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의 미래 - 앨빈 토플러 (반양장)
앨빈 토플러 지음, 김중웅 옮김 / 청림출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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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부의 미래(revolutionary wealth)>, <청소년 부의 미래> 서평

‘혁명적인(revolutionary)’에 혹했다가 ‘부유(wealth)’에 눈을 의심했다. ‘복지(welfare)’의 오타려니 했는데 본문을 읽고 보니 ‘독점(monopoly)’이라고 안 한 것을 오히려 고맙게 생각해야 했다.

총 656쪽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부를 찬양하라’ 정도가 아닐까? 이 책의 마지막 두 단락만 읽어도 알 수 있다.

“산업화, 즉 현대화가 그랬듯이 제3물결 혁명은 문명의 모든 분야를 포함하는 변화이다. 주식시장이 이리저리 갈피를 못 잡고 그밖에 다른 요인들이 중간에 끼어들더라도, 혁명적 부는 전 세계에 걸쳐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미래의 경제와 사회가 형태를 갖추어 감에 따라 개인과 기업, 조직, 정부 등 우리 모두는 미래 속으로 뛰어드는 가장 격렬하고 급격한 변화에 직면하고 있다. 모든 사항을 고려했을 때, 이것도 한 번 살아볼 가치가 있는 환상적인 순간이다. 미지의 21세기에 들어온 것을 뜨거운 가슴으로 환영한다!”

미래 사회에 대한 예언서라기보다는 현 사회에 대한 순응서라고 해야 좋을 듯하다. 진부한 내용들이 많아 실망스럽고, 친시장적, 친금융적, 친세계화적 발언으로 도배가 되어 불쾌하기도 했다. 예를 들어보자.

먼저, 기업과 노조에 대한 그의 의견을 보자.
기업은 고속도로를 시속 100마일로 빠르게 달리는데, 노조는 30마일로 느리게 움직인다고 친기업 반노조적인 비유를 했다. 그러나 시속 100마일(160km)은 속도위반으로 벌금을 내야 한다. 교통사고로 사람을 죽이게 할 위험이 크다. 반면에 시속 30마일(48km)는 연비가 좋은 경제속도에 가까워 지속가능한 사회를 위해 오히려 바람직하다.

둘째로, 세계화에 대한 그의 태도이다.
“공장과 해외직접투자의 유동성이 증가하고, 인터넷과 사이버 공간이 늘어나며, 사람들의 이동이 크게 늘어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재세계화로부터 반세계화로의 역사적 전환이 일어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은 전부도 아니며 또 진실도 아니다”
결국 그는 세계화를 어쩔 수 없다고 보거나 그래야 한다고 보고 있다.

셋째로, 빈곤과 과학기술에 대한 그의 의견이다.
“오늘날의 가난한 농촌 지역을 생산성 높은 첨단 기업 센터(더 이상 늙고 쇠약한 부모님들의 근력에 의존하지 않고, 아이들의 지적 능력에 의존하는 지역)로 탈바꿈시키기 위한 전략이 필요하다. 현실적으로 보면 이런 전략은 너무 이상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행히 현재 개발 중인 강력한 과학 기술의 발전을 이용할 수 있다. 찬반 논쟁이 뜨거운 유전자 변형 식품이 그중 하나이다”
빈곤을 해결하는 방법이 빈부격차를 줄이는 게 아니라, 유전자변형식품을 생산하는 것이라는 발상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청소년들을 위해 새롭게 출판된 <청소년 부의미래>를 읽어 보면 더욱 당황스런 내용이 드러난다. 예를 들어 보자.

“브라질 남동부에 위치한 쿠리티바는 지상 최고의 환경 도시이자 국제연합에서도 인정한 꿈의 생태도시입니다. (중략) 미래의 도시는 바로 쿠리티바처럼 24시간 거래 시스템을 갖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요즘 미국에서도 호텔 비즈니스 센터는 물론이고 신문 인쇄소까지 24/7영업이 빠르게 확산되고 있습니다. 24/7영업이란 하루 24시간, 한주 7일간 모두 문을 여는 연중 무휴 영업 방식을 뜻합니다. (중략) 현재 미국에는 3,300만명의 프리에이전트, 즉 자유직 근로자가 있습니다. 미국 노동력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지요.”

밤에 불을 켜고 있는 것 자체가 환경파괴인데, 밤새켜고 있는 것을 친환경으로 부르는 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게다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프리에이전트(자유직 근로자)로 미화하는 것 또한...

“복제 양 돌리를 탄생시킨 기술은 한국에서도 복제 개인 스너피를 탄생시켰습니다. 복제에 대한 윤리적인 논쟁과는 별개로 농업과 가축 생산에 미칠 수 있는 복제 기술의 잠재력 또한 무궁무진합니다. (중략) 흔히들 첨단 기술이 빈곤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GMO와 생명복제를 빈곤의 해결책으로 청소년들에게 제시하는 이 책을 왜 교육과학기술부는 금서로 지정하지 않을까 궁금하다. 금서지정의 선구자, 국방부에서라도....

