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의 그림자 1 잊힌 책들의 묘지 4부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5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책장을 넘기다가 독특한 문구, 웃음을 동반하는 기지 넘치는 표현, 다이어리에 적어 넣고 싶은 고상한 금언을 만나게 되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다.

주로 누워서 뒹굴뒹굴 독서를 즐기는데다가 “책은 깨~끗이 보는 것!”이라는 강박적인 가르침을 받은 세대이기에, 그런 만남의 순간에 나는 책장 모서리를 접어놓고는 한다.

하지만 대체, 접는 페이지가 그냥 넘어가는 페이지보다 많아서야. 이런 난감한 희열을 봤나! 서재에 접속해서 <밑줄 긋기>를 해 놓으려다, 자칫 책 두 권을 몽땅 쳐내려가게 될까봐 그냥 멈췄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이 작가, 욕심도 많다. 남들은 한 편에 한두 개도 될까 말까 한 빛나는 언어를 몽땅 그러모아, 작품 하나에 맑은 밤의 별처럼 촘촘히 박아 넣다니! 대체 뒤에 남은 작가들은 어쩌란 말인가.^^


이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무엇에 비유해야 할까. 얽혀버린 실타래, 끝없이 벗겨지는 양파, 혼을 빼앗는 직소퍼즐,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미로.... 그러나 모두, 적절하지 않다. 실타래를 풀어야 하는 짜증도, 양파껍질이 풍기는 독기도, 퍼즐을 맞춰내는 인내도, 미로를 헤매는 공포도. 바람의 그림자와 함께 하는 여정에서는 순수한 지적 희열 이외의 어떤 고통도 동반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각의 인생을 품고 있는 등장인물들과 겹치고 포개진 수많은 사건들, 아무리 정교하게 배치하고 알맞은 수순으로 풀어낸다 할지라도 자칫 리듬을 잃으면 삽시간에 지루해져 버리고 말텐데. 책을 덮는 마지막 순간까지 때론 빠르게, 때론 느리게 능란하게 풀어내는 이야기에 휘말려버리는 것을 보면....작가가 각고의 노력을 동반한 천재라는 가정 외에도, 분명, <바람의 그림자>에는 공들인 마법이 걸려있음에 분명하리라.


책장을 덮고 그 행복한 여운을 되새김질 하다가, 결국 건넌방으로 넘어와 책상 앞에 앉았다. 이 느낌을 살려 몇 줄의 헌사라도 기록하지 않으면, 바람의 그림자에 묻어온 마법에서 말짱 깨어버릴 것만 같은 불안 때문에. 


바람의 그림자

그 제목부터 이미, 타고난 원전(原典)인 책이 있다. 이제야, 소설에 대한 내 막연한 향수병이 그 고향을 찾았다는 뿌듯함에 태어난 연도를 살폈다. 2001년, 어라, 조금은 더 나이 먹은 책일 줄 알았는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고전>의 품격을 갖춘 소설. <바람의 그림자>는 시간을 거슬러, 과거에 이미 존재한 많은 책들의 원전이 될 가치가 있는, 타고난 명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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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 2006-10-25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접는 페이지가 그냥 넘어가는 페이지보다 많아서야. 이런 난감한 희열을 봤나! 서재에 접속해서 <밑줄 긋기>를 해 놓으려다, 자칫 책 두 권을 몽땅 쳐내려가게 될까봐 그냥 멈췄다...저랑 똑같으시네요.......추.천.

진/우맘 2006-10-25 15: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사. ^^
정말, 어디다가 멋진 말만 모아놓은 우물 같은 걸 숨겨놓은 작가 같애요. 그죠?

야클 2006-11-24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멋진 소설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