월이 저런 것이구나 마음 복잡하였다

대만의 옥산도 일본의 북알프스도 여기는 없다

다만 현실이 있을 뿐

밟고 선 땅이 자꾸 기울어지는 까닭을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뒤뚱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현실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듯하다

확신과 의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어디까지일까 아니

어디서부터일까

하지만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살아진다는 것, 목숨은 질긴 것이므로

그가 돌아서며 엷게 미소짓는다 나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태리에서 벗에게 보낸 누군가의 엽서를 기억한다

정성스레 쓴 간결한 문장이 헌책방에서 산

라즈니쉬의 명상록 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먼 여행길에서 고국의 벗에게 보낸 자신의 글이

전혀 모르는 여자의 수중에 들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지금은 그들에게 잊혀진 우정을 괜히 내가 못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난 여자들의 우정을 믿지 않지만 남자들에 대해선 간혹 생각한다

(나는 그가 사진에 담아준 후지산과 북알프스를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더 돌아보지 않는다 그의 외투자락이 바람에 잠시 펄럭하더니

그만이다 나도 그만 돌아선다

가게의 통유리 너머 낯선 얼굴이 하나 떠 있었다

나는 중얼거린다

외로움은 외롭다고 말할 때 이미 넋두리가 되어버린다!

 

 

 

<창작과비평> 107호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