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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타

 

낙타를 타고 가리라, 저승길은

별과 달과 해와

모래밖에 본 일이 없는 낙타를 타고.

세상사 물으면 짐짓, 아무 것도 못 본 체

손 저어 대답하면서,

슬픔도 아픔도 까맣게 잊었다는 듯.

누군가 있어 다시 세상에 나가란다면

낙타가 되어 가겠다 대답하리라.

별과 달과 해와

모래만 보고 살다가,

돌아올 때는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사람 하나 등에 업고 오겠노라고.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았는지도 모르는

가장 가엾은 사람 하나 골라

길동무 되어서.

 

; <낙타>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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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8-04 1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일흔은 훌쩍 넘기신 노시인의 신작시집에 '해설'은 없었다. 뉘라서 독자들의 이해를 돕겠다고 이 노시인의 시집에 '해설'을 붙일 수 있겠는가?
 

소설

 

  한창훈씨를 부축하고 간 김청미씨(시인 겸 약사)에 의하면 울란바토르병원엔 약품이 거의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게다가 이상한 것은 환자의 옷을 모두 벗기고(환자복도 주지 않으면서) 얼굴엔 콜타르 같은 검은색을 칠하더라는 것이다. 그러곤 그 밤이 새도록 묵묵부답, 아무리 아프다고 호소를 해도 의사가 멀뚱한 눈으로 잠깐 들여다보고 갈 뿐 자기 방에서 TV 시청에만 열심이더라는 것이다. 이튿날 아침 공항에 나간 강형철씨로부터 연락이 왔다. 서울행 비행기표를 구했으니 환자를 싣고 이십분 이내로 공항으로 달려오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제일 난감한 것이 환자의 벌거벗은 몸. 당연히 완자복을 줄 줄 알고 입었던 옷을 모두 호텔로 보내버렸기 때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김청미씨는 택시를 불러 팬티바람의 한창훈씨를 싣고 곧장 공항으로 내달렸다. 그런데 이 모습을 보고 가장 놀란 사람은 강형철씨. 공항 입구에서 한창훈씨를 보자마자 청사 안으로 달려가며 "폴리스!"를 외쳐대었다고 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다음의 이야기. 그 와중에도 김청미씨는 강형철씨가 어디서 구해온 휠체어를 밀면서 한창훈씨에게 이렇게 속닥거렸다고 한다. "이담에 이 장면을 꼭 소설로 써부리씨요 잉!" 그러나 한창훈씨의 대답은 의외로 단순명료했다고 한다. "야 쪽팔리게 이것을 어떻게 소설로 쓰냐?"

그다음 이야기

 김청미씨로부터 한창훈을 넘겨받아 서울행 MIAT에 오른 고형렬씨 말에 의하면, 어깨엔 붕대를 칭칭 감고 얼굴엔 검은 콜타르 색을 칠한, 좀 실례를 해서 표현하면 야차 같은 거구인 그의 팔을 붙들고 비행기 안으로 들어서자 깜짝 놀란 승객들이 아주 불편해하는 바람에 기분 좋게들 비어있는 일등석에 앉아 맛있는 특식들을 받아먹으며 서울까지 아주 잘 왔다고 한다.

 

; <창작과비평> 2006.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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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洙映調로

 

시를 읽자

부지런히 읽자

네 영혼에 때가 끼기 전에

시도 쓰자

부지런히 쓰자

마른 영혼이 바람에 불려가지 않게

묵직한 놈으로

시의 길은 처음 가는 길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처음으로 처음으로 가는 길

 

;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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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南柱 시인 영전에

 

