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완벽하게 주관적인 순위입니다.
** 2010년에 출간된 책만을 포함하며, 당연히 국내에 출간된 모든 서양 미스터리를 읽지는 못했습니다.
5위 콘크리트 블론드 - 마이클 코넬리
잔뜩 기대를 한 미스터리 소설들이 연달아 꽝으로 밝혀졌을 때, 나는 언제나 마이클 코넬리의 책을 집는다. 그의 작품은 부동의 재미 4번 타자이므로. 지금껏 5권을 봤는데, 전부 홈런이었으니 적어도 내게는 10할 타자인 셈이다. <콘크리트 블론드>는 그런 마이클 코넬리의 대표 캐릭터인 해리 보슈가 등장하는 세 번째 이야기다. 아마도 오늘날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형사라고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해리 보슈는 1권 <블랙 에코>에 처음 등장하면서 가장 특징적인 세 가지 배경을 공개한다. 먼저 베트남전 참전용사라는 것, 둘째, '인형사'라는 여성 연쇄살인범을 사살하고 그 사건의 판권을 팔아 거금을 손에 넣었다는 것, 마지막으로 어린 시절, 창녀였던 어머니가 길거리에서 살해됐다는 것. 마이클 코넬리는 작품 속에서 언뜻 언급되는 배경 스토리를 토대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가히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는 작가라 어떤 사소한 설정도 가벼이 지나쳐서는 곤란하다. 예를 들어, 해리의 어머니를 죽인 범인을 찾는 이야기가 시리즈 4권 <라스트 코요테>이고, 2권 <블랙 아이스>에서 살짝 언급되는, 보슈의 이복형 미키 할러 변호사가 스핀오프 <링컨 차를 타는 변호사>에 등장하는 식이다. 처음부터 전체 밑그림을 그려둔 것인지, 아니면 마구 뿌려놓은 이야깃거리 중에서 되겠다 싶은 걸 골라 쓰는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간 대단한 재주다. 이중 <콘크리트 블론드>는 '인형사' 사건을 다루고 있다. 몇 년 전, '인형사'를 처치했던 일이 과잉진압 논란에 휩싸이는 바람에 그는 뒤늦게 법정에 서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죽은 '인형사'와 똑같이 여자를 살해한 다음 곱게 화장을 시키는 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그렇다면 해리는 범인이 아닌 무관한 사람을 사살한 것일까? 해리 보슈 최대의 공적이라 할 '인형사' 사건이 그를 파멸시키려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흔히 스릴러 작가로 불리지만 퍼즐 미스터리 스타일의 트릭에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는 마이클 코넬리의 진가를 느껴보시길. 기자 출신다운 문장력도 발군, 빠르게 핵심만 파고드는 스토리 전개 능력에서도 비교할 만한 작가가 없다.