미래사회에 대한 예언은 결코 낙관적일 수 없다.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언젠가 멸망한다는 건 진리이다. 불량한 현실에 순응하며 가당치 않은 장밋빛 미래를 예언하는 사람보다는 불편한 진실을 알리는 사람의 글을 읽는 게 오히려 낙관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토플러와 이별하고 리프킨을 만나라.

덧붙임 : 서울 모 고등학교에선 학교장의 직권으로 <부의 미래> 35권을 구입하여 전교생에게 읽히고 독후활동을 시켰다. 학생들이 재미 없다고 안 읽자 <청소년 부의 미래>를 35권 구입하여 읽히고 있다. 그 학교장은 왜 <부의 미래>를 그토록 전교생들에게 읽히고 싶어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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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반인간 2013-10-31 2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저도 교장 덕분에 읽다가 불편해서 집어치웠다죠 ~_~
 
쁘띠 부르좌여, 단결하라!
버터플라이 소울 지음 / 소울인소울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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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가 29살에 27살인 엥겔스와 함께 쓴 <공산당선언>은 23쪽 밖에 안되는 소책자였다고 한다.  짧지만 할 말은 다 했던 책이다.  

이 책 <쁘띠 부르좌여, 단결하라>의 유일한 아쉬움은 178쪽 분량이다. 딱 <공산당선언>만큼의 분량이었으면 좋았을 것을... 

여하튼 괜찮다. 편하게 읽히고 주제도 선명하다. 비유도 탁월하다.  

요컨대, 사유재산을 부정한 공산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은 인정하되 지나친 재산을 금지하자는 것이다. 더불어 재산형성 과정을 투명하게 하자는 것이다.  

비유컨대, 개인의 재산은 세포인데, 과도한 재산증식은 암세포와 같아서 결국 우리 사회(우리몸)를 죽이게 된다는 말이다.  

저자의 주장에 공감하지만 소유상한을 어느 수준까지 할 것인가는 잘 모르겠다. 저자는 "지구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의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100년치"를 기준으로 하자는데, 왜 꼭 그 기준인지... 

소유상한이 너무 낮거나 높으면 일하고 싶은 마음을 잃기 때문에 적절한 수준을 결정하는 게 핵심일 듯하다.  

 

<인상 깊은 구절> 


개인소유상한의 기준은 가장 부유한 나라의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100년 치 

상한을 넘는 부는 공익을 목적으로 사용 

상속의 상한은 각 자녀에 대해 도시근로자 평균소득 10년 치 

보유재산 소명의 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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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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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에 4시간 수면법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다.  

한때 아침형 인간이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사 읽은 적이 있다. 

4시간은커녕 8시간을 자도 아침에 일어나기 힘든 나에겐 좌절감만 안겨 준 책들이다. 

러셀이 1930년대에 쓴 이 수필집을 진작에 읽었더라면.... 하지만 지금이라도 읽어서 다행이다.  

정부가 모든 노동자들에게 하루 4시간만 노동하도록 규제한다면 행복한 세상이 되겠지. 

 <인상 깊은 구절> 

어떤 시점에서 일정한 수의 사람이 핀 만드는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들은 하루 8시간 일해서 세상에 필요한 만큼의 핀을 만들어 낸다. 그때 누군가가 같은 인원으로 전보다 두 배의 핀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기계를 발명한다. 그러나 그 세계에선 핀을 두 배씩이나 필요로 하지 않을 뿐더러 이미 핀 값이 너무 떨어져서 더 이상 낮은 가격으론 팔 수도 없다.
이때 지각 있는 세상이라면 핀 생산에 관계하는 모든 이들의 노동 시간을 8시간에서 4시간으로 조정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모두 종전처럼 잘 굴러갈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우리 세계에서 그렇게 했다간 풍속 문란 행위쯤으로 여길 것이다. 노동자들은 여전히 8시간씩 일하고, 핀은 자꾸 남아돌고, 파산하는 경영자들이 생겨나고, 과거 핀 제조에 관계했던 인원의 절반이 직장에서 내쫓긴다.

