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만되면 눈이 반짝반짝 '저녁형인간'
---뭔가 창조하는 예술인들이 많아 업무 지장없으면 굳이 아침형으로 바꿀 필요 없어---
지난 6일 밤 12시. 광고회사에 근무하는 허경욱씨는 업무를 마치고 회사 문을 나섰다. 오후 8시부터 11시까지 광고주가 의뢰한 ‘Y프로젝트’를 다루는 전체회의를 3시간 동안 하고 나서 마무리 잡무까지 마친 후였다. 사장 이하 임원들과 기획팀, 제작팀들이 모두 참가하는 회의여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는 SK텔레콤의 이동통신 ‘팅’ 신문광고 시안 설명회까지 주도했었기 때문에 허씨의 몸은 파김치가 됐다.
허씨는 회사에서 가까운 삼성동 ‘메가박스’로 가서 심야영화 ‘올드 보이’를 관람했다. 보통 밤늦게 일이 끝나기 때문에 그 피로를 풀고 내일을 기약하기 위해서 허씨는 심야영화를 즐긴다. 웬만큼 인기 있는 영화를 낮에 보려면 줄을 서야 하지만, 밤에는 줄을 설 필요가 없어서 호젓하게 즐길 수 있다. 2시간 동안 영화를 본 후 인근 게임방에서 온라인게임을 했다. 그렇게 즐기고 이동하고 귀가하면서 틈틈이 머릿속에서 내일 할 일을 생각한다. 새벽 3시에 집에 도착한 후 간단히 몸을 씻고 잠자리에 드니 새벽 3시30분이었다.
최근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새 날을 계획하는 생활을 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다. 일본인 사이쇼 히로시가 쓴 ‘아침형 인간’에서 촉발된 운동이다.
하지만 허씨는 그와는 반대되는 ‘저녁형 인간’이다. 일반 기업체 직원들은 대부분 아침 일찍 출근하는 아침형 인간들이 많지만 허씨처럼 광고회사에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저녁형이 많다. 출근은 오전 11시나 11시30분까지 해도 되기 때문에 절대적인 수면 시간은 보장된다. 허씨는 아침에 아들 서암(9)군을 등교시켜 주지만, 요즘은 방학이기 때문에 오전 8시쯤 눈을 잠깐 떴다가 다시 잠들어 10시에 기상한다.
저녁형 인간은 아침에 늦게 일어나고 밤에 늦게 자며, 낮보다는 저녁 시간에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아침형 인간이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라면, 저녁형 인간은 감성적이고 자유스러운 인간이다. 아침형 인간은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서 하루를 먼저 맞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험난한 사회생활을 헤쳐갈 ‘준비된’ 전사들이다.
‘아침형 인간’ 운동을 하는 인터넷사이트들에는 인파가 몰리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모두 그렇게 살 수는 없다. 반발도 적지 않다. “아침형 인간이란, 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새마을 운동하고 비슷하네요. 또다시 사람들을 한쪽으로 몰고가려는 것 아니에요?”
아침형 인간이 있으면 저녁형 인간도 있고,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종달새형’이 있다면 땅거미가 질 무렵 날개를 펴는 ‘올빼미형’도 있는 법이다. 주로 예술인들 중에 저녁형 인간이 많다. 그들은 정해진 틀에 맞추기보다는 자유로워야 하며, 뭔가를 창조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조선일보에 만화 ‘빨간 자전거’를 연재하는 김동화씨는 “기상은 오후 2시에 하고 만화 그리는 작업은 밤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한다”며 “그 시간이 고요하고 번잡하지 않으며 몸 컨디션도 가장 좋다”고 말했다. 김씨는 “만화가의 처음 10년 동안은 아침형으로 살려고 애도 썼지만 부질없는 일이었고, 지금은 저녁형으로 사는 게 몸에 맞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가정의학과 유태우 교수는 “사람의 몸은 방치해두면 이성보다는 감성에, 일보다는 쾌락에 끌린다. 그래서 특별한 노력을 들이지 않는다면 사람은 저녁형으로 기울게 된다”며 “사회적 여건상 아침형으로 살아야 할 사람이 나태함의 결과 자꾸 저녁형으로 된다면 이는 문제”라고 말했다. 하지만 유 교수는 “자신의 몸이 저녁형으로 굳어져 있고 업무에 큰 지장이 없다면 굳이 아침형으로 바꾸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말했다.
(김왕근기자 wkkim@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