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그리고 두려움 1 시공사 장르문학 시리즈
코넬 울리치 지음, 프랜시스 네빈스 편집, 하현길 옮김 / 시공사 / 2005년 12월
평점 :
절판


코넬 울리치, 우리에게는 필명인 윌리엄 아이리시로 더 유명한 작가입니다. 누가 붙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추리소설 팬들에겐 익숙한 세계 3대 추리소설 중의 한 편인 <환상의 여인>을 썼지요. (참고로 애거서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엘러리 퀸의 <Y의 비극>이 나머지 두 편입니다. 저는 이 랭킹에 꽤 동의하는 편입니다.)

 

작가는 굉장히 불우한 인생을 살았다고 합니다. 평생을 우울증에 시달리는 등 건강도 안 좋았고, 작가로서 비슷한 시기에 출발한 스콧 피츠제럴드(<위대한 개츠비)>의 그 작가)처럼 성공 가도를 질주하지도 못했죠. 어머니와 단둘이 평생 호텔에서 음울한 삶을 살았다네요.

 

그래서 그런지 작풍도 굉장히 쓸쓸하고 음울한 편입니다. 가끔 사랑하는 연인을 그릴 때, 낭만적인 색채가 뭍어나올 때도 있지만 그건 그가 꿈꾸었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너무도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던 사랑...그의 소설의 배경은 대부분 밤입니다. 별이 빛나고 달이 빛나는 밤이 주는 따뜻한 낭만,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깜깜한 밤의 음침함, 범죄로 얼룩진 밤의 끈적끈적함 등 그는 밤을 잘 알았고, 밤을 사랑했습니다.

 

여기 그가 천착한 밤을 배경으로 하는 7편의 단편이 있습니다. 국내에는 최초로 소개되는 울리치의 단편들입니다. 울리치의 애잔함과 쓸쓸함을 좋아하셨던 기존의 팬분들이나, 이 단편집으로 그를 처음 알게 되는 분들 모두 인상 깊은 독서가 될 것임을 보장하는 작품들이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담배>는 마피아의 조무래기 심부름꾼이 주인공입니다. 심부름꾼은 마피아 보스의 명령을 받고 상대 조직 보스에게 담배를 건네줘야 합니다. 그런데 그 담배에는 청산가리가 들어 있었습니다. 마피아 보스가 상대 보스를 제거하기 위해 수작을 부린거죠. 심부름꾼은 우연히 담배가 없어 애를 태우는 애연가를 만나게 되고 기분 좋게 담배 한 개피를 건넵니다. 청산가리가 들어있는지도 모르고 말예요. 이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하지 않게 담배를 준 남자를 찾아나섭니다. 도시를 질주하면서 말예요. 쓰고 보니 <독약 한 방울>이라는 작품과 비슷한 플롯이네요. 이 작품은 우연이 지배하는 세계라는 울리치의 세계관이 드러납니다. 심부름꾼은 우연히 남자에게 담배를 주고, 남자는 또 다른 남자에게 우연히 담배를 주고...우연은 우연을 낳아 결국 어떤 이에게 돌아가고 맙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 먹은 대로 뜻한대로 되지 않는, 우연이 지배하는 인생의 아이러니를 깊이 느끼게 됩니다.

 

<동시상영>은 애인과 영화를 보러 온 형사가 애인 옆에 앉은 남자가 탈주범임을 깨닫고 벌어지는 스릴 넘치는 이야기입니다. 탈주범은 곧 애인을 인질로 잡고, 탈주극을 벌입니다. 위에서도 울리치가 낭만적인 연인의 이야기를 잘 다룬다고 했는데, 여기서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어떤 위험도 불사하는 멋진 남자입니다. 30년대 작품이지만 요즘 인질 영화보다 훨씬 스릴이 넘칩니다. 울리치는 어떻게 하면 독자들이 손톱을 물어 뜯으며, 책장을 시속 10km로 넘기는지를 알았던 서스펜스의 대가였다는 걸 깨닫게 해 줍니다.

 

<횡재>는 싸구려 카페에서 시작됩니다. 마시라는 커피는 안 마시고  설탕만 뒤적이는 한 사내가 있고, 그런 그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노숙자가 있습니다. 노숙자는 자기 앞의 설탕도 한 번 뒤적여보지만, 뜻 밖에 설탕 속에서 나오는 건 다이아몬드 목걸이입니다. 설탕을 뒤지던 사내는 강도로, 도주 중에 다이아몬드를 설탕 그릇에 숨겨둔 것입니다. 이제 따뜻한 밥 한끼면 안분지족했던 노숙자는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손에 넣고 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도망쳐야 합니다. 일상적인 사건에서 비일상적인 공포를 이끌어내는 울리치의 노련함을 볼 수 있습니다.

 

<용기의 대가> 역시 뛰어난 단편입니다. 평범한 순찰경관은 거물급 범죄자의 범죄 현장을 목격합니다. 거물급 범죄자는 거금을 주며, 출세를 보장할테니 그 입 다물라!라고 합니다. 사회 윤리와 경찰이라는 자신의 직업 의식이라는 무게에 짓눌리면서 그는 선택의 문제에 직면합니다. 무엇이 옳은 일일까, 하고 말입니다. 결국 옳은 판단을 한 그가 벌이는 모험담이 긴장감 넘치게 펼쳐집니다. 아무리 우울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결국 선(善)이 이기는 모습을 보면 정말 울리치는 낭만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입니다.

