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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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갑이다]는 미야베 미유키가 1992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비교적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옮긴이의 말을 읽어보니 이 작품을 잡지에 연재하기 전까지 단 1권의 책만을 낸 상태였다고 하네요. 아무튼 그렇습니다. 미야베 미유키입니다. 90년대 초부터 현재까지 일본에서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는 작가이기에, 최근의 일본소설 유행을 타고 우리나라에서도 12권이라는 많은 작품이 소개되어 명성이 높은 일본 미스터리 여왕의 작품이 또 나온 것입니다.

저는 물론 미야베 미유키를 매우 좋아하고 전설적인 [화차]나 [모방범] 같은 작품들을 아주 높게 평가하지만, 일본에서 근 20년 넘는 시간 동안 변화하고 발전해온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들을 차근차근 읽어온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는 단기간에 너무 쏟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들더군요. 쉽게 말해 물릴 수 있다는 건데, 어떤 작가도 1년에 10편 이상 읽으면 질리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해서 [나는 지갑이다]도 아주 반색을 하고 책을 잡지는 않았습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요즘 너무 읽었어, 더구나 초기작이라니...이런 마음이었죠.

하지만 10개의 단편이 수록된 이 단편집의 첫 편을 읽자마자 내리 끝을 향해 달려가야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 속도감 있고, 재미있습니다. 요즘 작품들만큼 단단한 느낌은 없지만 톡톡 튀는 아이디어가 샘 솟았던 초기의 풋풋한 모습을 엿보는 맛이 쏠쏠했습니다. 마치 미야베 미유키의 미래의 진화를 예감케 했던 '잃어버린 고리'를 찾은 듯한 기분이었어요. [나는 지갑이다]는 아주 거칠게 말하면 더 콤팩트하고 재기발랄한 [모방범]이면서, [화차]의 애잔함과 쓸쓸한 분위기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 작품의 뼈대가 될 만한 것들이 초기작에 모두 들어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요.

이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독특한 화자가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홍보자료 등을 통해 다들 아시다시피 [나는 지갑이다]는 지갑의 시점으로 진행됩니다. 보험금을 노리고 각각의 배우자를 살해했다는 혐의를 받는 내연 관계의 두 남녀를 경찰과 사립탐정이 수사한다는 큰 기둥 줄거리를 바탕으로, 총 4건의 살인사건이 발생하는 가운데 이 사건에 얽힌 인물 10명의 지갑이 의인화되어 각자의 주인을 관찰하고, 사건의 진행 과정을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등장하는 지갑은 형사의 지갑, 목격자의 지갑, 증인의 지갑 그리고 범인의 지갑까지 다양해요.

물론 지갑은 지갑일 뿐이라 주인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은 되지 않고, 그냥 관찰만 가능할 뿐입니다. 이 지갑들은 성격도 말투도 천차만별인데,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다들 주인에 대한 애정이 크고 깊다는 것이죠. 살해당할 위기에 놓인 주인을 걱정하기도 하고, 특히 범인의 지갑은 범인이 원래 그런 일을 저지를 얘가 아니라며 변호하기 바쁩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범인들이 온갖 욕망에 매몰되어 인간성을 잃었기에, 한낱 사물에 불과한 지갑이 보여주는 충성과 연민, 애정이 더 특별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면모를 가진 지갑들이지만 한 가지 더 특별한 건 지갑들의 추리력이 예사 수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는 지갑이다]는 10개의 단편이 모여 하나의 커다란 사건을 추적하는 구조로 되어 있어, 마지막 편까지 모두 읽어야 사건의 전모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꼭 끝까지 읽지 않아도, 읽는 내내 재미의 끈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각각 30쪽 내외의 짧은 단편들에도 자그만 미스터리들이 하나씩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10개의 작은 미스터리가 물줄기를 이뤄 커다란 하나의 미스터리라는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셈입니다.

이렇듯 독자들은 총 11개의 크고 작은 미스터리를 즐길 수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단편들로 편편히 읽어도, 연작 장편집으로 쭉 읽어도 모두 재미있는 미야베 미유키의 영리한 설정이 돋보이네요. 지갑은 팔도 없고, 다리도 없는 가련한 존재라 주인이 양복 속주머니에 집어넣으면 아무것도 볼 수 없습니다. 단지 듣기만 할뿐이지요. 주의깊게 듣고 주인의 심리를 잘 관찰하는 것만으로 멋진 추리를 이끌어내는 지갑들의 추리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특히 제2편 <공갈꾼의 지갑> 편은 물 흐르듯 진행되는 스토리텔링의 결말에 기발한 트릭을 깔아둠으로써 산뜻하게 즐길 수 있어 개인적으로 참 인상 깊었습니다.

요즘 나오는 작품들같이 길지도 않고(원래 미야베 미유키가 약간 수다체를 즐겨 사용하지만 최근작들은 너무 길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신선한 구성과 독특한 화자의 등장, 여전한 안타까운 정서와 인간미가 잘 배합된 초기의 수작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초기작다운 부족한 부분도 눈에 띄지만 장점이 워낙 많은 작품이니 세세한 약점들은 큰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 봅니다. 요즘 미야베 미유키에게 좀 질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거나, [화차]나 [모방범]만으로 미야베 미유키를 모두 다 알았다고 자신하시는 분들이 읽으면 좋을 것 같네요. 분명히 미야베 미유키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p.s/ [나는 지갑이다]라는 제목이 재치는 있지만, 끝까지 읽고 나니 [기나긴 살인]이라는 원제가 더 좋아 보입니다. 마지막 에필로그 <다시, 형사의 지갑>을 읽으면 알 수 있듯이, 이 작품에 나오는 4건의 살인이 모두 1년 6월이라는 기나긴 시간 동안 벌어졌기도 하거니와, 사랑하는 사람을 이 살인사건으로 잃은 남겨진 사람들에게 그 아픔은 길고 길게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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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향기 2007-07-09 1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읽고있는데요.. 특이한거 같아요 지갑들이 말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한다는게ㅎㅎ

jedai2000 2007-07-09 14: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적님...그렇습니다. 저도 보다보다 지갑이 주인공인 건 처음이라 당황하면서도 독특해 더 몰입이 되더라구요. 그렇다고 독특한 화자에만 기대 이야기가 허접하지도 않으니 미야베 미유키가 천재는 천재라는 생각이 들어요 ^^

bongbong 2007-08-08 1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손에 드니 끝장을 보게 만들더군요
누군가와 이름없는 독으로 이뤄지는 시리즈로 살짝 실망한 시점에 역시 미미여사구나하는 느낌을 다시 받게 되었네요.. 한꺼번에 많은 책이 쏟아진다는 느낌이 강하긴한데 안나오는 것보단 나은거 같아요^^
스나크 사냥을 빨리 읽고 싶군요

jedai2000 2007-08-09 1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adie1229님...전 <이름없는 독>은 아직 보지 않고 아껴두고 있는데, 살짝 실망하셨다니 불안해지네요. <나는 지갑이다>는 초기작인데 요즘 작품들보다 오히려 더 재미를 느끼셨나 보네요. 하기야 요즘은 한꺼번에 너무 많이 나오는 경향이 있죠. <스나크 사냥>도 초기작이고 평가가 상당히 좋으니 볼 만할 것 같네요. 저도 기대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