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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마다 어릴적 보리타작이 끝나가는 이맘때,

풀숲에선 여치가 어김없이 울어댔다.

그러면 나는 타작이 끝난 보리밭에가서 보릿대를 한웅큼 쥐고서 집으로 오곤했었다

바로 여치집을 만들었던 것이다

 30년전만 해도 보릿대 구하기가 정말 쉬웠었는데,

지금은 보리농사도 거의 짓지않고 설사 짓는다고 해도 모든게 기계화되어서

보리타작을 끝낸 보리밭에서는 보릿대를 찿아보기 힘들다

어릴적 추억을 되살리며 보릿대 대신해 묵은 논에서 흔히 볼수 있는  풀(이름을 몰라서 아쉽다)로 만들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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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형제분은 큰아버님. 아버지 그리고 막내 삼촌 이렇게 세분과 고모님 세분 이렇게 여섯분이셨다.

큰아버님 위로 한 분이 더 계셨다고 했지만 6.25때 돌아가셨다고 어머니가 그러셨다.

오늘 문득 막내 삼촌 생각이 난다.

나의 막내 삼촌은 뇌성마비로 전신이 온전하지 못했다. 요즘 말하는 2급장애인 쯤 될것이다.

막내 삼촌-윤태 삼촌은 매일 다리를 절룩거리는 걸음에 꾸부러진 손을 가슴에 대고 흔들며 다녔었다.

철이 없던 어릴적엔 그런 막내 삼촌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었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는다-분명 부끄러워했었을것이다.

하루에 하는일이라고는 소꼴을 베어 지게에 지고 나르고 -불편한 몸에소꼴을 지게에 한짐이나 지곤했었다.-여물을 끊이는 일이 전부였다. 그리고  지금은 찿아보기도 힘든 소형 라디오-뒷쪽에는 항상 큰 밧데리가 붙여져 있었다-를 듣는 일이 삼촌에게는 유일한 기쁨이였었다.

큰댁에서 할머니랑 같이 살았었는데,  할머니는 물론 막내삼촌 역시 무단히 큰어머니 눈치 보느라 고생했을 것이다.

뇌성마비로 30세를 겨우 넘긴 막내삼촌은 시름시름 앓다가  몹시도 추운 겨울날에 돌아가셨다.

막내삼촌이 돌아가시던 날 아버지는 경운기에 실려가는 삼촌의 관을 따르며  서러움에 하염없는 우셨었다.

그때, 나는 우리아버지의 눈물을 처음으로 봤다.

그때, 나는 울지도 않았던것 같다.

특별히 삼촌에게 사랑받은 기억이 없었고 내가 삼촌에게 잘해준 기억이 없던 나로서는 삼촌이더라도 서먹함이 더 많았었다.

그러나 지금 불쑥 생각나는 삼촌에게 말한마디 내가 먼저 걸었더라면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분명 막내삼촌은 나에게도 좋은 삼촌이였을텐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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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6학년때까지는 정말 정신없이 놀았던것 같다.

놀았다는 말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그때만 해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숙제도 잊고, 동네아이들과 산으로 들로 놀러 다니기에 바빴던것 같다.

바뀌는 계절에 따라 놀이도 달라지고 했었지만 요즘처럼 컴퓨터가 있었던것도 아니고, 동네에는 과자 사먹을 조그마한 구멍가게도 없었지만,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모든산천을 우리는 놀이터를 삼아 실증내지 않고 부단히도 놀았었다.

구슬치기부터 딱지치지,연날리기, 썰매타기, 숨밖꼭질,전쟁놀이 화약터트리기,얼음지치기,수영하기,고기잡기,낙시하기,전쟁놀이하기,소꼽질하기,땅다먹기,고무줄놀이,장기하기,바둑하기,탁구치기,자치기,그네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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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릴쩍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가기란 여간 쉽지가 않았던것 같다.

결코 시장가는 길엔 나를 데려가지 않으셨던 것이였다.

왜였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어른걸음으로도 40분도 넘는 길을 걸어야 했고 거기서 또 다시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 시장길이 서너살 먹은 어린아이에게는 고생길이나 다름이 없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일것이다, 거기다가 시장을 보고 돌아오는길엔 어김없이 머리에 양손엔 시장 봇다리들이 한가득했을테니...

이제는 신작로가 반듯하게 새로 나서, 택시라도 타고 올 수 있겠지만- 물론 그땐  택시가 다닌다고 해도 택시를 타고 오는 사람은 없었을것이다.

돈을 아끼기 위해,,, -아니, 없기때문에.

그렇기에 따라가겠다고 울며불며 투정을 부리는 자식을 떼어놓고 갈수 밖에 없었을텐데 철없던 나는 어머니가 시장가실때 마다 매번 따라 가겠다고 때를 쓰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명절빔을 사서 입혀야 한다거나, 머리를 깍아야할때는 고생길이였어도 꼭 데리고 가시곤 하셨다.

 내일 장에 간다는 소리엔 혹, 어머니 손을  놓처 미아가 되진 않을까 하는걱정 아닌 걱정을 하면서도 매일 보는 산, 매일 보는 들,매일 맡는 냄새가 아닌 새로운 사람들, 새로운 물건들,그것들-새로운것 들을 볼 수 있다는것만로도 기대감에 얼마나 흥분을 했었던지. 그리고 친구들에게 자랑까지 하곤 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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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어떤 성격을 갖고 있는지 지금은  나자신 스스로도 파악이 잘 안되지만,

어릴적에만 해도 꾀나 내성적이였던것 같다.

남 앞에 서는 걸 굉장히 싫어했었고,

싫어했다기 보다는 부끄럼을 너무 많이 탓던 것이리라

어느덧 20년이 더 넘었는 이야기가 되어버렸지만 불현듯 그날이 생각난다.

초등학교 2학년 봄소풍때였다.

 아버지께서는 나와 관련된  학교행사라는 것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봄날 화창한 날의 막내아들  봄소풍에 참여하셨더랬다.

어쩌다가  아버지랑 내가  전교생- 30여명 남짓이지만-이 모인자리 앞에서 노래자랑을 하게 되었던 것 같다.

지금도 마찬가지이지만 어릴쩍에도 노래는 곧잘 불렀던것 같다. 그래서 씩씩하게 노래를 시작했었다.

 아마, "구름마차"라는 동요를 두손은 곱게 가슴앞에 모으고   불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때 당신께서는 내노래에 맞추시어 덩실덩실 춤을 추셨다.

그런데, 노래를 꾀나 잘부르고 있던 도중에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던 것이였다.

갑작스런 나의 울음에 당신께서는 얼마나 당황하셨을까?

당신는 노래도 끝내지 못하고 서있던 나를  끌어안아주시며 "괜찮다"는 말씀을 해주셨지만 나는 울음을 그칠줄 몰랐다.

나도 모르게 울음이 그렇게 났던 것이였다.

나의 울음사태는 곧바로 담임선생님의  박수유도로 수습이 되었지만,

그때는 왜그랬는지 왜 그렇게 울었었는지 왜 눈물이 났는지 지금 다시 생각해봐도 도무지 알수가 없다.

지금  그때로 돌아가 그자리에 다시서서 아버지의 춤에 맞쳐 노래를 불러라 한다면 더 크고  더 신나게 불렀을텐데 말이다.

  혹, 구름마차라는 동요가 들릴때면 그때 일이 엷은 미소와 함께 생각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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