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위한 수업 - 행복한 나라 덴마크의 교사들은 어떻게 가르치는가 행복사회 시리즈
마르쿠스 베른센 지음, 오연호 편역 / 오마이북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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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다. 오연호의 우리도 ~ 수 있을까?’을 감명 깊게 읽고 난 후라, 안 읽을 수 없었던 책이다. 다만 오연호가 직접 쓴 게 아니라 덴마크 기자가 쓴 글이지만.

 

줄 세우는 시험이 거의 없고, 국가가 통제하는 획일적인 수업이 아니라 교사가 주체적으로 만드는 수업, 학생이 하고 싶은 것을 서로 도와 가면서 하는 수업. 이런 이상적인 덴마크 교육이 펼쳐진다.

 

그런데 이런 교육이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덴마크의 부모들은 자식의 연봉이나 직장의 안전성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덴마크는 직장에서 해고되기 쉽지만 재취업도 쉽게 된다는 이른바 플렉시큐리티(flexicurity)’가 특징이다. 아울러 얀테의 법칙즉 평범한 삶을 중요시하는 북유럽정신이 있는 곳이다.

 

높은 세금을 바탕으로 사회안전망이 탄탄한 복지국가이기 때문에 이런 교육이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처럼 그 밥의 그 나물인 양당제 속에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빈익빈부익부의 사회 갈등도 해결 못하고 있다.

 

교육 문제는 삶의 문제를 해결해야 풀린다. 그 삶의 문제는 높은 세율, 기본 소득, 최저/최고임금제로 풀어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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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 제3판 개역본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강정인.김경희 옮김 / 까치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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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으면 화가 난다. 그러나 그의 로마사 논고를 읽으면 화가 풀릴 것 같다. 마치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도덕감정론의 관계처럼.


"마키아벨리는 한편으로 군주론에서 총체적인 부패상황을 개혁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세울 때와 마찬가지로 1인의 인물에 의한 통치(군주정)가 필수 불가결함을 역설하고, 다른 편으로 로마사 논고에서는 일단 정치 공동체가 건강을 회복하면 다수 인민에 의한 지배가 인민의 자유를 신장시키고 위대한 국가를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군주정에서 공화정으로 대체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한 것이다. 따라서 군주론로마사 논고에 나타난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종합해보면, 그는 군주론을 통해서는 사분오열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열망을, 그리고 로마사 논고를 통해서는 이탈리아가 고대 로마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역자 해제 )

 

군주의 환심을 사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자신들의 소유물 중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나 군주가 받고 기뻐할 것을 가지고 군주를 찾아뵙는 것이 관례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군주들은 종종 말, 무기, 금박의 천, 보석, 기타 군주의 드높은 위엄에 적합한 장신구 따위를 선물로 받곤 합니다. 저 역시 전하에 대한 충성심의 표시로 무엇인가 바치고자 했으나, 제가 가진 것 중 근래에 일어난 사건들에 대한 지속적인 경험과 고대사에 대한 꾸준한 독서를 통해서 습득한 위대한 인간들의 행적에 관한 지식만큼 귀중하고 가치 있는 것은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저는 이러한 사안들을 정성들여 검토하고 성찰했으며, 그 결과를 한 권의 책자로 정리하여, 이제 전하께 바치고자 합니다.”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을 쓴 까닭은 당대의 군주에게 환심을 사고자 했기 때문이다.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고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도 못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히려면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아예 크게 입혀야 한다.”

 

조폭 두목이 좋아할 말이다.

 

군주의 지배에 익숙해진 도시나 나라는 그 군주의 혈통이 끊기면, 여전의 지배자는 없어졌지만 주민들에게 복종의 습성은 여전히 남아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 중에서 누구를 군주로 추대할 것인가에 관해서도 쉽게 합의를 못 하는 법이다. 게다가 그들은 어떻게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 결과 그들은 무기를 들고 지배자에게 쉽게 대항하지 못한다. 따라서 지배자는 쉽게 그들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고 그들이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안심할 수 있다.”

 

박정희랑 전두환이 설마 이 구절에서 힘을 얻어 쿠데타를?

