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환상문학전집 14
오스카 와일드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 오스카 와일드, 황금가지(2003)


원제 The Picture of Dorian Gray




*** 스포 있으니 읽은 분들만 보세요 ***

 오스카 와일드에 대한 이야기는 몇 번 들었지만 직접 읽어보기는 처음이었다. 아니 어릴 때 읽은 동화 「행복한 왕자」가 있으니 두 권 째라고 해야 할까. 그러나 두 작품은 너무도 다르니 말이다. 그런데 읽고 나니 결국 행복한 왕자나 도리언 그레이나 모두 작가 오스카 와일드를 투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겠다. 모르고 읽었을 때와 다른 느낌이다. 일단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작가의 유일한 장편소설이라고 한다. 그것도 1891년에 쓴 글인데 지금 읽어도 흠뻑 빠져들 만큼 그의 글은 흥미롭다.

 책의 내용은 주인공 도리언 그레이라는 너무도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이 그의 초상화를 받으면서 시작된다. 친구이자 화가가 그려준 초상화는 그의 최적의 아름다운 모습을 훌륭하게 담고 있었는데 신기하게도 도리언 그레이가 타락하고 쾌락주의에 빠져들수록 초상화가 추하게 변하기 시작한다. 이를 알게 된 도리언 그레이는 끊임없이 타락하고 쾌락을 즐긴다. 그리하여도 그는 늘 아름다운 외모를 유지하고 초상화가 대신 변해갈 뿐이니까. 줄거리만으로도 흥미로운데 오스카 와일드의 문장 자체도 좋다. 그들의 대화하는 모습도 재미있다. 읽을수록! ​ 그런데도 옮기는 문장은 초반에 메모한 것뿐이라 아쉽다. 책 곳곳에서 흥미로운 문장과 만날 수 있었다.

​바질의 친구가 한 몇 마디 말들, 의심할 여지 없이 우연히 뱉은 말들, 그리고 그 안에 고의적인 패러독스가 담겨 있는 말들이 전엔 결코 건드려진 적 없는 내면의 어떤 비밀의 현을 건드렸다. 그리고 그것은 이제 기이한 박동과 함께 떨고 진동하고 있었다.

 음악이 그를 그처럼 동요케 할 수 있었다. 음악은 그를 여러 번 번민에 빠뜨렸다. 그러나 음악은 말처럼 분명히 표현되는 것이 아니었다. 음악이 우리의 내면에 만들어 내는 것은 새로운 세계가 아니라 차라리 또 다른 하나의 혼돈이었다. 말들! 그저 말에 불과한 것들! 그런데도 그것들은 얼마나 위력 있는가! 얼마나 명료하고 생생하고 잔인한가! 우리는 도저히 말에서 도망칠 수 없다. 그리고 말들 안에는 얼마나 미묘한 마술이 도사리고 있는지! 말은 형태가 없는 사물에 원하는 어떤 형태든 부여하는 힘을 갖는 듯하고, 비올라나 루트를 켤 때처럼 달콤한 음악이 말 안에도 흐르는 듯하다. 말에 불과한 것들! 하지만 말만큼 실제적인 것이 또 있을까? (36쪽)

 발췌한 문장은 책의 일부분일 뿐이다. 책의 진가는 역시 직접 읽어보기를 권한다. 오스카 와일드라는 작가 자체도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장신에 화려한 패션은 그의 외향적 특징이지만 그의 내면은 보다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의 자화상이라 느껴지는 도리언 그레이와 그를 떼어두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 아름다움을 숭배한 그는 이 책을 출간한 같은 해에 앨프레드 더글러스를 처음 만났다고 한다. 당시 옥스퍼드를 다니던 16세 연하의 21세 제자를 사랑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때가 오스카 와일드는 37세로 두 아이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몇 년 후 제자의 부친이 남색협의로 고소했고 오스카 와일드는 결국 풍기문란 죄로 2년간 형기를 치른다. 감옥에서 펴낸 책이 바로 최근 문학동네에서 나온 「심연으로부터」(2015년 5월)이다. 이 책도 궁금하다. 오스카 와일드가 동성의 연인에게 쓴 러브레터라는데 절절하다고 한다. 더불어 또 궁금한 책은 프랑스어로 발표했다는 「살로메」로 기괴하고 환상적인 시극이나 영국에서는 상연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이유는 관능적이고 퇴폐적이어서 라는데 파리에서는 인기를 얻었다고 한다.  