어떤 사람(헨드 포드 씨라고 해두자)이 누구도 경쟁할 수 없는 싼 가격으로 자동차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하자. 그 결과 다른 자동차 회사들은 모두 도산하게 된다. 따라서 값싼 새 차 한 대를 생산하게 됨으로써 사회가 지출하는 비용을 보전하기 위해서는 이제 쓸모없게 되어버린 다른 회사들의 모든 설비와 과거 다른 회사들에서 일하다가 직장을 잃게 된 노동자와 경영자들을 키우고 교육하는 데 들 비용의 적절한 할당액을 포드 씨의 제작비에 추가해야만 한다(물론 실직자 가운데 일부는 포드의 회사로 흡수되겠지만 전원이 그렇게 되기란 힘들 것이다. 포드 씨 회사의 새로운 공정은 예전보다 저비용이고 따라서 노동력도 덜 필요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부담해야 할 비용은 그밖에도 더 있다. 노동 쟁의, 파업, 폭동, 경찰력의 증강, 재판과 구금. 이 모든 항목들을 고려해 보면 옛날 차들보다 새 차들이 사회에 안기는 부담이 훨씬 크다는 것이 금방 드러난다. 우리 경제제도에서 무엇이 사회에 유리한가를 결정하는 것은 사회 부담 비용인 반면, 실제로 이루어지는 일을 결정하는 것은 개별 생산자의 부담 비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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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많은 디자인 씨 - 디자인으로 세상 읽기
김은산 지음 / 양철북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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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세종로를 지나다가 이순신 뒤의 세종대왕을 보았다. 

이순신도 어색한데 세종대왕까지 있으니 더 어색했다. 

광화문과 겹쳐 보았을 때 더 어울리지 않았다. 

정의 사회 구현을 외쳤던 전두환 시절이 가장 정의롭지 못했던 것처럼, 

디자인 서울을 외치는 오세훈 시절이 가장 뒤자인스럽다.  

이 책에선 오세훈의 전임자인 이명박이 외국 미술가에게 35억을 주고 만든 똥소라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함읽어보라! 서울 디자인이 왜 뒤자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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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드메이드 라이프 - 손으로 만드는 기쁨, 자연에서 누리는 평화
윌리엄 코퍼스웨이트 지음, 이한중 옮김, 피터 포브스 사진 / 돌베개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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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적 삶에 대한 좋은 말씀은 노장자, 부처, 간디, 소로, 니어링 등을 통해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명단에 윌리엄코퍼스웨이트도 더하고 싶다. 그의 책 ‘핸드메이드라이프’에선 특히 교육과 건축에 대한 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다. 가끔 매끄럽지 않은 번역이 눈에 띠는 것을 제외하곤 참 좋다.

<특히 좋았던 부분들>

나는 일주일에 한두 번 장을 보기 위해 40분 동안 카누를 저어 나간다. 모터를 이용하면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40분씩 걸려 카누로 간다고 나를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노젓기를 즐긴다. 이때 나는 일주일 중에 가장 느긋한 시간을 보내며, 좋은 생각이 많이 떠오르기도 한다. 물수리가 날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운동이 되니 기분도 좋다. 모터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내 상황에는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터를 이용해서 이동하는 것은 ‘더 나은’ 방법이 아니라 단지 ‘또 다른’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몇 년 전에 내 이웃 중 하나가 동네의 어느 농부에게서 감자를 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있다. 그는 농부로부터 파운드당 감자 값이 1.5센트라는 말을 듣자 반가워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하지만 겨우 그 돈을 벌자고 감자를 키워서는 안됩니다.” 농부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를 털어놓았고, 생산비가 파운드당 5센트였다는 사실을 알고 난 내 이웃은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파운드당 5센트씩을 더 얹어 드리지요. 당신이 농사를 그만두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불이익이 되니까요.”