 

가해행위는 모두 한꺼번에 저질러야 하며, 그래야 맛을 덜 느끼기 때문에 반감과 분노를 적게 야기한다. 반면에 시혜는 조금씩 베풀어야 하며 그래야 맛을 더 많이 느끼게 된다.”

 

교사들도 많이 써먹는 방법이다.

 

전쟁은 군주의 직업이다. 군주는 전쟁, 전술 및 훈련을 제외하고는 그밖의 다른 어떤 일이든 목표로 삼거나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며, 또 몰두해서도 안 된다.”

 

과거 군주국의 왕만 그런게 아니라 오늘날 공화국의 대통령도 전쟁으로 먹고 산다.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바를 행하지 않고 마땅히 해야 하는 바를 고집하는 군주는 권력을 유지하기 보다는 잃기 십상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선하게 행동할 것을 고집하는 사람이 많은 무자비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면 그의 몰락은 불가피하다. 따라서 권력을 유지하고자 하는 군주는 필요하다면 부도덕하게 행동할 태세가 되어 있어야 한다

 

도덕적인 군주가 되어 권력을 잃기보다는 부도덕한 군주가 되어 권력을 유지하라는 게 군주론의 핵심

 

오직 다른 나라 인민의 재산으로 넉넉하게 써라. 군대를 통솔하면서 전리품, 약탈품, 배상금 등을 통해서 군대를 지탱하는 군주는 타인의 재물을 처분하는 것이다. 이 경우 그는 씀씀이가 넉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병사들이 그를 따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키루스, 카이사르, 그리고 알렉산드로스가 그랬던 것처럼 당신이나 신민들의 것이 아닌 재물로는 아주 후한 선심을 써도 무방하다. 왜냐하면 타인에게 속하는 것을 후하게 주는 것은 결코 당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드높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해가 되는 경우란 단지 당신의 것을 함부로 주는 경우이다

 

군주 자신의 것을 백성에게 주지 말고 다른 나라 것을 빼앗아 주라. 이런 게 오늘날도 해당한다. 회사에게 직원을 다스리는 방법은 비정규직으로 갈 것을 빼앗아 정규직에게 주는 것이다.

 

현명한 잔인함은 진정한 자비이다. 현명한 군주는 자신의 신민들을 결속시키고 충성스럽게 유지할 수 있다면, 잔인하다는 평판을 받는 것을 걱정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무질서를 너무 관대하게 방치해서 그 결과 많은 사람이 죽거나 약탈당하게 하는 자보다 소수의 몇몇을 시범적으로 처벌함으로써 기강을 바로잡는 군주가 실제로는 훨씬 더 자비로운 셈이 될 것이다.”

 

홉스의 리바이던에 영향을 준 듯. 학생들이 원하는 담임교사상 중에 이런 게 있다. 어설픈 자비심으로 학급을 무질서하게 만들지 말라는. 주로 모범생, 우등생들이 주로 그런 민원을 낸다. 수업 중에 친구들이 떠드는 것을 못참아 교사 대신 화를 내주는(?) 경우도 있다. 마피아 아니 마키아의 영향?

 

사랑을 받는 것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 인간은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자보다 사랑을 받는 자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덜 주저한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일종의 의무감에 의해서 유지되는 데 인간은 지나치게 이해타산적이서 자신들의 이익을 취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나 자신을 사랑한 자를 팽개쳐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써 유지되며 항상 효과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명한 군주는 자신을 두려운 존재로 만들되, 비록 사랑을 받지는 못하더라도, 미움을 받는 일은 피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이는 그가 인민들의 재산과 부녀자에게 손을 대는 일을 삼가면 항상 성취할 수 있다.”

 

과거 아버지들은 자녀를 지도할 때 이런 방식을 선호해 왔다. 그런데 이 방법의 단점은 고독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말년에 개를 키운다. 개가 임종을 지키면 최소한 고독사는 아니니까?

 

군주는, 호의는 자신이 베풀고 처벌은 신하가 내리도록 한다. 군주는 미움을 받는 일은 타인에게 떠넘기고 인기를 얻는 일은 자신이 친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주(사장)는 마름(부장)에게 소작인(직원)을 괴롭히는 일을 시키고, 자신은 소작인에게 땅을 빌려주는(월급을 주는) 호의를 베푸는 사람으로 존경을 받는다.

