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체로 사는 이유
에버하르트 아놀드 지음, 김순현 옮김 / 비아토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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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더호프 공동체를 만든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책, 공동체로 사는 이유를 읽으면서 맑스와 엥겔스의 책, 공산주의 선언이 떠올랐다. 두 책의 공통점은 무거운 주제와 달리 무척 가볍다는 점이다. 작고 얇아서 그렇다. 둘다 함께하자는 게 주제다. 공동생산하여 공유하자는 말이다. 그런데 구체적인 방법은 매우 다르다. 에버하르트는 비폭력. 맑스와 엥겔스는 폭력. 누구의 말이 옳을까?

 

우리처럼 국제 평화와 사유재산 제도의 철폐와 모든 재화의 공유를 주창하는 정치 단체들이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단체들의 투쟁에 더 이상 가담해서는 안 되며, 그 투쟁이 그 거대 단체들의 정신에 걸맞는 것이라고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도 그 단체들처럼 모든 가난에 시달리는 사람들, 집과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 노예 노동으로 인해 정신적 발전이 위축된 사람들에게 마음이 쓰이고 쏠린다. 우리도 그 단체들처럼 무산자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 멸시당하는 사람들을 편들지만, 무자비한 수단을 동원하여 정반대의 집단들에 상처를 입히려고 하는 계급투쟁을 멀리한다. 계급투쟁은 프롤레타리아에게 목숨을 건 사람들에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국가의 방어전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의 방어전도 반대한다. 순수한 영적 싸움 속에서만 우리는 자유와 일치, 인류 평화와 사회 정의를 옹호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한다. 이로써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생활해야 할 이유가 분명해진다. (에버하르트 공동체로 사는 이유 )

 

성직자가 언제나 봉건파(지주)와 손을 맞잡았던 것처럼 성직자 사회주의도 봉건적 사회주의와 손을 맞잡는다. 기독교적 금욕주의에 사회주의의 색채를 가하는 것보다 더 쉬운 일도 없다. 기독교 역시 사적 소유에, 결혼에, 국가에 극구 반대하지 않았던가? 기독교는 그 대신에 자선과 구걸, 독신과 육욕 근절, 수도원 생활과 교회를 설교하지 않았던가. 기독교 사회주의는 성직자가 귀족의 분노에 봉헌하는 성수일 뿐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이제까지의 모든 사회 질서의 폭력적 전복에 의해 달성될 수 있을 뿐임을 공공연하게 선포한다. 지배 계급들로 하여금 공산주의 혁명 앞에서 전율케 하라. 프롤레타리아들에게는 족쇄 말고는 공산주의 혁명에서 잃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맑스, 엥겔스 공산주의 선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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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10년의 미래 - 한국교회가 주목해야 할 10가지 어젠다
정재영 지음 / SFC출판부(학생신앙운동출판부)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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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소통, 결정, 미래 등의 문제로 고민을 하고 있던 차에 좋은 책을 읽게 되었다. 


어느 집단이든 이견이 있게 마련이다. 그 의견의 차이를 확인하고 약속을 합의해가는 과정이 투명하고 민주적이어야 한다.  

 

<밑줄>

교회는 여전히 교회 조직의 관료제로 인해 비인격적 인간관계를 야기하고 있다. 교회조직의 관리자는 행정가로 변신하였고, 교역자들은 하나님 나라 사역의 동역자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직 종사자로 전락하고 있다. 또한 교회 내 권력의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지고 결정권은 소수에게 집중되어 교회 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평신도들은 교회 관료의 정책 결정에 대해 거의 알지 못하는 실정이다. 대부분의 재정 지원은 평신도들이 제공하지만 재정의 사용은 소수 엘리트 집단에 의해 사용이 결정되고 있다. 흔히 교회를 공동체로 표현하지만, 사실 소수에게 권한이 집중되어 있는 조직을 공동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루빨리 이에 대한 개선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155)

 

부모 세대에 비해 종교적 충성도가 낮은 젊은 세대들은 무조건 순종하기보다 자신들의 의사를 표현하고 이것이 교회 운영에도 반영되기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에, 상명하복을 강조하게 되는 관료제적 대형 교회보다는 아래로부터의 의사소통이 가능한 회중 중심의 중소형 교회를 선택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에 기존 교회를 떠나 새로운 교회를 찾고 있는 청년들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는 것이 이를 방증하고 있다. 앞으로는 기성세대보다는 젊은 세대들의 영적인 욕구에 민감하고 이를 수용할 수 있는 교회에게 성장의 가능성이 열려 있으므로, 이들의 영적인 욕구에 대한 파악과 이해가 시급한 과제라고 본다. (222)