자발적 노예제도
누구나 노예제도-사람을 파는 것-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파는 것 또한 잘못된 일 아닌가? 고용주들은 이런 말 하기를 참 좋아한다. 즉, 즐거운 작업 공간, 재미있는 동료들, 두둑한 월급, 연금과 보험 지급, 짧은 노동시간, 넉넉한 휴가, 스톡옵션, 보너스, 승진 기회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런 좋은 조건에서의 일도 본인이 하고 싶지 않으면-돈만을 위해 하는 일이라면-그 일은 여전히 몸을 파는 행위에 불과하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을 착취하는 지금 상황을 당분간은 묵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본다면 이제는 스스로를 착취하는 일을 그만두어야 할 때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우리 자신을 파는 시간을 매달 조금씩 줄일 수만 있다면, 해마다 일하는 날수의 100퍼센트를 모두 자신을 파는 데 쓰지 않고 70,50,30퍼센트로 점점 줄여나가는 때가 올 수도 있다.
자기 자신을 착취하는 시간을 줄여나가는 것은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실로 중요한 일이다. 그러기 위한 첫걸음은 우리가 어느 정도로 우리 자신을 파고 있는지 자각하는 것이다.
대개 일터에서 돌아왔을 때 불행해 보이는 어른들의 모습은 집안 분위기를 불안하게 만든다. 자라나는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어른들이 불행해 보이는 모습으로 집에 돌아오면 일이라는 것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쉽다. 여러분의 아이들과 정직하게 대면하여 여러분이 팔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을, 여러분은 매길 수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는 점을 알게 해줄 수 있다는 상상을 해보라. 부모가 자신들의 그릇된 생활방식을 알면서도 불행을 계속해서 합리화함으로써 우리들도 똑같은 패턴을 반복하도록 만드는 것보다, 아이들에게 치료책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훨씬 더 건강해 보일 것이다.
본인에게 맞지 않는 일을 아예 그만두고 새 일을 찾아보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상황을 개선할 수는 있다. 현재 하는 일에서 성장하고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도록 노력하라. 현재의 일에서 가장 신뢰하는 부분에 힘을 쏟으라. 비생산적이고 건강하지 못하고 낭비라고 생각되는 방식에 쏟는 시간을 줄여서, 즐길 수 있고 가치 있다고 느끼는 일에 쓰도록 노력하라.
우리가 스스로를 파는 행위를 최소화할 수 있다면 우리를 둘러싼 사회에 아주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는 원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하루의 작업 시간을 줄일 수 있다. 단지 ‘상품’을 적게 쓰면서 살기로 정하기만 하면 된다. 콜라나 담배나 술 없이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불량식품이나 커피나 차를 소비하지 않고도 살 수 있다. 또한 유행이라는 일종의 사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켜 새로운 옷을 자꾸 사기보다는 지금 갖고 있는 옷을 오랫동안 입을 수 있도록 노력하는 방법도 있다. 자동차나 다른 장비도 마찬가지다.
소박한 삶의 기본 원칙 가운데 하나는 불필요한 것들을 소비하기 위해 돈을 버는 대신, 꼭 필요한 것들을 구하기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고용되어 일하는 시간의 총량은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구성원들-장애를 가진 사람이나 너무 나이가 많거나 적은 사람들은 제외하고-이 각자의 노력을 다할 경우 이들에 의해 절약되는 시간은 엄청날 것이며, 스스로를 내다 팔 필요성 또한 절대적으로 줄어들 것이다. 자신의 집안일-집을 짓거나 텃밭을 가꾸거나 기계를 수선하거나 바느질을 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쏟고 싶어하는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볼 때, 개인이 전체 노동시장에 의무적으로 기여해야 할 시간 또한 줄어들 것이다.
스코트 니어링은 신체가 멀쩡한 모든 성인들이 하루에 4시간만 밥벌이에 종사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그로서는 4시간도 후하게 쳐준 셈이다. 간디는 하루 2시간이면 인간의 기본 욕구를 채우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그들이 이런 생각을 한 이후에 현대의 도구들은 생산성이 엄청나게 증가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노동이 고르게 분배된다면 각자의 삶에서 일은 아름답고 흥미로운 존재가 될 것이다. 행복해지려면 일을 하는 데 드는 노력을 줄여야 한다. 예컨대 제대로 된 여건에서 빵을 굽는 일은 즐거운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과로의 압력이 있거나 대가가 너무 적거나 소외된 환경이거나 의심스러운 재료를 써야 하는 입장이라면 빵 굽기가 고역이 될 수 있다.

우리사회에는 윤리적 바탕이 빈약한 전문 지식의 예가 많다. 대량 살상 무기 개발에 투입된 과학 영재, 가만히 앉아서 이익을 챙기기 위해 시장 조작에 동원되는 수학, 대중을 속이기 위해 광고에 이용되는 예술에 가까운 재능을 잘 살펴보라. 암기 위주의 지식은 사회 전체의 행복을 염려하는 마음의 견제를 받지 않으면 삶과 건강에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진심어린 마음이 없는 배움은 위험을 초래하기 십상이다.

가르치는 주된 이유가 돈 때문이라면 이는 명백히 자기 몸을 파는 행위이다. “그러면 달리 무엇 때문에 가르쳐야 하는가?”라고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는 즐거움 때문이어야 한다. 둘째는 가르침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하는 역할 때문일 것이다. 셋째는 가르침이 제대로 이루어질 때 가르치는 사람 또한 배울 수 있기 때문이리라.

강요된 교육은 폭력이다. 아주 힘들긴 하지만 권위적인 방법을 써서 사실 위주의 지식을 어느 정도 주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대가는 어떠한가? 게다가 강요된 배움이란 얼마나 지독히도 낭비적이며, 학생과 교사의 시간과 마음을 갉아먹는 것인가? 이런 식으로 교육이 이루어지다보면 교사와 학생 모두 ‘강압’이 의사소통의 한 형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학교에서의 엄한 통제와 강압적인 규율은 배우고자 하는 기본적인 욕구를 훼손해버린다. 민주주의를 신봉한다고 하면서 그런 원칙을 가르치고 그런 이해관계를 옹호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창의성과 순응성은 정반대의 속성이다. 민주주의는 창의성을 토대로 번성하는 반면 군대와 감옥과 학교는 순응성을 토대로 번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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