 

당신이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그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정한 집단(그것이 인민이건, 군인이건, 귀족이건)이 부패되어 있으면, 당신은 그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그들의 성향에 비위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선행은 당신에게 유해하다. 훌륭한 황제 알렉산드르는 살해당했다.”

 

水至淸則無魚라 했다. 물이 적당히 더러워야 물고기가 있다. 다만 1급수에 사는 물고기만 죽을 뿐이다.

 

그 어떤 것도 대규모의 전쟁을 수행하고 비범한 업적을 성취하는 것만큼 군주에게 높은 명성을 가져다주지 않는다우리 시대에는 스페인의 왕인 아라곤 가의 페르난도가 그 탁월한 예를 보여준다이 인물은 그의 통치 초기에 그라나다(스페인 남부 이슬람 왕국)를 공격했고이 전쟁을 통해서 국가의 탄탄한 토대를 쌓았다우선 무엇보다도 그는 이 전쟁을사태가 평온하고 반대를 무릅쓰지 않아도 될 때시작했다그는 카스티유의 제후들로 하여금 전쟁에 전념하게 했고그 결과 그들은 어떠한 반란도 모의할 수 없었다더 커다란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 그는 계속하여 종교를 명분으로 하여 잔인하지만 일견 경건한 정책을 통해서 (이슬람 교도들인무어인들을 색출하여 죽이고왕국으로부터 몰아내는 등 유례 없이 참혹한 짓을 저질렀다똑같은 명분을 내세워 그는 아프리카를 공격했고, 이탈리아를 침입했으며, 최근에는 프랑스를 공격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쉴 새 없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에게 반란을 시도할 만한 시간적 여유조차 가질 수 없었다

 

오늘날 미국이 일으키는 전쟁들과 비슷하다. 아울러 회사에서 직원들을 통제하기 위해 정신없이 일을 시키는 것과 크게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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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교회
유성준 지음 / 평단(평단문화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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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서점에서 교회 공동체를 주제어로 검색을 하면 세이비어 교회란 책이 많이 팔린 것으로 뽑힙니다. 읽어 보니,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작은 교회

영국 인류학자 로빈 던바는 모임에서 서로 의미 있는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최대의 숫자가 150명이라고 했습니다. 사실 예수님도 제자를 12명밖에 두지 않았는데 인간이 150명 이상을 공동체로 삼는 건 과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세이비어 교회도 교인이 150명밖에 없습니다.

단지 적은 수만 모이는 것뿐이 아닙니다. 소규모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예배는 목회자 뿐만이 아니라 평신도 역시 인도할 수 있습니다.

 

2. 지역과 함께 하는 교회

아무리 좋은 공동체라고 해도 자기들끼리만 좋으면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지 않겠죠. 세이비어 교회는 지역 사회 사람들과 활발히 교류를 합니다. 세이비어란 구세주[saviour]인데 마치 '비워'라고 말하는 것[say 비워]처럼 들립니다. 카페에서 커피잔을 들고, 술잔을 들고 말이죠.

 

3. 침묵하는 기도

한국의 개신교회는 통성, 방언 기도를 선호합니다. 그런데 저는 과거 천주교인이어서 통성, 방언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퀘이커들처럼 세이비어 교회에서는 침묵기도를 중요시합니다. 꼭 뭐가 옳다고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만 각 기도의 장단점이 있습니다.

 

<밑줄>

세이비어 교회가 단순히 교회성장에만 사역의 목적을 두었다면 오늘날 150여명 정도의 극히 적은 교인 수로 거대한 미국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교회로 평가받지는 못했을 것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모든 사역에 있어 관상의 삶을 강조한다. 관상기도란 흔히 우리가 기도할 때 쓰는 기도문, 언어, 상상을 배제하고 우리의 감정, 의지, 감각 기관의 사용도 제한하며 오로지 하나님과 친밀히 사귀는 기도이다. 세이비어 교회에서는 이러한 관상기도를 통해 나를 철저히 비우고 하나님이 그 안에 들어설 수 있도록 기다리는 침묵의 기도를 훈련을 통해서 실시하고 있다.