 

평범한 사람들이 모여서 세운 평신도 교회를 주제로 쓴 평신도 교회 이야기 : 21세기 한국교회의 비전(최승호 저, 대장간 출판사)이 출간되면서 평신도 교회라는 단어가 회자되기 시작하였다. 목회자가 없으면 절대로 교회를 구성할 수 없다고 믿었던 사람들이 이러한 성경의 진리에 눈을 뜨면서 삼삼오오 모여서 교회를 구성하게 되었고, 이제는 상당수의 평신도 교회들이 세워졌다. 이러한 평신도 교회의 등장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으나, 갈수록 많은 교회들이 민주적인 교회 운영, 개방적인 의사소통구조로의 전환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 따라서 교회의 정체성이 평신도 교회인지 아닌지를 묻기 보다는, 평신도의 참여도를 얼마나 보장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할 것이다. 다만 평신도의 사역을 위해서는 평신도의 역량 개발이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평신도들이 신학 지식, 목회 감각, 감성의 민감성 등에 대하여 높은 수준의 기독교 교양을 갖추고 있는 교회의 경우에는 평신도들의 참여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교회는 평신도의 훈련 프로그램과 리더십의 개발을 고민하게 된다. 이러한 리더십은 양적 성장보다는 사람의 요구에 민감한 리더십, 선택의 중요성을 인식하며 제공하는 열린 리더십, 사람들의 표현과 문화적 욕구에 민감한 리더십, 여성성과 양성 평등의 원리를 이해하는 리더십이 되어야 한다. 최근 교회에서 평신도들의 참여를 전제로 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시행되는 것은 교회 공동체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방법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평신도의 참여도를 증진시키는 과정에서 다양한 은사개발 프로그램이나 리더십 코스가 개설되고 있는데, 이는 평신도들이 새로이 주체성을 가지도록 하는 과정으로 볼 수도 있다. 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프로그램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이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하는 주체로서 평신도들은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프로그램을 편의상 선택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평신도들이 이런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동기는 단순히 내적 치유나 영적인 양육 등을 통한 전인적 성숙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서, 전체 교회 공동체에 대한 관심과 공동체를 통한 사역으로 연결되어야 바람직할 것이다. (236)

 

최근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는 말이 끊임없이 들리고 있다. 젊은이들은 한 사회 안에서 언제나 기성세대에 도전하며 새로운 사회의 변화를 가장 첨단에서 수용하는 이들이다. 이들이 교회를 떠난다는 말은 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미래 사회를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의 본질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항상 역사적인 형태로 나타난다는 한스 큉의 말대로, 교회는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기 보다는 새로운 세대에게 설득력이 있는 모습으로 갱신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는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사회의 변화에 민감하고 시대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교회 조직은 보다 탄력 있고 자율성을 발휘할 수 있는 형태로 재구조화될 필요가 있고, 교회 구성원은 보다 주체성을 가지고 각자의 전문성에 따라 다양한 영역에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 지도자는 교회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수렴하여 의사 결정을 하고 교회가 현대 사회에서 적실성을 갖는 사역을 할 수 있도록 리더십을 발휘할 필요가 있다.

최근에는 가정교회, 평신도교회, 사이버교회 등 다양한 형태의 교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게다가 예배 처소도 변하고 있어, 전통적인 형태의 교회당이 아닌 학교나 시민 단체 강당뿐만 아니라 카페, 레스토랑, 심지어는 클럽이나 공연장에서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이러한 모습은 기존의 관점으로 본다면 교회가 변질되고 왜곡되고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그저 교회가 새로운 형태로 변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젊은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는 이러한 새로운 교회 운동은 일종의 한국형 이머징 처치로 봐도 좋은 것이다. 이러한 운동은 당분간 지속될 것이고, 이러한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을 수도 없다. 교회가 오늘날의 상황에 적실한 모습으로 적응해가는 과정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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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의 이해 현대사상의 모험 8
마샬 맥루한 지음, 김성기 & 이한우 옮김 / 민음사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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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안 읽어도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어디서든 들어 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어도 그 뜻을 알기가 쉽지 않다. 왜냐면 너무 장황하고 어려워서.


