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이들이 당장에 인생을 실험해 보는 것보다 사는 법을 더 잘 배울 수 있는 방법이 또 있겠는가? 그렇게 하면 수학 공부만큼이나 그들의 정신을 단련시키게 될 것이다. 가령 한 소년에게 예술과 과학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가르치고 싶다면 나는 그 아이를 어떤 교수가 있는 곳으로 보내는 식의 흔해 빠진 방법은 쓰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강의되고 실습되지만 삶의 예술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으로 세계를 관찰하는 법은 가르치지만, 육안으로 세상을 보는 법은 가르쳐주지 않는다. 화학은 공부하되 빵은 어떻게 구워지는가는 배우지 않으며, 기계학은 배우되 빵은 어떻게 버는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는다. 해왕성의 새로운 위성은 발견해 내지만, 자기 눈의 티는 보지 못하며 또한 자기가 지금 어떤 악당의 위성 노릇을 하고 있는지는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한 방울의 식초 안에 사는 괴균들을 연구하면서 자기의 주위에서 우글거리는 괴물들에게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75쪽, 「월든」이레출판사, '숲 생활의 경제학' 일부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