 순탄치 못 했던 오스카 와일드의 삶의 일부를 보며 도리언 그레이의 삶이 겹쳐진다. 그의 운명을 직감하고 쓰기라도 하듯 말이다. 책에서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가 즉 내면이 추하게 변하는 것을 알고 직접 본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음에도 그는 그 타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 했다. 그러나 그처럼 만약 우리가 우리의 죄나 타락 등으로 인해 망가지는 모습을 직접 마주하게 되다 쳐도 그처럼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객관성을 유지하는 자체도 어렵고 그렇다 하더라도 욕망에서 벗어나기 힘들 것이다. 죄의식이 있다 해도 반복할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얼마나 끊임없이 싸워서 지켜가야 할 것이 많은지 생각해 본다. 그럼에도 누군가는 객관성을 유지한 채 늪에서 결국 빠져나온다.

 극 중 인물인 도리언, 화가, 헨리 경은 모두 자신들이 절대적으로 믿는 것들(가치)에 배신당한다. 이들의 모습에서 유추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인간적 절대가치라는 게 과연 얼마나 가치 있는가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믿은 만큼 전부를 건 그 무엇으로부터 대가를 치른다는 사실 또한 숙지해야 한다. 아래 작가의 말처럼.

 욕망의 지나친 절제와 마찬가지로 욕망의 지나친 탐닉도 반드시 대가를 불러온다는 것입니다. 화가 바질 핼워드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지나치게 숭배했고, 대부분의 화가들처럼 자신이 그 영혼 속에 과도한 허영과 자만을 만들어 낸 인물의 손에 죽습니다. 도리언 그레이는 관능과 쾌락만으로 삶을 살다가 자신의 양심을 살해하려는 순간 자신의 목숨까지 살해합니다. 헨리 워튼 경은 인생의 관객으로만 살고자 하지요. 그렇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는 끔찍한 교훈이 있습니다. 음란하고 외설적인 사람은 발견하지 못할 교훈이, 하지만 건강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볼 교훈이 거기 있습니다. 이것이 예술적 실수일까요?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그것이 내 책의 유일한 실수입니다.

(326쪽, 오스카 와일드가 이 작품이 졸작이라고 비평 받자 편집자에게 쓴 반박문 일부 발췌)

  육체와 영혼의 분리에 대해 생각해 본다. 사람이 담고 있는 것은 육체에 깃든 영혼일까? 아니면 영혼이 깃든 육체일까? 아니 이런 말장난이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육체와 영혼의 합일이 되지 않고 겉도는 일이야말로 중요한 문제이다. 외모지상주의 혹은 아름다움에 속아 참된 영혼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도 잘못이지만 칭송해 마지않는 그 아름다움이란 게 영원할 거라는 어리석음 또한 버려야 한다. 불멸을 꿈꾼다면 육체보다는 영혼이 더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어쩌면 육체가 썩어 사라지듯 영혼 또한 흔적도 없이 빛 속으로 소멸하는 건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해체하라! 놓아두면 더 편해질테니 말이다.

 철학적 사유를 이야기하려는 건 아니고 도리언 그레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의 아름다운 미적 가치는 불완전하고 타락한 영혼과 한 몸이 되었다가 동시에 분리되어 버린 것이다. 하나이나 하나가 아닌 것. 만약 그가 현재에 충실하고 추해지는 추상화를 보며 다시 돌려보려고 시도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순간의 쾌락이 결국 영원을 그르치는 결과. 영원한 젊음을 원하던 젊은이는 결국 추한 늙은이로 사라진다. 결국 역설적이게도 이 이야기는 성립되었고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회자되는 것이리라.

 

+ 옛날책이니 최신판으로 다시 읽어보고 싶은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읽은게 언제인데 이제야 끼적끼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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