언어, 인쇄, 만화, 사진, 신문, 광고, 게임, 전신, 타자기, 전화, 축음기,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뿐만이 아니라 도로, , 의복, 주택, , 시계, 바퀴, 자전거, 비행기, 자동차, 무기, 자동화까지 미디어의 관점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 게다가 1960년대 미국사회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으면 이 책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마셜 맥루언의 불친절한, 현학의 바다에서 장시간 표류하다 보면 가끔 눈이 번쩍 뜨이는 섬을 발견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표음문자가 서양인의 삶을 어떻게 발전시켰는가 하는 대목이다, 다소 서구우월주의가 느껴지긴 하지만. 언어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미디어라면, 그 미디어인 언어가 표음문자여서 그렇지 않은 동양(중국)보다 서양이 우월하다는. 그래서 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말. 

 

<밑줄>

러시아에서 바스크족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포르투갈에서 페루에 이르기까지 서구 세계에서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들은 모두 그리스-로마 문자에서 나온 것이다. 그 문자의 형태와 음성이 의미상의 말의 내용과 분리되는 독특한 특징으로 인해 이 알파벳들은 문화들간의 번역과 동질화를 위한 가장 철저한 기술이 되었다. 그 밖의 다른 모든 문자들은 단지 하나의 문화에만 봉사해 그 문화를 다른 문화들과 분리하는 데 기여해 왔다. 비록 조잡하기는 해도 표음적인 문자들만이 그 어떤 언어의 소리든지간에 하나의 동일한 시각적 부호로 번역하는 데 사용될 수 있었다. 오늘날 중국인들은 중국어를 서구의 표음 문자들을 사용해 표기해 보려고 하고 있는데, 광범위한 성조 변화와 동음이의어 같은 특수한 문제에 봉착했다. 이리하여 중국어의 단음 어절을 세분화해 다음절어로 변형시켜 음성상의 애매함을 제거하려는 노력이 이루어지고 있다. 서구의 표음 알파벳이 이제 중국어와 중국 문화의 청각 중심적인 특징을 변화시키고 있다. 중국이 지금 이렇게 하는 것은, 서구의 노동과 조직에 통일의 중심과 일양적인 선형적이고 시각적인 패턴들을 자국 내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이다. 다른 한편 우리 서구 문화권의 사람들을 쿠텐베르크 시대를 벗어남에 따라 점차 우리 문화가 가진 동질성, 일양성, 연속성 등과 같은 특징을 식별해 낼 수 있게 되었다. 이런 특징들 때문에 그리스와 로마는 비문자적인 야만인들을 누를 수 있었는데, 야만인이나 부족민들은 예나 지금이나 문화적 다원주의, 특이성, 불연속성 등을 자신의 특색으로 삼고 있다.


요약하자면 바빌로니아, 마야, 중국 등과 같은 문화에서 사용된 그림 문자나 상형 문자는 인간의 경험을 축적하고 그 경험에 접근할 수 있게끔 시각을 확장한 것이다. 이 모든 형태의 문자들은 구어상의 의미에 그림으로 된 표현을 제공한다. 그래서 그것들은 만화 영화와 비슷하고 극도로 다루기 힘들다. 왜냐하면 사회 활동의 무한한 자료와 활동을 지시하는 데에는, 너무나 많은 기호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 표음 알파벳은 적은 수의 문자만으로 모든 언어들을 다 포괄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결과 기호와 소리가 의미론적, 극적 의미로부터 분리된다. 이런 일은 그 밖의 다른 문자 체계들에서는 일어날 수 없다.


또 표음 알파벳에 고유한, 시각과 소리와 의미의 분리는 확장되어 사회적, 심리적 결과들을 낳게 되었다. 문자 문화의 인간은 상상 생활, 정서 생활, 감각 생활이 상당히 분리되는 것을 경험한다. 이 점은 루소가 오래전에 천명한 바 있다. 오늘날에는 로렌스를 언급하기만 해도, 인간의 <전체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문자 문화인을 넘어서려는 20세기의 각종 시도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서구의 문자 문화인들이 자신의 알파벳을 사용하는 것과 자신의 내적 감수성이 크게 분리되어 있는 것을 경험한다면, 그들은 자신을 씨족이나 가족으로부터 분리해내는 개인적 자유도 획득될 것이다. 개인의 일생을 형성하는 이런 자유는 군사 생활이 지배하던 고대 세계에서도 드러난다. 나폴레옹 시대의 프랑스에서처럼 공화제 아래의 로마에서는 재능에 따라 인생이 다양하게 펼쳐질 수 있었다. 당시 새로운 문자 문화는 동질적이고 유연한 환경을 창출해 냈고, 그 속에서 군인들이나 야심을 가진 개인들의 이동 가능성은 새로울 뿐 아니라 실제로 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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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의 연인
김현경 지음 / 책읽는오두막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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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교사는 공부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아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단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못 외운다. 일부러 외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외어진다. 학생 이름을 못 외우는 나를 두고 학생들은 질책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졸업생이 수능원서 신청하러 모교에 왔다가 날 찾아와 자기 이름을 모른다고 서운해 한다.) 그때마다 멍청해서 그러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였던 시인 백석은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웠다는데....

