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이었던가? 모 책 소개 프로그램에서 독서인단이라는 고정 패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었을 때,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이 그 주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덕분에 대여섯 명의 다른 독서인단과 함께 일이십분 가량, 김형경 작가님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게 되었다. 책에 사인을 받고, 길지 않은 시간동안 책에 대해 몇 마디 말을 섞은 것 뿐인데도 두고 두고 많은 잔상이 남았다. 순식간에, 마치 첫눈에 반하는 것처럼 작가가 아닌 '사람 김형경'에게 반했다고나 할까. '아...이 사람은 내 이야기를, 정말 성실하게 듣고 있구나....'
대화를 나누는 상대의 눈을 집중해서 들여다보는데도, 그 눈빛이 어디 하나 불편한 데가 없는. 정말 오래 알아온 언니, 혹은 막내이모와 마주앉아 있는 듯한 느낌. 순간, 한 마디라도 더, 한 순간이라도 더 이 사람을 독점하고 싶다는 욕심에 좀 더 인상적일 문구, 마음을 흔들 한 마디를 찾아 분주해졌다. 헌데 그런 다급함도 금세 스러지고 말았다. 다섯 명 이상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노라면 자발적으로 입을 열지 않는 한 듣기만 하거나, 이야기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한 둘은 나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김형경님은 마치 노련한 진행자, 유능한 교사처럼 둘러앉은 사람 하나 하나에게 적절한 관심과 배려를 보였다. 그것이 또 어찌나 자연스럽고 따뜻한지,
읽어내려가면서, 오 년 전 바로 그 때의 편안함이 다시 나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내가 심리학 공부를 조금이라도 맛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수월하게 읽히는 것일까? 잠시 의문도 가졌지만, 아닐 것이다. 먹은 것을 잘 소화시켜서 새끼새에게 게워먹이는 어미새처럼, 김형경은 딱딱하고 심오한 정신분석 이론을 경험으로 완전히 소화시킨 후 독자에게 떠먹여준다. 내가 한 일은 그저, 입을 벌리고 누워서는 흘리거나 체할 염려 없이 넙죽넙죽 받아 먹은 것 뿐.
'천개의 공감'에서 김형경은 편안하다. 비전문가로서의 편안함...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지 않기에 그녀의 조언은 부담없고 수월하다. 그럼에도 그 배경에는 전문가 못지 않은 탄탄한 지식이 숨어있다. 선무당이 저지를 법한 우를, 그녀의 글에서는 발견할 수가 없다. 게다가 '당신이 겪은 아픔, 나 역시 겪었다....'고 악수해주는 듯한, 동병상련의 공감대까지.
근 일주일에 걸쳐 읽었다. 지루하거나 넘기기 힘든 책은 아니었지만, 한 꼭지 읽어내려갈 때마다 떠오르는 생각들, 감정들을 갈무리하는 데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리고 이렇게 천천히 꼭꼭 씹어삼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마구잡이로 머리에는 주워넣었으되 아리송하기만 하던 정신분석학과 심리학의 용어 몇 개가 이젠 완전히 내 것이 되었다는 뿌듯함. 그리고 무언가 진정한 공감과 위무를 받았다는 따뜻함.
머리가 부르다. 아니, 더불어 마음도 부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