벗이여 남주여 그러나 나의 벗을 넘어 민족의 아들이여 민주 전사여

가다 못 가면 쉬었다 가자고

그대의 가쁜 숨결에 속삭여댔지만

아픈 다리 이끌며

가로질러 산을 넘고 물 건너 허허로이 저세상 입구로 먼저 가버린 친구여

남도엔 때아닌 폭설이 들판을 덮고

짚북더미 속에서 마늘 싹들은 파릇파릇 시퍼런 눈을 뜨는데

우리는 그대의 죄 없이 맑은 눈을 덮어

기어이 고향 마을로 돌려보내야 한단 말인가

한때는 영어 단어장 한 손에 들고 소와 함께 소의 웃음을 천진스럽게 웃던 소년 김남주의 마을

자라서는 그대를 간첩이라 하여 내쫓고 전사라 하여 내치던

분단 속의 엄혹한 분단의 마을, 광주의 마을

그대에게 난생 처음으로 꽃다발을 걸어주던 마을

아니 평생 농민 어머니의 마을 아버지의 마을

그대가 일생을 걸고 해방시키고자 했던 계급의 마을에

이제 그대의 관을 내리고 우리 목메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어여 가게 남주

삭풍에 가지 부러지고 귀 씻겨나간 채로 뒤돌아보지 말고 어여 가게 남주

가다가 들판 만나면 거기 개울가에서

낯익은 아이들과 함께 염소 뿔 싸움도 시키고

사나운 파도 만나면 어기여차 넘어주며

거기 뱃전에 아기를 업고 서성이는 아낙에게도

눈물 글썽이며 이 세상 안부도 전해주고,

 

오늘은 햇빛 밝고 이 세상에 바람 부는 날

자네 알지, 자네가 9년 만에 옥에서 나와 맨 처음 고개 떨구고 섰던 망월동 언덕

수많은 민주 영령들이 언덕빼기 아래까지 달려나오며 햇빛 속에 하얀 고사리손을 흔드는 것이 보이지?

어여 가게 남주

이 세상 일일랑 이제 남은 자들의 몫

자넨 일생을 제국주의의 억압자들과 사력을 다해 싸웠고

이제 역사속에 가 아기 손으로 새로 태어나야 할 때

세상은 자네에게 너무 많은 짐을 지웠고

자네는 한번도 그 짐을 등에서 내린 적이 없었는데

이제는 그 짐일랑 우리에게 내려놓고 편안히 가게

가로질러 산을 넘고 물 건너 표표히 먼저 간 친구

깨꽃이 환하게 피면 우리에게 다시 오게나

송화 가루 온 산천에 펄펄 날리면

눈 속의 샛붉은 매화처럼 다시 오게나

해방둥이 그대의 삶은 이 땅 반세기의 역사 그 자체

분단의 철조망과 제국의 사슬이 걷힐 날 반드시 있으리

자본에 의해 자본이 패퇴하는 날 반드시 있으리

그때 다시 이 세상에 오게나 아픈 다리 바로 딛고 감은 눈 새로 뜨며

그 잔잔한 소년의 미소로

벗이여 남주여 나의 벗을 넘어 민주주의의 참다운 전사여

 

; <무늬> 문학과지성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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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7-30 1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국을 보며 다시 떠오르는 전사의 얼굴...

소나무집 2008-08-01 16: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살고 있는 곳에서 가까운 해남에
시인의 생가가 있다고 들어서 한 번 찾아가 보려고 해요.

달빛푸른고개 2008-08-01 18:00   좋아요 0 | URL
이 시를 다시 떠올린 이유는 고인의 10주기를 맞아 펴낸 시인의 시선집 <꽃 속에 피가 흐른다>(창비, 2004)를 이 정부가 군당국에 '불온서적'으로 분류하고 병영에서 보지 못하게 했다는 '참담한' 소식 때문이었습니다. 정권의 퇴행이 아쉽기만 하군요. 허름한 서재를 방문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참외 꼭지

 

여러 날 따지 못했다

때를 놓쳤다

우리 부부는 싸웠고,

참외는 개미가 먹었다

포식을 했다

줄줄 흘러내린 과즙은

까마중이 먹었다

물관과 체관을 지나서

흰 꽃을 지났다

아까 날아오른 두엇은

씨앗 도둑이다

내장으로 가서

곧 항문을 지날 것이다

 

내 참외를 천지가 먹었다

 

도둑놈!

 

; <무릎 위의 자작나무> 창비,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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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푸른고개 2008-07-28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이쁜) 도둑놈!'이리라. 그의 (주말농장) 밭에 가보고 싶다.

파란여우 2008-07-29 2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까마중... 요새 사람들은 이거 잘 모르죠.
참외도 줄줄 단물 흐르게해서 먹는거도 모르죠.
예쁘게 조각내서 잘라놓은 참외를 포크로 콕 찍어 먹으니까요.

제 밭에 심어 놓은 참외는 아직도 시퍼러딩딩합니다.
나쁜놈...ㅎㅎㅎ

달빛푸른고개 2008-07-30 09:15   좋아요 0 | URL
ㅎㅎㅎ 곧 여물어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