 

백선생님은 출석부를 옆에 낀 채, 맨 앞줄의 학생부터 차례차례로 50여 명의 학생을 모조리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부르시는 이름들이 단 하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꼭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 그 모습은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시거나, 부른다 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불과 사흘 만에 우리반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시다니. 우리는 그날부터 백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학생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명렬표를 갖다놓고서 열심히 외우셨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준다.” -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그러나 백석 때문에 잃어버린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도로 백석에게서 되찾았다. 26살 백석은 22살 자야에게 홀딱 반해서 학생들 인솔 중에 자야를 만나러 다니다가 급기야....

 

선생님은 밤에는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셨다가 시합만 끝나면 아니 계셨다는 이야기까지 실토하고 말았다. 단속교사들은 이 사실을 함흥의 영생보고로 통했다. 영생보고는 미션계열로서 근무수칙이나 학칙이 대단히 엄격했던지라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이사장은 시인이자 촉망받는 영문학도로서의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같은 영생 계열의 여자고보로 전근발령이 떨어졌다. 당신은 이 결정을 순순히 접수하고 새로운 근무지로 갔다. 그러나 한번 마음이 떠나버렸고, 또 여학생들을 가르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어서 여름방학이 되면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 김자야 내 사랑 백석

 

백석뿐만이 아니다. 시인 김수영도 내겐 참 고마운 분이다. 서울대 영어교수였던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수업을 일찍 끝내 버린다. 백석이나 김수영이나 모두 사랑을 위해 학생을 포기해 버린 선생님이다. 거기에 비해 수업은 열심히 하되 학생 이름 잘 모르는 건 용서 받지 않을까? **아 용서해줘ㅋㅋ

 

그러던 어느 날 종로4가에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전차를 탔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수영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영은 당시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영은 나를 보더니 수업을 반만 하고 곧 돌아올 테니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 마침내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온 수영이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기보단 개화 직전의 꽃망울 속 같은 두근거림이 가득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수영은 “My soul is dark”하고 신음 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수영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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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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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공부하는 게 좋아서 교사가 되었다. 그런데 교사는 공부만 좋아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아는 것을 좋아하는 것보단 사람을 좋아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는 학생들의 이름을 못 외운다. 일부러 외워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안 외어진다. 학생 이름을 못 외우는 나를 두고 학생들은 질책을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한 졸업생이 수능원서 신청하러 모교에 왔다가 날 찾아와 자기 이름을 모른다고 서운해 한다.) 그때마다 멍청해서 그러지 싸가지가 없어서 그런 건 아니라고 변명한다. 함흥 영생고보 영어교사였던 시인 백석은 그렇게 학생들의 이름을 잘 외웠다는데....

 

백선생님은 출석부를 옆에 낀 채, 맨 앞줄의 학생부터 차례차례로 50여 명의 학생을 모조리 얼굴만 보며 이름을 불러가는 것이 아닌가? 더욱 놀라운 것은 선생님이 부르시는 이름들이 단 하나도 착오가 없이 정확한 호명을 하였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꼭 무엇에 홀린 듯 어리둥절하였다. 선생님의 그 모습은 당시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거의 신기라 할 만한 것이었다. 나이 많은 선생님들은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하시거나, 부른다 해도 틀리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 새로 부임해온 젊은 선생님이 불과 사흘 만에 우리반 학생들의 이름을 모조리 다 외우시다니. 우리는 그날부터 백선생님의 비상한 기억력에 완전히 포로가 되어버렸다. 아마도 선생님은 학생들과 더 친해지기 위해서 명렬표를 갖다놓고서 열심히 외우셨을 것이다. 이것은 교사로서의 그분의 성실한 자세를 말해준다.” - 내 고보 시절의 은사 백석 선생

 

그러나 백석 때문에 잃어버린 교사로서의 자존심을 도로 백석에게서 되찾았다. 26살 백석은 22살 자야에게 홀딱 반해서 학생들 인솔 중에 자야를 만나러 다니다가 급기야....

