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의 독서일기 범우 한국 문예 신서 79
장정일 지음 / 범우사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장정일은 마력적인 작가이다>라고, 리뷰의 첫 문장을 마음 속으로 되뇌이며 책을 클릭했더니, 어라, 벌써 다른 분이 그렇게 써 놨네. 나만 느낀게 아니라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나 보다.^^ 내가 쓰는 <마력>이란 단어는 매력과는 조금 차별화된다. 좋아하고 싶지 않은 사람, 혹은 글인데 어쩔 수 없이 현혹되고 마는....나와는 상당히 다른 감성을 가져 거부하고 싶은 것들임에도 그 자체가 가진 카리스마 때문에 굴복되고 마는, 그런 경우를 나는 <마력적이다>라고 한다. (장정일 이전에는 무라카미 류가 그랬다.)

이 사람, 좋아질 것 같지가 않았다. 우선 엄청난 독서력에 기가 질렸다. 아무리 글쓰는 게 업인 사람이라지만, 하루에 한 권 이상을 거의 매일이다시피 읽어내다니. 책을 가득 쌓아놓고 사각사각 먹어치우는 거대한 책벌레 한 마리가 연상된다.^^; 게다가 그냥 읽기만 하는가? 읽은 후에 토해내는 예리한 글들. 이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장정일을 좋아할 수가 없었다. 그 글들이 완전한 이해 없이 그냥 토해 낸 것들이라면 궤변론자 같아서 싫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완벽히 알고 있다면....징글징글하게 똑똑해서, 도통 좋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쩌랴. <좋아할 수가 없는 이유>를 억지로 주워섬길 정도로 나는 이미 그에게 포섭되어 버린 걸. 싫다고 싫다고 우기면서 그의 잘 벼려진 문장과, 종잡을 수 없는 카리스마에 억눌려 무릎을 꿇는 심정....참, 복잡하다.  

문화주의자들을 비판하지만, 사실 장정일이야말로 지독한 문화주의자의 소질이 보인다. 공지영과 신경숙을 싸잡아 나르시즘에 빠졌다고 비판하지만, 진짜 나르시스트는 작가 본인 같은데? 글 곳곳에서는 장정일의 치기와 모순이 언뜻언뜻 엿보인다. 아깝다...내가 조금만 더 예리했어도, 그에게 승복하지 않고 논리정연한 꼬투리를 잡아 낼 수 있었을 것 같은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논리와 이성은, feel 하나 믿고 사는 내게는 친해질 수 없는 단어들이다. 이 상태로는 승산이 없다. 삐딱하고 똑똑한 이 작가에게 그냥 투신하자. 항복~~~~^^;

각설하고, 장정일의 독서일기를 읽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독서의 길라잡이, 일종의 교과서로 읽는 법. 나머지 하나는 그냥 이 책 자체를 장정일이란 사람의 속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에세이로 읽는 법. 두 방법 모두를 넘나들며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러기에는 그와 나의 독서취향이 너무도 판이하게 다른 것 같다. 해서 나는, 후자로만 만족하기로 했다. 지성으로 벼려진 예리한 혀끝을 가진 이 사람, 장정일과 투닥투닥 다투다가 형편없이 진 것으로 만족한다. 장정일!

You, w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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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우스 2004-05-29 1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You win이라는 말, 저한테 하신 건가요? 기꺼이 님의 항복을 받아들이지요^^

진/우맘 2004-05-29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 저야 예~전에 마태님에게 승복했지요. 그런데도 마태님이 혼자서 방방 뜨며 <덤벼! 덤벼!>하고 외치고 다녔잖아요.-.-

가을산 2004-05-29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녀요.. 요즘 마태님 3류소설 절필하신걸로 보아 절대 win 한거 아닙니다.

책읽는나무 2004-05-29 1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멋진 리뷰인데요!!
저도 장정일 이사람의 왕성한 독서력과...독후감을 읽으면서..서서히 무릎을 구부리고 있는 중입니다요......ㅎㅎㅎ

chaire 2004-05-29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장정일... 전, 좋아하는데...^^ 리뷰 읽으니, 싫어해야겠다는(-->그래도 좋은)...ㅋㅋ; 님의 리뷰에 설득당했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