 

<목숨을 걸어라>...내기꾼 남자가 여느 때처럼 내기를 겁니다. 평범한 두 사람에게 일주일 안에 살의를 불러 일으켜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겠다고 말입니다. 말도 안되는 황당한 내기라고요? 글쎄, 어떨까요? 내기는 점점 발전하고, 사태는 의외의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흥미로운 초반 플롯에 비해 약간은 평범한 마무리로 무난하게 맺습니다. 개인적으로도 가장 재미없게 보았던 단편입니다.

 

<요시와라에서의 죽음>은 정말 신나는 활극입니다. 울리치가 이런 B급 모험담을 썼을 줄이야. 초기작이고, 확실히 그의 걸작에 비하면 수준 차이가 나지만 재미만은 확실합니다. 인디애나 존스+마이크 해머 같은 미군 수병이 일본에서 휴가를 보냅니다. 그는 살인 누명을 쓴 미국 여자를 구하기 위해 닌자같은 일본 살인 청부업자와 대결합니다. 그가 닌자(?)를 제거하고 한 말이 걸작입니다.

"싸움은 무슨? 오늘 밤 내내 남자답게 속 시원히 한판 싸워보지도 못했는데요. 물어뜯는 놈이 없나, 엄지손가락을 잡아 비트는 놈이 없나, 커튼 뒤에서 뒤를 노리는 놈이 없나....온통 이런 놈들 뿐이었다구요!"

 

<엔디코트의 딸>은 걸작입니다. 정말 잘된 단편입니다. 울리치가 쓴 수백편의 소설 중에 본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품이라고 했다는데 정말 그럴 듯 합니다. 존경받는 경찰서장 앤디코트가 살인 현장에서 발견한 건 자신의 딸이 관련되었다는 증거 뿐입니다. 사랑하는 딸을 위해 증거를 없애야 할까요? 투철한 직업 윤리로 딸을 잡아넣어야 할까요? 역시 해답을 알 수 없는 선택의 문제에 빠져버린 앤디코트 서장, 그는 딸에 대한 사랑으로 자꾸만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고, 마지막에는 대폭주까지...결말엔 반전이 기다리고 있는데 그간 튼튼한 무쇠 바이스처럼 조여 들었던 긴장이 한 번에 해소되는 시원한 결말입니다. 앤디코트 서장에 감정이입해보면 정말 악몽같은 작품입니다.

 

<윌리엄 브라운 형사>는 완벽한 느와르 작품입니다. 이쪽 장르에도 울리치가 꽤 영향을 끼쳤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지만 출세지향적인 윌리엄 브라운 형사와 그의 죽마고우이자 성실함 밖에는 내세울 게 없는 '느림보' 조 그릴리 형사가 등장합니다. 작가는 어렸을 때부터 대비되는 두 사람의 성격을 극명히 묘사한 후, 결국 같은 경찰로 대결하게끔 만들어 버립니다. 야비한 출세지향 형사와 단단한 심지의 형사의 긴장이 서서히 고조되다 마지막에 폭발합니다. 긴장감이 일품입니다. 마지막 결말은 완전 멜빌이나 오우삼의 영화 같습니다.

 

 

이상 7편을 대충 살펴 봤습니다. 울리치같은 뛰어난 작가를 평가한다는 게 저같이 과문한 사람에게는 굉장히 힘든 일입니다. 코넬 울리치는 20세기의 에드거 앨런 포, 20세기 그림자 속 시인, 글로 표현하는 히치콕이라는 원작의 편집자 프랜시스 네빈스의 말에 크게 동감합니다.

 

시대를 잘못 타고난 불우한 천재이자 밤이 주는 음울함과 낭만을 사랑했던 밤의 예찬론자, 위험한 일을 함께 헤쳐 나가는 남자들(특히 경찰들) 사이의 우정을 찬양했던 사나이, 사랑을 믿지 않았지만 사랑을 즐겨 다루었던 로맨티스트...이처럼 그는 많은 얼굴을 가진 작가입니다. 당신이 보는 울리치의 얼굴은 어떤 것인가요? 울리치의 우물에 일단 손을 담그면 그냥 나올 수 없습니다. 반드시 무엇인가를 건져서 나오게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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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6-01-19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Kitty 2006-01-19 1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리는 듯.
환상의 여인은 개인적으로 추리소설에서 등을 돌리도록 한 작품이지만;;;
(다른 분들이 다 좋다고 하시니 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
단편집이라면 읽어보고 싶네요. 추천하고 갑니다~

jedai2000 2006-01-19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만두님...이제 2권을 읽어야겠네요.^^;;

키티님...제가 좋아하는 헬로 키티네요..^^;; 너무 반갑습니다. 이상하긴요. 저도 제가 짝사랑하는 여자한테 강추했다가 별로라고 하는 바람에 안타까웠던 기억이 있어요. ^^;; <환상의 여인>을 읽고 실망하실 수도 있지만 추리소설에서 등을 돌르시면 안되셔요..흑흑. 재미있는 작품이 아직 얼마든지 남아 있다고요...^^;;

추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