 

세이비어 교회의 지역 사회를 위한 첫 번째 사역이 토기장이의 집 사역이다. 세이비어 교회는 교회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사역에 의존하지 않는다 내가 속한 지역사회로 나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겠다는 것이 이들의 목적이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조그만 카페 겸 서점인 토기장이의 집이다.

이곳은 세이비어 교회가 지역사회 사역을 위해서 세운 곳이니만큼 낮에는 카페로, 저녁에는 모임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교회 사역과 연관된 공연들, 소그룹 모임들과 예배가 이곳에서 이루어진다. 세상의 한복판에 세워져 있으니 대중에게 다가가고 그들과 함께 나누는 이곳이야 말로 진정 그리스도가 거하시는 거룩한 장소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비록 두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그룹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아래 교회를 세울 수 있다. 세이비어 교회의 소그룹 사역공동체는 그런 의미에서 각자 독립성을 가진 교회 내의 작은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시작된 모임은 기존 교회의 주일 예배에 참석할 수도 있으며 혹은 소그룹이 스스로 예배를 준비하여 드릴 수도 있다. 이는 모든 믿는 이들에게 제사장의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가능하다. 인내와 믿음을 가지고 찾는다면 성직자 중에서 혹은 평신도 중에서 예배를 인도할 수 있는 리더십을 가진 사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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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의 향기 - 종교 너머에 있는 우리가 사모하는 교회
김난예.정원범 지음 / 대장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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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 영성의 향기는 작년에 우리 공동체에 강의를 하러 오신 정원범 교수님이 김난예 교수님과 함께 쓴 책입니다. 브루더호프, 아미쉬, 퀘이커 공동체에 대한 부분을 읽으면서 우리 공동체가 나아갈 방향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공동체는 함께 하는 것입니다. 물리적으로 함께 사는 것뿐만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공감하며 사는 것입니다. 금전적으로 일체의 사유재산을 없애는 것뿐만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내 것을 우리 것으로 나누는 것입니다.

 

공동체는 평등합니다. 상하의 위계가 있는 게 아니라 좌우의 관계가 있을 뿐입니다. 목사나 대표자는 공동체 식구 중에서 추첨이나 투표로 뽑히고, 가장 낮은 곳에서 공동체 식구들을 섬겨야 합니다.

 

예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삶입니다. 주일에 한번 예배 드리면 주중에 지은 죄가 모두 용서받을 것으로 착각하면 안됩니다. 모든 삶이 예배가 되어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답도록 살아야 합니다. 굳이 만나서 예배를 드리는 이유는 서로 격려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작은 규모로 모여서, 특정한 몇몇의 일방적 설교가 아니라 모두가 빠짐없이 자신의 일상을 고백해야 합니다.

 

노동을 교육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공동체 모든 식구들은 매일 노동의 신성함을 몸소 느껴야 합니다. 또한 학교 교육도 그러한 노동을 교육하는 것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스스로 먹고 살 수 있고 그러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노동을 몸소 실천하고 가르치고 배워야 합니다.

 

강요하지 말고 덮어주지 말아야 합니다. 남에게 성경을 읽으라고, 성경 대로 살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살면 자식도 그렇게 되고, 세상 사람도 그렇게 됩니다. 잘못에 대해 덮어주거나 뒤에서 욕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되도록 그 사람이 있는 곳에서 공개적으로 얘기하고, 그 사람 없는 곳에선 얘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공적인 비판과 사적인 비난은 구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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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크 엘륄은 다음과 같이 종교로 변질된 기독교를 비판한다.

첫째, 엘륄은 기독교가 권력과 결탁되면서 종교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는 권력계층들과 결탁하면서 복음의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리고 대중화의 길을 걸어갔다. 본래 복음은 기독교의 탁월한 혁신, 은총, 사랑, 박애, 생명체에 대한 염려, 비폭력, 사소한 것에 대한 배려, 새로운 시작에의 소망과 같은 여성적인 가치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기독교가 정복과 권력과 지배의 가치를 채용하면서부터, 즉 권력과 결탁하면서부터 그러한 소중한 가치들을 잃어버렸다.

