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김영하의 책은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감정적이지 않고 다소 차가운 느낌이지만 흡입력이 있었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요구했다. 흥미진진한 여러 요소가 있음에도 나는 그의 다른 작품을 펼쳐 들지는 않았다. 한 권으로 작가를 판단하기는 이르겠지만 내가 좀 더 젊었다면 아니 더 모험적이었을 때였다면 아주 좋아하고 빠졌을 거 같다. 다시 읽은「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처음처럼 강렬하지 않지만, 여전히 물음을 던진다. 
 
 이 책의 특징은 일단 두드러지는 제목이다. 제목을 잊어버릴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하다. 파괴할 권리란 나를 진흙탕에 마구 파묻는 것일 수도 있겠으나 결국은 스스로 삶의 종지부를 찍는 것을(자살) 의미한다. 제목만 읽고도 바로 아는 독자도 있겠지만 난 솔직히 말하자면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나를 어디까지 몰아갈 수 있나의 의미로만 생각했으니까. 자학 정도로. 
 
 나는 자살을 권리와 책임의 윤리적 혹은 종교적 측면까지 생각해서 절대 반대를 고수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나 제목에 반대한다. 그럼에도 작가의 발칙하고 관능적인 이야기를 이해한다. 한때 잠시라도 생각해본 적이 있는 경험 때문일까. 삶을 즐길 수 없는 무의미한 절망의 시간이 길어지자 산다는 게 괴롭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잠시 영원한 휴식에 대해 떠올렸다. 내 안으로만 침잠하던 때였는데 돌아보니 나 역시도 그때는 단절된 상태였다. 스스로 울타리를 치고 자꾸만 그 늪으로 빠져들던 시간. 그리고 또한 책에서 나오는 이처럼 생의 끝을 지켜주는 이(자살 도우미 정도.)와 비슷한 직업에 대해 뜬금없이 생각해 본 적도 있다. 내가 우울과 냉소의 끝을 달리며 느꼈던 것들이 약간은 들어있는 책이다.  
 
 명화의 선택은 탁월했다. 클림트의 유디트, 다비드의 마라의 죽음, 들라크루아의 사르다나팔의 죽음까지. 그러나 그렇게까지 미학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것을 왜일까. 작가의 역량이 부족해서인가. 그가 대하는 미술의 방식은 짧지도 깊이 있어 보이지도 않으나 보통이상임은 분명하다. 특이한 소재를 명화와 연결해서 이야기하는 방식이 좋다. 작가의 번뜩임과 개성이 느껴진다. 동시에 조금은 투박함도 느꼈다. 더는 함몰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거친 신선함 때문이지 않을까. 김영하가 20년 후에 이 책을 썼다면 어떤 느낌일까. 신선하지 않아도(이미 세상은 너무도 자극적이지 않은가.) 중후하거나(그의 꾸준한 저작활동을 생각하여.) 광시곡적인 죽음의 전염을 퍼뜨리지 않았을까. 아, 이런 생각을 하니 아찔하다. 영화〈글루미 선데이〉가 겹친다. 작가 김영하의 초기작인 게 우리에게는 다행인지도 모른다.    
 
 책의 등장인물들을 두 번째 만나니 놀랍지는 않으나 이내 수긍하게 된다는 사실이 더 놀랍다. 그만큼 시대는 변했고 다양한 종류의 사람이 넘쳐나니까. 그렇다면 반대로 작가는 시대를 앞서 간 것이라는 말일 것이다. 당시의 충격이 미래에는 보편적인 수준까지는 아니나 놀랍지도 않다는 것. 서글픈 현실이다. 책의 마지막 문장이 아직도 생생하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161쪽, Ⅴ. 사르다나팔의 죽음 중.
  나는 작가의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든다. 어떤 의미로 적었건 난 이 문장으로 인해 책장을 덮고도 마음이 편안하다. 전혀 착잡하지도 죽음이나 그 어떤 우울한 인자에도 감염되지 않는다. 그것이 이 문장의 힘이고 작가의 힘이라고 여긴다. 결국, 어디로 흘러가거나 도망쳐도 달라지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이를 두 가지 반대의 입장에서 풀어보자면 전자로 어차피 변할 게 없는 인생 될 대로 돼라지. 자포자기적인 입장. 그리고 후자로 여기서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가도 결국은 달라질 게 없으니 포기 말고 여기서 버텨내자. 그렇다면 선택은 독자의 몫이 아니겠는가. 각자의 기분이나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결말이다. 책에서 주는 중첩의 의미. 그것이 우리가 살면서 느끼는 것과 매우 닮아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이분법적 결말을 내고 모아니면 도가 될 수도 있으나 사실 그 경계는 지극히도 주관적이며 선택적일 수 있다는 희망 말이다.
 
 타인과의 소통이 끊어지고 다가서지 않는 차가운 무관심. 그 소리 없는 침묵의 힘은 그 어떤 것보다 파괴적이다. 다시 제목을 돌아본다.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것은 타인이 나를 파괴하는 힘보다 훨씬 치명적이다. 그리고 여기서 묻고 싶은 한 가지. 스스로의 파괴에 만족하십니까? 유디트건 미미건 영원한 휴식을 치른 이들은 대답이 없을 뿐이다. 아무리 평온한 얼굴로 남아있어도 싸늘해진 그들의 피와 영혼이 대답 대신 공허하게 울릴 뿐이다. 우울함에 잠식당한 현대인의 피상적인 영혼을 위로하며 생의 희망적 당위성을 찾아 나서게 하는 힘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우리가 텍스트를 통해 읽어낼 수 있는 의미 있는 것들과 새롭게 부여한 나름의 정의. 역시 작가는 독자를 집요하게 꿈꾸고 생각하게 독려하는 존재들이다.  
 
 작가 김영하의 다른 책을 이제서야 읽어야겠다는 결심이 선다. 생각거리가 없는 책은 이미 글자 장식에 불과하지 않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선정성과 논란 혹은 부자연스러움으로 다져진 책만이 아님이 분명했다. 따뜻한 책은 아니지만 나를 돌아보게 해주는 책이었다.  
 
 
 
+ 책좋사(http://cafe.naver.com/bookishman) 책읽기 프로젝트 50 8기, 1주에 만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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