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개일기 6

 

노산악인의 어깨에 산그늘이 희미하게 내려앉는다

이미 자랑이랄 것도 없이 되어버린 과거의 행적들이

온통 주름으로 남은 듯한 얼굴을 돌려 천천히 등을 보일 때

아, 선한 사람의 세월이 저런 것이구나 마음 복잡하였다

대만의 옥산도 일본의 북알프스도 여기는 없다

다만 현실이 있을 뿐

밟고 선 땅이 자꾸 기울어지는 까닭을 한번도 말하지 않았지만

뒤뚱거리는 그의 발걸음이 현실을 단적으로 설명하는 듯하다

확신과 의지로 갈 수 있는 길이 어디까지일까 아니

어디서부터일까

하지만 맞지 않는 안경을 끼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

살아진다는 것, 목숨은 질긴 것이므로

그가 돌아서며 엷게 미소짓는다 나는 다시 가볍게 고개를 숙인다

이태리에서 벗에게 보낸 누군가의 엽서를 기억한다

정성스레 쓴 간결한 문장이 헌책방에서 산

라즈니쉬의 명상록 갈피에 끼워져 있었다

먼 여행길에서 고국의 벗에게 보낸 자신의 글이

전혀 모르는 여자의 수중에 들게 될 줄 어찌 알았으랴

지금은 그들에게 잊혀진 우정을 괜히 내가 못 버리고 있는 건 아닌지

난 여자들의 우정을 믿지 않지만 남자들에 대해선 간혹 생각한다

(나는 그가 사진에 담아준 후지산과 북알프스를 잘 간직하고 있다)

그는 더 돌아보지 않는다 그의 외투자락이 바람에 잠시 펄럭하더니

그만이다 나도 그만 돌아선다

가게의 통유리 너머 낯선 얼굴이 하나 떠 있었다

나는 중얼거린다

외로움은 외롭다고 말할 때 이미 넋두리가 되어버린다!

 

 

 

<창작과비평> 1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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