둘째, 엘륄은 교회가 제도가 되고, 교회의 조직이 계급제도로 이루어지게 되면서 기독교가 종교가 되었다고 비판한다. 제국의 종교가 되기 이전 고대교회는 교인들 간에 평등한 사랑의 사귐이 있었고, 교회 안에서와 밖에서 자신의 것을 서로 나누어 살았던 사랑의 공동체였다. 그러나 교회에 교인들이 늘어나고 부자들, 권력자들이 많아지고 돈이 풍부해지면서 필요에 의해 제도가 만들어졌고, 그 제도는 제국 제도들의 영향을 받으면서 직분의 계급화, 권력화가 이루어졌다. 이것은 계급적으로 우월한 자가 계급적으로 열등한 자를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것이라고 엘륄은 주장한다.

셋째, 엘륄은 기독교가 성공주의와 결탁되면서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비판한다. 기독교는 로마의 국교가 되면서 확장에 성공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되었고 황제의 가족과 정부의 지배계급까지고 기독교인이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는 성공했으나 그와 동시에 복음적인 삶이 왜곡되는 비극이 생겨났다. 이에 대해 엘륄은 이렇게 비판한다. “복음을 확장하려 애쓴 덕분에 기독교는 결국 성공했고 일단 한번 성공하자 그것은 언제나 그렇듯이 계속적인 성공의 갈망을 가져왔고, 기독교인도 이 갈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사회가 기독교에 의해 뒤집히기는커녕 오히려 기독교가 뒤집혔다

 

참여적 영성의 뿌리는 예언자들의 사역에서 찾을 수 있다. 예언자들의 사명은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었다.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예레미야 같은 예언자들의 메시지를 보면, 그들의 관심은 사회변혁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들의 메시지는 지도자들의 부정과 부패를 폭로하고 심판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권력자들이 정의롭게 다스리지 못하고 불의를 행하고 가난한 자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선포했다. 이것은 기독교 영성이 처음부터 사회 도피적이지 않고 사회 참여적이며 동시에 불의에 저항하고 사회를 변혁하려는 참여적이며 저항적 영성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감동적인 설교를 하기 위해서는 어떤 성경 말씀, 특히 개념적 선언을 뽑아 그것을 설명하거나 설교하려고 하지 말고 먼저 성경의 한 신앙 사건에 부딪혀 거기서 스스로 감동을 받고 그 감동을 다른 사람에게 증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더호프 공동체의 삶은 공동 소유와 공동 노동의 삶이다. 그들은 개인 물건을 소유하지 않으며, 그들의 공동재산도 공동체 전체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해 쓰인다. 일단 멤버가 되기로 결정하면 모든 소득과 재산을 공동체에 자유롭게 헌납한다. 그 대신 공동체는 음식과 숙소와 의료 서비스 등 모든 생활 전반을 책임진다.

기본적으로 그들은 신앙과 일상생활을 분리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과 기도를 서로 분리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로만 기도하고 실천하지 않는 것은 위선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의 노동은 예배의 한 형태이다.

 

(에버하르트 아놀드의 손자인 크리스토프 아놀드는) 말보다는 행동이 앞서고, 삶을 사랑했던 그는 지적인 대화보다는 소시지와 맥주를 나누며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주일예배는 주기도문 암송과 찬송가, 설교 등으로 이어지는 예배 틀이 없다. 노래는 많이 부르지만 일방적 전달식 설교가 없고 모든 공동체 구성원이 자신들의 신상이나 생각을 나눈다. 예배나 기도를 위한 별도의 시간 속에서만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 속에서 사랑을 나눔으로써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고 있다는 그리스도의 말을 증거하는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들을 하나님께 이끄는 방법 중 한 가지는 종교적 가르침을 억지로 주입하지 않고 부모의 신앙을 자녀가 몸으로 느끼게 하는 것이다. 부모의 신앙이 정말 살아있는 것이라면 자녀에게 신앙을 전하는데 굳이 경건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일상에서 보여지는 모습과 자신들을 대하는 태도에서 부모의 신앙을 몸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학교과정을 모두 마친 아이들은 1년 동안 공동체에 남아 자신들의 진로를 고민하며 공동체의 다양한 일터에서 일을 배운다. 재봉, 요리, 전기기술, 농업, 공업, 건축 등 작은 심부름부터 시작하여 작은 책임을 지게 된다. 그 이후로는 대학 과정이나 기술학교에 들어가게 될지 공동체와 부모와 상의하여 결정하게 된다.

