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1
가와바타 야스나리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계절마다 생각나는 이미지나 추억이 있다면 당연히 겨울에는 눈(雪)이겠지. 그리고 이 계절만큼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이 어울리는 시간 또한 없을듯하다. 제목만으로도 전체적인 이미지가 떠올라 마음이 차분해지는 책. 그리고 유명한 시작 문장은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설국으로 빨려 드는 시작의 순간이 좋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7쪽)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는 문장. 그것도 긴 터널을 빠져나온 후에 보는 풍경이라고 상상해보니 이토록 간결하게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할 수 있어서 부러웠다. 잠시 멈춰 서 호흡을 고르며 이 순간을 음미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풍경 묘사를 통해 이미지를 불러내들인다.



여자의 인상은 믿기 어려울 만큼 깨끗했다. 발가락 뒤 오목한 곳까지 깨끗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19쪽)

 발가락 뒤 오목한 곳을 찾아보았다. 아, 이런 곳까지 살피는 사람이구나 싶었다. 난 살펴보기는커녕 언급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곳이다. 아무리 고전이라도 이런 점은 정말 감각적이라 생각한다. 이 밖에도 손가락으로 기억하는 여자라는 글 등 호흡이 긴 문장도 좋았고 짧은 문장도 좋았다. 물론 일어 자체는 훨씬 서정적이라고 극찬하던데 역시 그건 확인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별다른 내용도 없다. 여유롭게 사는 시마무라가 니가타 지방에 가끔 와서 보거나 느끼는 것들과 만나는 이들에 관한 것으로 고마코와 요코의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렇게 할 반전도 없지만 마지막 장면만은 처연한 느낌을 오래 느끼게 한다. 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가 한 번에 쓴 글이 아니라 조각조각 썼다는데 그런 영향도 있을까 싶다. 그래서 설국의 진수는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설국 자체가 주는 고요와 침묵에서 나온다.

 그나마 고마코의 말투나 행동이 귀여워서 발랄함을 준다. 요코는 등장부터 창에 비친 모습에서 신비로움을 주었다. 그리고 관찰자 시마무라 아니 작가는 자연묘사에 뛰어났다. 눈처럼 고요하고 모든 소리를 빨아들이거나 덮어버려 침묵을 선물했다. 독자의 마음에서 잡다함을 뽑아버리는 느낌이었다.


 발레리와 알랭을 비롯, 러시아 무용이 한창이던 무렵에 프랑스 문인들이 쓴 무용론을 시마무라는 번역하고 있었다. 적은 부수의 호화본으로 자비 출판할 예정이다. 지금의 일본 무용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책이라는 점이 오히려 그를 안심시켰다고 해도 좋다. 자신이 하는 일로 스스로를 냉소한다는 것은 어리광을 부리는 즐거움이기도 하리라. 바로 이런 데서 그의 슬픈 몽환의 세계가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행을 떠나와서조차 서둘 필요는 없다. (…중략…)

 시마무라는 죽은 곤충들을 버리려 손가락으로 주우며 집에 두고 온 아이들을 문득 떠올리기도 했다.

창문 철망에 오래도록 앉아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면 이미 죽은 채 가랑잎처럼 부서지는 나방도 있었다. 벽에서 떨어져 내리는 것도 있었다. 손에 쥐고서,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 하고 시마무라는 생각했다.

(113쪽과 114쪽. 부분 발췌.)

스스로를 냉소하며 어리광을 부리고 슬픈 몽환의 세계가 태어나고. 자꾸만 시마무라는 작가의 반영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삶을 어째서 이토록 아름다운가라고. 그의 근원적인 세계관이 간접적으로 느껴졌다. 사실 작가의 작품에 나오는 인물이 모두 작가이진 않겠지만 설국은 작가의 집약된 내면세계가 확실할 거란 생각을 떨치기 어렵다.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일찍 부모를 잃었고 10년 가까이 함께 살아온 조부조차도 그가 15세 때 세상을 등졌다고 한다. 그가 겪고 감당해왔을 고독과 슬픔은 이후 그의 글쓰기 밑바탕이 되기 충분했다. 작가를 이해하면 그의 글을 더 이해하기 쉬운 이유가 이것이다. 글에 전반적으로 흐르는 허무함을 이해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삶의 경건함까지 아우를 수 있었다. 적당히 그러려니 하는 식의 이해는 이 책을 지루하게 느낄 뿐이겠지만 살면서 느끼는 허무하던 때를 돌이켜보면 충분히 납득이 갈 것이다.

 한때 허무주의에 빠져 산다는 게 지독하고 처절했던 경험. 이제는 그때처럼 좌절하거나 허무하기 어렵겠지만 돌아보니 그 시간이 나쁘지 않았다. 지나고 나면 다 그렇다는 일반적인 논리에 의한 게 아니라 정말로 그렇게 되어버렸다. 과거는 기억하기에 슬프기도 하지만 추억하기에 어느 정도로는 무마되기도 한다. 사실 그렇지 않으면 미쳐버릴지도 모르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이 오는 니가타 지방에서 이 책을 읽을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일지 상상해보았다. 좀 더 현실적으로 내 마음속으로 침잠하고 싶을 때 이 책을 다시 읽으면 좋겠다. 작가의 내면 지도를 들여다보며 나와 만나는 지점이 조금이라도 있을까 생각했다. 솔직히 모르겠다. 나는 그처럼 가족을 일찍 잃어보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나만의 다른 무언가를 잃어본 때와 겹쳤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마음 지도는 지독히도 새하얗고 침묵으로 들어찬 공간이었다.

■간단 서평: 줄거리만으로 볼 책이 아닌 작가의 내면세계가 집약된 설국 자체와 만나볼 것.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