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 - 역사적 자료에 기초한 초대교회 모습 1세기 기독교 시리즈 1
로버트 뱅크스 지음, 신현기 옮김 / IVP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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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사람은 모두 함께 지내며 그들의 모든 것을 공동 소유로 내어 놓고, 재산과 물건을 팔아서 모든 사람에게 필요한 만큼 나누어 주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어 날마다 열심히 성전에 모였으며 집집마다 돌아가며 같이 빵을 나누고 순수한 마음으로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으며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이것을 보고 모든 사람이 그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다. 주께서는 구원받을 사람을 날마다 늘려 주셔서 신도의 모임이 커갔다. (공동번역 신약성서 사도행전 )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비호감의 대상인 것 같습니다. 저도 제가 기독교인이라는 걸 어디 가서 자랑스럽게 얘기 못하는 것을 보아서도 그렇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요?

 

초대 기독교인들의 삶을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 묘사된 그들은 함께 지내고 평등하게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런 평화로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기독교인들을 좋게 생각하고, 기독교인이 되어간 것이죠.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평등한 삶을 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비기독교인보다 더 불평등한 세속에 절여져 있습니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비호감의 대상으로 지탄과 조롱을 받게 되는 것이죠.

 

이 책 ‘1세기 교회 예배 이야기는 초대 기독교인들의 예배를 소설 형식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저녁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었습니다. 특정인을 초대하지 않고 모두에게 열린 자리였습니다.

 

여자와 남자, 어린이와 늙은이는 물론 종과 주인을 구분하지 않고 모두 평등하게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이 이야기하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은사)은 신이 준 것이니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사용해야 한다는 매우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합니다.

 

<밑줄>

오늘은 일찍이 근처에 있는 한 가정의 저녁 식사에 다녀왔는데, 여러분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정도로 특이한 경험이었다. 동행한 친구들은 아굴라와 브리스가라는 유대인 부부로부터 매번 일곱째 날마다 식사 자리에 상시 초청을 받은 상태였다. 방문객들에게 열려 있는 자리였으므로, 내가 참석하는 데 별도의 초청은 필요하지 않았다.

 

자기 종의 접시 위에 음식을 덜어주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랐다. 음식을 덜어 주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기 것과 정확히 똑같은 종류를 똑같은 양으로 담았다.

 

여기저기서 삼삼오오 모여 대화를 나누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이 보여 준 모임 참여도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이런 열띤 토론은 나로서는 처음 겪는 일이었다.

 

이 모임의 참석자들은 예의 바르게도 남은 음식과 포도주를 함부로 바닥에 버리지도 않았다. 다소 산만하긴 했으나, 단정하면서도 도를 넘지 않았다. 흔히 보이는 무례도 범하지 않았다.

 

그때까지 일어난 일들 가운데 종교적인 내용이라곤 거의 없었다. 사람들이 기대하는 예전의 틀은 고사하고, 어째서 사제조차 없단 말인가.

 

선창하자 곧 모두가 따라 불렀고, 아이들은 손뼉 치며 노래했다.

 

자기 신이 마치 같은 방 안에 있는 가까운 친구인 것처럼 아주 일상적인 말투를 썼다.

 

다른 사람이 말할 때도 똑같은 식이 되풀이되었다. 남자와 여자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마찬가지였다.

 

이 모두(은사)는 다른 사람들과 공유해야지 이기적으로 숨겨두거나 자기 혼자만 누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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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신부가 말하는 토지와 경제정의
대천덕 지음, 전강수 외 옮김 / 홍성사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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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조지의 진보와 빈곤이 톨스토이의 부활, 대천덕의 토지와 경제 정의를 낳았다

 

조지, 톨스토이, 대천덕 모두 기독교인이다.

 

기독교인이라면 성경(레위기 25:23)에 적혀 있든 땅은 신의 것이니 인간이 사고 팔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이를 현대 사회에 적용하자면, 땅에 대한 세금만 물도록 하는 것, 즉 토지단일세의 실시이다.

 

<밑줄>

가난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고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는 사실을 헨리 조지는 일깨워 준다. 또 사도 요한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거짓말쟁이라고 말한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자기 형제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형제의 물질적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는 사람 또한 거짓말쟁이요 살인자이다 (요일 3:11~18, 4:20)

 

콘스탄틴 시대의 로마 제국의 지주들이 진정한 회개 없이 회심한 이래로 기독교회의 지도자들은 줄곧 예레미아 시대의 선지자 노릇과 제사장 노릇을 해 왔다. , 구약의 토지법을 일상생활에 실제로 적용하거나 실현하는 일은 애써 무시하면서 그 법의 영적 해석에 대해서는 자기 편한 대로 말을 바꾸는 짓을 일삼아 왔던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통상 교회가 토지법을 제정하거나 시행할 권한이 없다는 논리로 정당화되어 왔다.