 

공동체 학교에서는 직접말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므로 험담이 없다. 잘못 했을 때도 공동체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다. 상대가 문제가 있다고 여기더라도 뒷담화하지 않고, 상대방 앞에서 직접 솔직하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다. 공동체라고 하여 무조건 용서하고 덮어주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공개적으로 치리를 받고 침묵하는 시간을 갖기도 한다.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전도를 전혀 하지 않는데도 산아제한을 하지 않기 때문에 아미쉬 인구는 1890년 이래로 꾸준히 성장세를 보이며 10년마다 30~48%씩 늘어나고 있다.

 

아미쉬 공동체는 살아가는 일상자체가 예배이고 집과 밭이 교회이며 쟁기질하고 소치는 일이 기도이고 기독교인이 바로 세상 사람들이 읽는 유일한 성경이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주일 예배는 과거에 격주로 한 번씩 교구 내 교인들의 집을 돌아가며 드리고 각 가정은 보통 1년에 1번 정도 자기 집에서 전체 예배모임을 가졌으나 지금은 조금 자유로워지고 있다. 그들이 교회 건물을 짓지 않고 교인들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은 신께서는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한다는 사도 행전 1724절을 따르는 것

 

예배는 성별과 나이에 따라 앉으며 한 명의 설교자가 2~30분간 설교를 하고 성경이 낭독되면 또 다른 목사의 설교가 약 한 시간 정도 이어진다. 목사는 사전에 준비한 원고 없이 설교를 하지만 설교 중에 눈이 촉촉하게 젖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설교가 끝난 뒤에는 설교에 대한 보완 설명과 의견 교환 등의 시간을 가지며, 다시 이어지는 기도와 성경 낭독, 찬송 순으로 2시간 정도 소요된다.

 

목사는 교구별로 교회 모임에서 추천받은 자 중에서 제비뽑기로 선출한다. 아미쉬 공동체에서 목사가 되는 것을 영예로운 일로 여기지 않으며, 목회에 대한 급여 등 어떠한 대가도 받지 않는다. 오히려 무겁고 힘든 책임이 뒤따르는 사역이므로 성인침례를 받을 때 언젠가 자신이 제비뽑기에 의해 목사로 뽑힐 경우 기꺼이 목사의 직분을 수행하겠다는 맹세를 해야 한다.

 

아미쉬 가정에서는 종교교육과 신학적 성찰은 거의 하지 않고, 겸손히 원칙에 따라 조용히 살아가는 것에 집중하며 자녀들도 그렇게 행동하기를 기대한다.

 

학교는 주로 한 학급 학교에서 1명의 선생님이 8학년의 모든 아이들을 가르치며 학교에는 JOY(Jesus first Others next Yourself last)라는 표어가 걸려 있는 곳이 있다 . ‘예수님 먼저, 그 다음에 다른 사람, 너 자신은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학교수업은 1시간 30분짜리 수업 4교시로 이루어지고 종교는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지식의 원천으로서 이미 그들의 교과서에 녹아있고 종교의식은 학교의 일상생활에서 행해진다.

 

아미쉬 공동체 사람들은 아미쉬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되어 간다. 공동체 외부 세상으로 나가 아미쉬 공동체 내에서 금기시 되어있는 일들을 직접 경험해 보거나 겪어보지 못한 일상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탐색의 기간 럼스프린가를 갖는다. 19~21세 정도에 럼스프린가를 마치고 돌아온 젊은이들은 아미쉬 공동체를 벗어나 외부세계로 나갈 것인지 혹은 교회의 정식 멤버가 되어 아미쉬로 살아가기 위해 침례를 받고 공동체에 남을 것인지 결정한다. 아미쉬들은 그들의 자녀들이 성인이 되어 모두 침례를 받고 교회의 일원이 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강요하지 않는다.