4위 붉은 오른손 - 조엘 로저스
추리소설이라기보다는 무시무시한 공포소설에 가까운 분위기로 출발한다. 보아라. 표지부터 얼마나 무시무시(?)한가를...인적이 뜸한 미국의 시골 도로 삼거리 한복판에서 퍼져버린 자동차를 고쳐보려 애쓰는 의사가 있다. 그의 이름은 해리 리들(riddle, 수수께끼?). 한 시간 가까이 응급실에서 하듯 필사적으로 차를 수술해봤지만 그의 전공은 사람을 치료하는 것이지, 차를 치료하는 게 아니라서 결국은 실패. 패잔병이 된 기분으로 터덜터덜 주변의 마을로 걸어가서 도움을 요청하려는데, 평온한 시골 마을이 온통 쑥대밭이 되어 있는 게 아닌가. 사정을 들어보니 두 눈은 빨갛고 귀는 찢어진데다 코르크스크루처럼 다리가 뒤틀린 괴물 같은 생김새의 부랑자가 방금 신혼부부를 살해하고 그들의 자동차를 훔쳐서 이 마을을 쏜살같이 지나쳐 갔단다. 마을 사람들은 리들에게 묻는다. 부랑자가 훔친 차의 진행 방향에 따르면 당신의 자동차가 멎어버린 그 삼거리를 반드시 지나쳤을 텐데, 혹시 보았느냐고. 리들이 지난 한 시간 동안 그 어떤 것도 보지 못했다고 답하자 마을 사람들은 그를 의심한다. 그러고 보니 자신이 봐도 자기가 수상하다. 엔진을 고치려고 허둥대다 다쳐 손은 피범벅이 되어 있고, 무더운 여름 뙤약볕에서 사투를 벌였던 탓에 두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하나의 내가 저지른 일일까? 리들은 그날 아침부터 겪었던 모든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차곡차곡 진실의 벽돌을 쌓아올리기 시작한다. 분명 어딘가 한 구석에 잘 설명이 되지 않는, 위화감이 가득한 부분이 있었다. 그것을 찾아야 하는데...마치 <환상특급>을 보는 듯 초현실적이고 섬뜩한 사건들 속에서 한 줄기 논리의 흐름을 좇아 마침내 해답을 밝혀내는 리들의 짜릿한 하룻밤 모험담으로 조금 작위적인 구석도 있지만 정말 탁월한 퍼즐 미스터리다. 판매 의욕을 저하시키는 표지가 아쉽고, 책에 삼거리 부근 지도가 들어 있었다면 하는 생각도 들지만 가히 엄지를 번쩍 치켜들 만한 책이다.
3. 탄착점 - 스티븐 헌터
1990년대에는 작가 자신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전문적인 지식을 작품 속에 적절히 녹여내 사실성과 완성도를 높인 소설들이 대거 유행했다. 밀리터리 전문가 톰 클랜시의 테크노 스릴러, 변호사 출신 존 그리샴의 법정 스릴러, 법의관 출신 퍼트리샤 콘웰의 법의학 스릴러 등이 대표적인데 이들의 책은 나왔다 하면 수백만 부가 팔렸다. <탄착점>의 스티븐 헌터 또한 이런 흐름 속에서 거론되는 작가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티븐 헌터의 전공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총기와 저격, 저격수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사실성이다. 스티븐 헌터는 위에 언급한 다른 작가들과는 달리 실제 저격수 출신은 아니고, 원래 저명한 영화평론가였다. 하지만 몇 년에 걸친 면밀한 취재와 자료 조사를 통해 상상을 초월하는 사실감의 저격 액션 스릴러를 완성해냈다. <탄착점>의 이야기 구조는 지극히 단순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전설적인 스나이퍼가 암살범 누명을 쓰고 쫓기다가 자신을 엿먹인 세력들에게 총 한 자루로 통쾌하게 복수한다는 내용이다. 어떻게 보면 뻔한 얘기지만 일대일, 혹은 일대다의 다채로운 액션들과 서서히 드러나는 음모의 전모, 결정적 반전이 펼쳐지는 최후의 법정 장면까지 절대 지루하지 않게 잘 풀어냈다. 남자라면 누구나 일격필살, 일발필중의 저격수에 관심이 많을 터, 책을 읽다 보면 저도 모르게 '빵야, 빵야' 소리를 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참고로 마크 월버그가 주연했던 <더블 타켓>의 원작으로, 악당 캐릭터의 질감이나 매력 있는 서브 캐릭터, 전체적인 구성까지 영화가 훨씬 부족하다.