 

선생님은 밤에는 다른 곳에서 주무시고, 아침에 오셨다가 시합만 끝나면 아니 계셨다는 이야기까지 실토하고 말았다. 단속교사들은 이 사실을 함흥의 영생보고로 통했다. 영생보고는 미션계열로서 근무수칙이나 학칙이 대단히 엄격했던지라 별다른 도리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학교의 이사장은 시인이자 촉망받는 영문학도로서의 당신을 무척이나 아끼고 사랑했다. 그래서 당신은 바로 같은 영생 계열의 여자고보로 전근발령이 떨어졌다. 당신은 이 결정을 순순히 접수하고 새로운 근무지로 갔다. 그러나 한번 마음이 떠나버렸고, 또 여학생들을 가르치기가 여간 거북한 것이 아니어서 여름방학이 되면 사표를 내기로 작정했던 것 같다. - 김자야 내 사랑 백석

 

백석뿐만이 아니다. 시인 김수영도 내겐 참 고마운 분이다. 서울대 영어교수였던 그는 연인을 만나기 위해 수업을 일찍 끝내 버린다. 백석이나 김수영이나 모두 사랑을 위해 학생을 포기해 버린 선생님이다. 거기에 비해 수업은 열심히 하되 학생 이름 잘 모르는 건 용서 받지 않을까? **아 용서해줘ㅋㅋ

 

그러던 어느 날 종로4가에서 학원 수업을 마치고 전차를 탔는데 거기에서 우연히 수영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수영은 당시 서울대학교 간호대학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수영은 나를 보더니 수업을 반만 하고 곧 돌아올 테니 벤치에 앉아서 기다려달라고 했다 ... 마침내 수업을 일찍 끝내고 온 수영이 내 옆에 앉았다. 잠시 우리 사이엔 침묵이 흘렀다. 어색했다기보단 개화 직전의 꽃망울 속 같은 두근거림이 가득한 침묵이었다. 한참을 뜸 들이다가 수영은 “My soul is dark”하고 신음 같은 말을 토해냈다. 그 말을 듣고 내 마음은 무너지고 말았다. 그것은 수영의 프로포즈였던 것이다. - 김현경 김수영의 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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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함흥 영생고보의 한 영어교사를 만나게 되었다. 그날은 내가 함흥 권번에 소속이 되어 함흥에서 가장 큰 요릿집인 함흥관으로 나갔던 바로 첫날이었다. 영생고보의 어느 교사가 이임하는 송별회의 자리인 것 같았다. 그 자리에서 나는 당신과의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나 당신에게 아호를 하나 지어줄 거야. 이제부터 자야(子夜)라고 합시다

 

서울에 갔더니 고향 평안도 정주에서 큰아버님 내외분도 오시고, 집안 식구들이 다들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 자리에서 갑자기 색시 선을 보라고 우격다짐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맞선을 보게 되었다고 했다. 그래서 강제로 장가를 들게 되었는데

 

그 무렵 당신은 세 번째로 장가를 들고 왔었고, 내 마음은 한바탕 풍파를 겪은 듯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삼세 번이나 장가를 들었으니 무슨 아이들의 장난이기라도 한 것인가? 거의 넌센스에 가까웠다. 물론 자의가 아니었음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신은 그만 혼자서 쓸쓸히 만주의 신경으로 아주 떠나버렸다. 그때 보았던 당신의 초췌한 뒷모습이 내가 보았던 당신의 마지막 모습이자 우리 둘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었다.

 

일본의 문인들을 화제로 떠올리긴 했지만, 당신은 일본말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일본유학도 다녀왔으니 일본말도 썩 잘했을 것이나, 당신은 일본말을 써야 할 때 거기에 대신 바꿔넣을 수 있는 우리말을 먼저 생각하는 것 같았다.

보통 담화 때는 주로 표준말을 썼지만 당신의 억양은 짙은 평안도 말씨였다. 무슨 일로 기분이 상했거나 고향 친구들과 담소를 나눌 때 당신은 야릇한 고향 사투리를 일부러 강하게 쓰는 습관이 있었다.

예컨대 천정을 턴덩으로, 정거장을 덩거당으로 정주를 덩두’, 질겁을 디겁’, 아랫목을 구태어 아르궂따위로 쓰는 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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