하지만 AD 313년 관용령에 의해 교회는 집권 세력과 타협하였다. 더욱이 오늘날 민주주의 사회에서 유권자의 다수가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더 이상 올바른 토지법을 통해 정의를 실행할 권한과 책임을 외면할 수 없다. 그런데도 교회는 콘스탄틴 시대에 분분했던 토지법 문제를 애써 무시하였다. 결국 교회는 지주들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슬람은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 그리스도인 지주들이 토착민들을 착취한 데 대해 토착민들이 저항하는 가운데 발흥하였다. 오늘날 교회는 이 토지법 문제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다.

 

BC 200, 즉 콘스탄틴 시대가 시작되기 500년 전, 로마가 카르타고를 정복했을 때 바알의 토지법이 많은 로마인들의 탐욕을 부추겼다. 바알의 토지법은 아합 시대에 이세벨의 친척들이 카르타고를 세운 이래 줄곧 카르타고의 지배원리였다.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싸웠던 로마의 참전 병사들은 카르타고 제국의 영토였던 북아프리카의 토지를 하사받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로마의 구제도는 바알 제도로 대체되고, 이탈리아의 불굴의 자영농들은 새로운 지주 계급의 땅에서 농노로 전락하였다. “벽돌로 지어졌던 로마를 대리석으로 바꾸어 놓은”, 바로 그 바알 제도로 인해 로마 제국은 쇠퇴를 거듭해 끝내는 멸망하고 말았다. 하지만 교회는 그 제도를 개혁할 마음이 없었고 오히려 지주들의 지배 아래 놓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그러자 북아프리카의 모든 사람들이 들고일어나서 기독교에 대항했으며, ‘땅은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호 아래 이슬람교도가 되었다. 이와 똑같은 상황이 중동에서도 재현되었다. 유럽에서는 야만인들의 침략으로 로마 문명의 유산이 파괴된 후, 교회는 좀더 평등한 토지 제도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하지만 교회가 진정한 경제정의의 비전을 회복하기에는 그 전에 바알 제도와 타협했던 기간이 너무 길었다.

16세기에 재세례파가 성경적 토지개혁을 요구했을 때,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그들을 무자비하게 박해했다. 유럽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교회는 이미 최대의 지주였던 것이다. 신교와 구교 사이의 전쟁에서 진정한 문제는 종교가 아니라 토지였다.

아일랜드의 역사만큼 이를 분명하게 보여 주는 사례도 없다. 대대로 잉글랜드 국왕은 영혼 구원이라는 허울 좋은 명분 아래 아일랜드인들의 토지를 강탈하여, 자신들의 심복인 국교도와 장로교도들에게 하사하였다. ‘아일랜드 문제란 다름 아닌 바알 문제이다. 바로 그 기독교적인유럽인들은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를 땅에 굶주린 식민주의자들에게 분배하면서, 비교적 공정했던 아프리카의 토지 제도를 붕괴시키고 바알 제도를 수립하였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이로서 아프리카인들은 가난과 착취에 시달리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토착민과 식민주의자들 간에는 깊은 증오심이 생겨났으며, 식민주의자들은 부패에 빠져 들었다. 식민 열강은 차나 커피 농장 아니면 다이아몬드와 기타 광산물의 생산을 위해 가장 생산성이 높은 토지를 샀으며’, 토착민들에게는 농장과 탄광에서 일하게 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임금만 지불한 채 거기서 나온 모든 이윤을 유럽으로 송금하였다. 제국주의 열강들의 식민지로 있던 국가들이 정치적 독립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경제적 착취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오늘날 아프리카는 전쟁과 살인, 분노, 두려움, 토양 부식, 기아 등으로 고통당하고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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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천덕 자서전 믿음의 글들 167
양혜원 / 홍성사 / 199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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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원 대천덕 신부님의 자서전에서 있는 일화를 소개합니다.