2위 메인 - 트레바니안
오랫동안 정체를 숨기고 양질의 미스터리 스릴러 작품들을 발표했던 복면작가 트레바니안의 대표작. 캐나다 몬트리올의 슬럼 지역인 메인 가를 수십 년간 지배하다시피 한 명물 경관 라프왕트가 주인공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독불장군 라프왕트는 정년 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음에도 매일같이 메인을 누비며 거리의 범죄와 악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소탕한다. 입버릇처럼 과학수사, 범죄자 인권 이딴 거는 개에게나 줘버려, 를 외치는 그의 말투에서 독자는 그만의 무지막지한 원칙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뇌물도, 협박도, 총알세례도 통하지 않는 강철의 이미지로 메인을 좌지우지하는 라프왕트에게도 아픔은 있었다. 불치병에 걸려 언제 심장이 멎을지 모르는데다, 사랑하는 아내도 먼저 세상을 떠나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토록 원했던 아이는 낳을 기회조차 없었고, 오직 그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우리는 외적인 강인함과 달리 내면의 우울로 점철된 라프왕트의 쓸쓸한 일상을 따라가면서, 동시에 희망을 상실한 메인이라는 도시 자체의 막막한 어둠 또한 목격하게 된다. 생애 마지막 살인 사건을 수사하는 라프왕트가 발견한 범인의 정체 그리고 그 동기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읽는이의 가슴을 저민다.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많은 게 달라졌을지도 모르는 지난날을 회한하며 오열을 터뜨리는 라프왕트의 모습을 보고도 눈물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 같은 경우 세 번을 봤고, 세 번 볼 때마다 울었다. 딱히 트릭이 있다거나, 미스터리 구조가 탄탄하거나 한 작품은 아니지만 누구에게나 권할 만한 명작이다. 특히 추리소설에 무슨 문학성이 있어, 하고 빈정대는 사람의 면전에 확 들이대고 싶다.
1위 유다의 창 - 존 딕슨 카
나 같은 부족한 추리소설 애독자가 감히 1위로 꼽는 게 죄송할 만큼의 걸작이다. 2010년, 아니 2000년대에 나온 모든 퍼즐 미스터리를 합친다 해도 첫 손에 꼽힐 영원불멸의 클래식에 손색이 없다.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 밀실 트릭의 정수가 담겨 있으며, 주요 무대가 법정이니만큼 법정 미스터리의 원조 격이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고전의 가치는 누구보다 더 잘 인식하고 있지만 무조건적으로 고전만을 찬양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소를 감추지 못하는 편인데, 아무래도 출간되고 나서 시간이 한참 흐른 고전은 시대에 뒤떨어진 트릭이나 미스터리 장치 등의 한계도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다의 창>은 다르다. 1930년대에 나온 작품이지만 오늘날의 그 어떤 트릭도 범접할 수 없는 통렬한 한 방이 있다. 밀실에서 화살에 찔려 죽은 노인, 그리고 그와 같은 방에 함께 있었던 젊은이. 모든 문과 창문이 남김없이 잠겨 있어 당연히 젊은이가 용의자로 체포되는데, 그는 범행을 완강히 부인한다. 나는 수면제를 먹고 잠들었을 뿐이고, 진짜 범인은 따로 있노라고. 다들 젊은이의 항변을 비웃었지만 명탐정 헨리 메리베일 경은 뜻밖에 그 젊은이를 믿어준다. 메리베일은 이 세상의 모든 문에는 은밀한 빈틈, 즉 '유다의 창'이 있고 진범은 그 '유다의 창'을 이용해 범행을 저지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얼른 믿을 수 없겠지만 '유다의 창'은 실제로 모든 문에 존재한다. 그 정체를 알고 나는 숫제 떼굴떼굴 굴렀다. 세상에나, 이렇게 간단하면서도 황홀한 트릭이 있었다니 하면서. 당장 책을 들어 '유다의 창'을 확인해보시길. 그리고 지금 당신의 방 문에도 있는 '유다의 창'을 보고 두 번 세 번 감탄하시라. 보통 딕슨 카의 걸작으로 이 작품과 <세 개의 관>, <구부러진 경첩>을 드는데, 내 기준에서는 이 작품이 첫 번째이고, 2등은 근소한 차이로 <세 개의 관>에게 주고 싶다. <Y의 비극>,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밖의 어떤 작품과 비교해도 <유다의 창>은 떨어지지 않는다. 가히 역대 베스트 중 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