 

예배 장소는 특정한 공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 특별히 제작된 강단이나 화려한 꽃장식이 없으며, 대표기도도 없고, 찬송도 하지 않는다. 음악적 기구는 물론 화려한 음악도 없다. 의식적인 예배의식이나 예배를 인도하는 별도의 성직자나 목사도 없으나 2~3년마다 선출되는 대표가 행정을 받아 여러가지 일들을 알려준다.

퀘이커들은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어느 곳에서나 그리스도가 머리됨을 믿는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라 했다. 그들은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곳을 교회라 하지 않고 meeting-house라 불렀고 예배를 Friends Meeting이라 하였다.

퀘이커 공동체는 하나님 앞에 모든 이들이 평등하다고 고백하여 예배 시간에 여성들도 자유롭게 자신들의 신비적 경험을 증언하였으며 초기부터 여성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영혼이 없는 설교가 난무하는 기성교회에 비해 특정한 예배 의식과 설교가 없는 퀘이커들의 침묵기도에는 성직자나 목사도 없고 설교도 없지만 자신의 역할에 따라 세상을 살며 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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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론 책세상문고 고전의세계 43
존 스튜어트 밀 지음, 서병훈 옮김 / 책세상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자유라는 건 참으로 소중한 단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 자유당이란 단어들 때문에 이 단어가 오용되었다. 마치 태극기 부대 때문에 태극기가 그렇게 되었듯. 신자유주의에서 자유란 아흔아홉개를 가진 사람이 나머지 한개를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백개를 채우는 자유다. 남의 자유를 빼앗는 자유는 자유의 탈을 쓴 구속일 뿐이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는 남의 자유를 빼앗지 않는 진정한 자유를 의미한다. 이 책을 읽고, 오염된 단어 자유를 하얗게 표백하자. 혹시 이왕 물들거면 김남주의 자유에 물들라.

 

만인을 위해 내가 싸울 때 나는 자유
피 흘려 함께 싸우지 않고서야
어찌 나는 자유이다 라고 말할 수 있으랴
(김남주 - 만인을 위해 내가 일할 때 나는 자유 )

 

<밑줄>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 개인이든 집단이든 -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 본인 자신의 물리적 또는 도덕적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 아래 간섭하는 것도 일절 허용되지 않는다. 당사자에게 더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거나 더 행복하게 만든다고, 또는 다른 사람이 볼 때 그렇게 하는 것이 현명하거나 옳은 이유에서,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무슨 일을 시키거나 금지시켜서는 안 된다. 이런 선한 목적에서라면 그 사람에게 충고하고, 논리적으로 따지며, 설득하면 된다. 그것도 아니면 간청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듣지 않는다고 강제하거나 위협을 가해서는 안 된다. 그런 행동을 억지로라도 막지 않으며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일을 하고 말 것이라는 분명한 근거가 없는 한, 결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는 행위에 한해서만 사회가 간섭할 수 있다. 이에 반해 당사자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대해서는 개인이 당연히 절대적인 자유를 누려야 한다. 자기 자신, 즉 자신의 몸이나 정신에 대해서는 각자가 주권자인 것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억압한다는 것이 심각한 문제가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행위가 현 세대뿐만 아니라 미래의 인류에게까지 - 그 의견에 찬성하는 사람은 물론이고 반대하는 사람에게까지 - 강도질을 하는 것과 같은 악을 저지르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만일 그 의견이 옳다면 그런 행위는 잘못을 드러내고 진리를 찾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설령 잘못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의견을 억압하는 것은 틀린 의견과 옳은 의견을 대비시킴으로써 진리를 더 생생하고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는 대단히 소중한 기회를 놓치는 결과를 낳는다.

 

막강한 권력자나 절대적인 복종에 익숙한 사람들은 거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들의 생각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확신에 빠지기 쉽다. 어떤 사람들은 때로 자신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 막무가내로 그 생각을 고집하지 않는다. 그런 이들도 주변 사람이나 자신이 습관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에 대해서는 똑같이 절대적으로 집착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독자적인 생각에 자신감이 없으면 없을수록 일반적인 의미의 세계의 완전함에 암묵적인 믿음을 가지고 더욱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 정당, 집단, 교회, 계급 등이 모여 이 세계를 구성한다. 자기가 속한 집단의 권위에 대한 믿음이 어찌나 단단한지, 다른 시대나 국가, 다른 집단이나 교회, 계급 그리고 정당 등이 자기 집단과 정반대로 생각해왔고 심지어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들은 자신이 속한 집단이 그릇된 생각을 하고 있다는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이끌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과거가 현재에 의해 부정되듯이 현재는 미래에 의해 번복될 것이다. 그래서 현재 많은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생각들 가운데 상당수가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는 폐기될 것이 거의 확실하다.

