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벌이의 지겨움 - 김훈 世設, 두번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거의 중반에 닿을 때까지, 나는 이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전반적으로 내 심사를 뒤트는 무언가가 숨어 있는데, 그게 뭔지 딱 집어낼 수 없어서 답답했다. 어느 정도는, 몸을 사리는 작가의 지나친 신중함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나, 아직, 피가 끓는 나이인가?^^금방 제 꼬리를 밟으면서도 길길이 날뛰는 장정일같은 스타일에 매혹되던 터에, '나는 그런 질문을 괴로워할 뿐, 거기에 대답하지 못한다.'는 식의 뜨뜻미지근한 문장들은 자꾸 신경줄을 건드렸다.

그런데, 그 문장에 찌푸린 미간이 미처 펴지기도 전, <노출>이란 제목의 짧은 단상을 읽고 나는 그만 "픗!"하고 웃어버렸다. '올 여름 여자들의 노출이 너무 심하다고 텔레비전은 개탄하고 있지만, 너무 그러지들 말아라. 곧 가을이 오면 여자들은 다시 옷을 입을 것이다. 좋은 것을 좀 내버려두라는 말이다.' 하하, 그의 문장이 너무 <귀여웠다>고 하면, 이 노회한 작가에게 불쾌한 일일까? 48년생, 인생은 육십부터라는 요즘, 아직 젊은 나이다. 그런데도 유독 나이 먹은 척, 나이먹음을 무기로 자신의 속내를 이렇듯 눙치고 들려는 작가가 , 그 유들유들함이, 이상하게도 즐거웠다.

그렇게 한바탕 웃고 나니 눈 앞이 좀 개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내가 왜 그렇게 앵돌아졌었는지 짐작이 갔다. 첫 페이지가 문제였다. <아날로그적 삶의 기쁨>이란 소제목 곁에 발췌되어 있던 글. '남성성의 본질이란 아마도 결핍일 것이다. 스스로 결핍이 아니라면 남자들이 여자를 그리워할 리가 없을 것이다. 오입을 하고 바람을 피울 수밖에 없는 남자들도 다 그 결핍 때문인 것이다.' 글 안에 어우러진 문장을 톡, 끊어 내어 딴지를 걸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이 문장의 앞도 뒤도 몇 번 찬찬이 훑어보았다. 하지만, 그리 읽고도 불쾌한 마음은 사그라들지를 않았다. 책 속 어딘가에 조용히 녹아 있을 수도 있는 생각이다. 하지만, 소제목 옆에 버젓이 전시될만한 문장은 아니지 않는가? 한 권의 책이지만, 읽는 사람이 무수한만큼 읽는 방법도 각색일 것이다. 다 내맘같지는 않을지언정, 첫인상을 구겨놓아 제대로 글을 즐기기까지 꽤 많은 시간을 겉돌게 한 이 문장이, 이 위치가, 나는 여직 용서가 안 된다.(뭐, 안 돼도...별 수 없지만.^^;)

전반부의 삐걱임, 그 원인을 인식하고 나자 책 읽기는 조금 수월하고 즐거워졌다. 김 훈, 역시 무시할 수 없는 필력의 소유자이다. 대부분의 수필집은 용두사미, 말미로 갈수록 기력을 잃고 오락가락 하거나 자기자랑에 빠지기 십상이다. 그런 불쾌한 경험이 이제껏 <수필은 싫다>고 생각한 주된 이유였다. 헌데 <밥벌이의 지겨움>은 뒤로 갈수록 은근히 끓어올랐다. 세번째 소제목 <큰 풍경은 보이지 않는다>에서 풀어낸 염전이나 11월의 이야기는 경륜이 아니면 쓰기 힘든 것이 아닐까...싶어 숙연해졌다. 그리고서는 내 멋대로, 본문은 이 세번째 소제목에서 끝났다고 규정해 버렸다. <거리에 관한 짧은 기록>이나 <한 편의 문학평론과 하나의 인터뷰>는 흠잡을데가 별로 없었지만, 그 분량과 방식의 이질성 때문에 '수필은 용두사미'라는 내 편견이 자꾸 들쑤시고 일어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바람소리는 바람의 소리가 아니라, 바람이 세상을 스치는 소리다.' ......글은, 특히나 수필은, 그냥 글이 아니라 작가가 세상을 스친 소리가 아닐까? 김 훈, 이 사람이 세상을 휘휘 돌아 스친 소리는, 아주 간혹 내 귀에 거슬리기도 하였지만....근사하고 그윽하여, 제법 들을만 한 것이었음에 분명하다.


댓글(4)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태우스 2004-06-16 1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였습니다. 그나저나 김훈은 마초입니다. 쾌도난담에서도 그걸 훌륭히 입증했고, 이 책에서도 그러는군요. 글 잘쓰는 마초는 더 나쁜 것 같습니다.
문제: 제가 추천을 했을까요, 안했을까요?
1) 했다 2) 기타

* 서재 지붕 때문에 고생하셨죠? 감사드립니다. 넙죽!

진/우맘 2004-06-16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 쓰는 마초는 더 나쁘다....제 찝찝함의 실체를 콕 짚어 주시는군요.^^

chaire 2004-06-18 2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초, 맞는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산문은 분명, 퍽 매력적이었어요. 글 잘 쓰는 마초는 더 나쁘다? 후훗...^^

책읽는나무 2004-06-20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도 읽으셨군요!!
반갑네요....ㅎㅎㅎ

남자들의 결핍이란 말이 저도 조금은 신경이 거슬렸지만.....신경이 거슬린다는것이 내가 여자이기때문에 약간의 자기방어적인 식견이 포함된것이 아닐까?? 란 생각으로 일단 접었습니다...나는 남자,여자를 딱히 구별하는것을 아주 싫어하지만...그렇다고 여자는 남자를 무시하고...남자는 여자를 무시하는 처사는 더 옹졸하단 생각이 들더군요!..그래서 상대방의 성을 존중할필요가 있단 생각을 좀 했는데...내가 일단 남자가 아니다보니...남자들의 결핍일수도 있다라는 말을 일단 접수하기로 했었죠!!..ㅎㅎㅎ(지금 내가 무슨말을 하는것인지??)
반대로 여자들도 결핍이 있을수 있는데...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해낸 여자 수필가가 없단것이 좀 아쉽더군요!!
진우맘!!....그대가 한번 써보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