 

6.25 전쟁 이후 국가 재건 사업이 일기 시작했던 초기에는 거지 소년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 중 한 아이를 데려다가 신학교에서 양육하며 가족처럼 돌보아 주고자 했다. 나는 이 소년이 갑자기 떠나기 전까지는 신학생들이 이 아이에게 얼마나 거칠게 굴었는지 모르고 있었다. 내게 어학(한국어)를 가르쳐 주던 나이 든 학생에게 왜 그 아이가 떠났느냐고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구속을 견딜 수 없었나 보죠

그 말을 들은 나는 당황하여 반문했다.

구속이라니요?”

그는 양손이 수갑에 묶여 풀지 못하는 시늉을 했다.

그게 구속의 뜻이라구요? 그렇다면 왜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겠습니까?”

우리를 겸손하게 하시려고 그랬겠죠, .”

이 대답에 놀라 나는 한영 사전을 찾아보았다. 거기에는 동음이의어로 구속이라는 단어가 또 하나 실려 있었다. 즉 하나는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이고, 또 하나는 억압하다라는 뜻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서 나는 자유롭게 하다라는 뜻을 아는 학생은 하나도 없다는 것과, 그 말은 한자를 아는 신학자들만이 사용하는 용어로서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잡아 묶는 구속(拘束)과 풀어 주는 구속(救贖), 공교롭게도 음은 같지만 뜻이 완전히 달라서 혼란을 주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설령 신학생들이 말로서 주님의 구속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삶에서는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거지 소년을 괴롭혀 내쫓은삶은 풀어주는 구속(救贖)이 아니라 잡아 묶는 구속(拘俗)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拘束)하지 않고, 구속(救贖)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에게 그러하여야 합니다.

 

https://youtu.be/55s3T7VRQS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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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하나님
대천덕 지음 / 홍성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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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보단 기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가르침보단 사귐을 강조하며, 신자들은 모두 형제이고 성직자이고 일꾼이라는 평등을 말씀하십니다.

 

<밑줄>

한국의 신자들은 대개 설교를 듣지 않으면 예배를 드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설교는 예배순서 가운데 교육부분일 뿐입니다. 예배와 교육은 엄연히 다른 것이므로, 설교 없이도 예배를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 신자들은 자기 자신을 어린아이라고 생각하여 선생이 가르치지 않으면 교회에 가서 시간만 낭비했다고 생각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설교를 들으면 그날 예배가 엉망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교회로 번역된 헬라어 에클레시아부름을 받았다는 뜻입니다. 예수께서 에클레시아라는 말을 사용하셨을 때 제자들은 부르심을 받고 (세상으로부터) 나와 이루어진 모임이란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가르칠 교’() 자를 써서 교회’(敎會)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스승이 경전을 읽히고 가르쳐서 노인을 공경할 수 있는 자식으로 키우는 모임이라는 뜻이 됩니다. , 선생님 앞에 무릎을 끓고 앉아 있는 모임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교회는 그런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 안에 유교적인 사고방식이 지나치게 많이 들어온 까닭입니다. 성경적으로 번역한다면 사귈 교’() 자를 써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를 주 안에서 서로 사귀는 곳이라고 하면서 사귐을 매우 강조합니다. ‘가르친다는 말은 별로 나오지 않고 사귐’ ‘교제’ ‘나눔의 의미가 더 강하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사귐, 교제, 나눔은 곧 코이노니아를 의미합니다.

 

현대 교회에서는 목자가 교사까지 되어 다스리는 사람도 되고 가르치는 사람도 되고 영적인 지도자도 되고, 제사장 노릇은 물론 예언자 노릇까지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이 여러가지를 한 사람이 한다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주로 각각 받은 책임대로 분수를 지켜 행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현대 교회는 크게 둘로 구분지어 이쪽은 성직자 저쪽은 평신도로 나누고, 성직자가 모든 일을 도맡아 하고 평신도는 돈만 내면 되는 식입니다. 이런 사상이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분명 성경에서 나온 사상은 아닙니다. 성경에는 평신도라는 말이 한번도 안 나옵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두는 다 성직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일꾼입니다.

 

예수원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들은 누가 대(천덕) 신부님의 후임자가 될 것인가를 궁금해합니다. 그러나 예수원의 지도자는 제가 아닙니다. 저는 처음부터 그러한 생각을 해 보지도 않았습니다. 예수원의 지도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원은 성령께서 친히 의회라는 기관을 통해서 지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원의 모든 식구들도 그렇지만 저도 의회의 결정 사항에는 무조건 따릅니다. 그러므로 의회에 복종하는 사람이면 그 누구든지 저의 후임자입니다. 사람, 사람, 사람, 자꾸 사람만 보려는 것이 정말 큰 문제입니다.