 

다른 사람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을 비교하고 대조하면서 틀린 것은 고치고 부족한 것은 보충하는 일을 의심쩍어하거나 주저하지 말고 오히려 이를 습관화하는 것이 우리의 판단에 대한 믿음을 튼튼하게 해주는 유일한 방법이다.

 

예수의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대제사장은 자신의 옷을 갈가리 찢었다. 그가 사는 나라의 어떤 기준으로 보더라도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최악의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제사장도 오늘날 종교와 도덕의 영역에서 존경받는 수많은 경건한 사람들 못지않게 공포와 격노의 감정을 지닌 진지한 인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비난하짐나, 그들도 대제사장이 살았던 시대에 유대인으로 태어났으면 그와 똑같은 일을 했을 것이다. 정통 그리스도 신자들은 최초의 순교자를 돌로 쳐 죽인 사람들이 자신보다 훨씬 못된 자들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범죄를 저지른 인간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기존의 생각이 틀리지 않고 옳은 것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경우라도 이 진리에 대해 자유롭게 열린 토론을 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생기는지 따져보자. 고집 센 사람들은 자기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좀처럼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런 사람도, 비록 자기 생각이 옳다 하더라도 충분히 자주 그리고 기탄없이 토론을 벌이지 않을 경우 그것은 살아 있는 진리가 아니라 죽은 독단이 되고 만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자유 토론이 없다면 단순희 그 주장의 근거만 아니라, 그 자체의 의미에 대해서도 모르게 된다. 그 주장을 표현하는 단어들이 특별한 생각을 담아내지 못하거나, 아니면 처음 전달하고자 했던 내용의 일부만을 옮길 수 있을 뿐이다. 생생한 개념과 분명한 확신 대신에 그저 기계적으로 외운 몇 구절만 남게 되는 것이다. 그 의미를 둘러싼 몇몇 껍데기는 남을지 몰라도 정말 중요한 본질은 잃고 만다.

 

세상의 진리 가운데는 사람들이 직접 경험하지 않으며 그 참뜻을 제대로 알기 어려운 것이 많다. 그러나 그 내용을 잘 아는 사람들이 모여 찬반토론을 벌이고 모르는 사람들도 이것을 경청했더라도 그 뜻을 더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이해된 것들은 사람들의 마음에 훨씬 더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어떤 사안이 의심할 여지없이 확실하다면서 그 문제에 대해 더이상 생각하지 않으려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치명적인 악습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의 절반은 그런 버릇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장일치가 없어야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그렇다면 진리를 얻기 위해 누군가가 틀린 주장이라도 억지로 고집을 부려야 한다는 말인가? 어떤 의견을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면, 그 순간 그 의견은 중요하고 참된 진리로서의 성질을 잃어버리는 건가? 무엇인가 의심할 여지가 있어야 그것이 완전히 이해되고 체감될 수 있다는 말일까? 사람들이 만장일치로 어떤 진리를 받아들이면 바로 그 순간부터 그 진리는 사라진다는 걸까?

 

우리와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설명을 하거나 아니면 그들이 입장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어떤 한 진리에 대해 더 생생하고 깊게 이해하게 된다. 그런데 그 진리가 보편적으로 인정받으면서 이런 소중한 기회를 잃게 된다면, 그로 인해 얻는 것도 있겠지만 잃는 것도 만만치 않다.

 

만약 일반적인 통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거나, 법이나 여론이 이의 제기를 허용할 때 실제로 그렇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에게 고마워해야 한다. 마음의 문을 열고 그 사람의 말을 들어야 한다.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해 확신을 가지는 데, 또는 그 믿음이 생명력을 유지하는 데 조금이라도 관심을 갖고 있다면 아주 엄청난 노력을 기울여서라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인데, 그가 우리를 대신해서 그래준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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