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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물녘 맹수들의 싸움
앙리 프레데릭 블랑 지음, 임희근 옮김 / 열린책들 / 1999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가들은, 왜 소설을 쓰는 것일까? 제각각의 이유-특별한 이유가 없다,까지 포함한-가 있겠지만, 세상에 대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큰 소리로 외치고 싶어서 소설을 쓰는 작가도 있을 것이다. 여기 이 작가, 앙리 프레데릭 블랑도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로 보인다. 하지만, 소설 쓰기가 어디 그리 쉬우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을 늘어놓는다고 소설이 되진 않는다. 그런 심심한 글을 누가 읽는담? 헌데 이 작가는 그 난제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상황(혹은 공간)을 설정한다. 그리고 독자가 '상황의 개연성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여길만큼의 기지와 필력을 가미한다. Game over. 이제 작가는 발메르 부인과 샤를르의 입을 빌려 하고 싶었던 말을 실컷 늘어놓기만 하면 된다. 일그러진 현대 사회와 인간 군상에 대해 실컷 욕을 해주는 것만으로 소설이 완성되는 것이다.
읽는 편에서도 쉽고 명쾌하다. 독자는 종종, 두 주인공과 기타 등장인물의 독설이 마치 나 자신에게 퍼부어지는 것인냥 섬뜩해진다. 광고의 홍수 속에 파묻혀 소비를 미덕으로 알고 살아가는 우리.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을 구해주려고 애쓰는 귀찮음을 감수하기 보다는, 그냥 쿠키를 하나 전해주고 충분한 일을 했다고 마음의 위안을 얻는...그러면서 동시에 호기심까지 충족시키는 우리. 작품 속의 숨은 코드 읽기에는 젬병인 나도, 샤를르의 직업이 왜 하필 광고업인가, 그가 갇힌 공간이 어째서 엘리베이터인가에 대한 추론을 수도 없이 펼칠 수 있었다.
황당하고 극단적인 설정을 매끈한 소설로 마무리 짓는 작가의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다른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사실이지만....뒤표지에 실린대로 <면도날처럼 예리한> 그의 우화를 한 번 더 읽어내기에는, 근래 내 신경줄이 너무 약하다. 당분간은 피해야 할 작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