 

성경 시대에는 교사가 가르치면 고맙게 생각하여 가르침을 잘 받고, 교사들이 가르치느라 바빠서 다른 일을 하지 못하면 돈을 주기도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를 보면 스스로 자기의 생활을 위해 노동하면서 가르쳤습니다. 그는 장막 만드는 일을 했기 때문에 작업을 하면서도 찾아온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바울은 일을 하면서도 가르칠 수 있었고 수입이 있었으므로 돈을 받을 필요가 없었지만, 그의 동역자들은 돌아다니면서 가르치기만 했기 때문에 바울의 도움으로 살거나 교인들이 돈을 조금씩 주어서 생활했습니다.

 

성경은 나이의 차별이나 책임져야 할 주인을 따로 거론하지 않았으며, 교인들끼리 서로 이름을 부르며 특별한 호칭도 없이 사귐을 가졌습니다. 한 예로 데오빌로를 부를 때 누가복음 13절에서는 데오빌로 각하라고 했지만, 그가 누가복음을 읽고 깨달음이 있어서 신자가 되기로 결정한 후에는 데오빌로여’(1:1)라며 각하라는 호칭을 쓰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신자가 된 다음에는 모두가 형제이기 때문입니다.

 

성직자들은 옛날부터 교만한 제도를 만들어 왔습니다. 평신도들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습니다. 이에 평신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다 저렇다 하면 권세 가진 자들이 위에서 누르기 때문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평신도로서 감히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참고 영상>

https://youtu.be/CWi3Bg4tejY?t=835

예수원에 대한 영상입니다. 이 영상을 보면, 베데딕트 수도회의 기도하고 일하라 ora et labora’라는 표어가 생각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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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페어 컬처 - 쓰고 버리는 시대, 잃어버린 것들을 회복하는 삶
볼프강 M. 헤클 지음, 조연주 옮김 / 양철북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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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페어 컬처를 읽고 옮기면서, 내가 자란 오래된 집과 집을 돌보던 아빠, 엄마, 어린 우리가 있던 한 시절이 자주 떠올랐다.”

 

옮긴이가 한 말이다. 그런데 마치 내 딸이 장차 쓸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심각한 집돌이다. 평일엔 칼퇴해서, 휴일엔 온종일 집에 틀어박혀 있다. 그리곤 집수리나 차수리를 한다. 최근 1주일에 내가 한 수리를 정리해 본다. (이건 저자가 쓴 정비일지를 흉내낸 것이다)

 

자동차 전조등 교환, 세탁기 배수 필터 청소, 현관문 닫히는 속도와 힘 조절, 공기 주입기 압력계 영점 조절(이건 실패), 공기 주입기 깨진 실린더 붙이기(이것도 실패), 방전된 자동차 배터리 복원(역시 실패), 자동차 타이어 압력 점검기 부착, 현관 데크 확장, 우체통 만들기, 다락방 붙박이장 해체, 화장실 콘센트 덮개 부착, 전선 정리함 개조 등등

 

일일일()! 하루에 하나 이상은 수선을 한 것 같다. 10년 전까지 아파트에 살 때는 가능하지 않은 일이다. 고칠 것도 없고 고칠 맘이나 힘도 없었다. 그런데 10년 전 마당이 있는 단독주택을 지어 살면서부터는 상황이 완전히 바뀌었다. 아파트의 편리함을 버린 대신 단독주택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얻었다. 한마디로 내 손의 존재 이유를 알게 된 것이다.

 

글쓴이는 독일어에서 이해하다(versthen)는 파악하다(begreifen)와 비슷하다고 했다. 우리말도 마찬가지다. 머리로 아는 것(理解, 이해)는 곧 손으로 잡는 것(把握, 파악)이다.

 

현대 교육이 자꾸 머리로만 이해시키려 하는데, 손으로 파악하지 않으면 제대로 아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오전에는 지식 교육을 하고, 오후에는 실습 교육을 해야 한다. 교육뿐만이 아니라 우리 자본주의 사회에서 고장난 것을 고쳐 쓰지 않고, 고장나지 않은 것도 자꾸 새 것으로 바꾸려는 병폐는 손을 사용하지 않아서 생기는 문제이다.

 

<리페어 컬처> 진짜 좋은 책이다. 양철북에서 나올 만한 책이 또 나온 것 같다. 꼭 읽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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