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3월 11일)이 법정 스님이 입적하신지 1년이 된 날이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석가탄신일이 올 것이다. 올해도 변함없이 거리마다 가로수에 연등이 달리고 등이 켜지면 색색의 연등은 온기를 주고 기분까지 밝혀 줄 것이다. 친정은 불심이 깊지만, 종교의 자유 속에서 커와서 나는 현재도 무교이다. 반대로 시댁은 교회 집안이지만 교회에 다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어보고 싶어서 집에서 가까운 교회에 가끔 간다. 어찌 보면 나는 종교의 문외한이기도 하고 관심만 많은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던 차에 작가 정찬주가 쓴 부처님 열반 이야기라서 읽고 싶어졌다. 정찬주 작가는 불심이 깊은데다 그만의 감성이 더해진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글을 쓴다. 그의 글에서는 아련함이 느껴지고 성찰이 진지하게 있어서 마음에 닿는다. 얼마 전 읽은 작가의 최신작 『절은 절하는 곳이다』도 잘 읽은 터라 이 책이 더욱 기대되었다. 『니르바나의 미소』는 부처님 열반 이야기로 3개월의 여정을 따라가며 진행된다. 게다가 작가의 모교인 동국대학교 출판부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부처님에 대해 잘 모르는 독자도 쉽게 읽을 수 있을 만큼 어렵지도 않다. 부처님 곁에서 오래도록 시봉하는 아난다뿐 아니라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짤막하게나마 그들과의 인연과 대화를 통해 열반에 드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손에 잡고 쉬지 않고 끝까지 읽었다. 사춘기 때 붓다는 대단한 인간이라고 생각하고 막연한 동경하던 기억이 난다. 이후 영화 <리틀 부다>를 보며 수행에 대해 생각하기도 했었다. 여기서 수행이란 스님들이 행하는 수행이 아닌 삶에서 갈고 닦는 평범한 마음의 수행을 말한다. 부처님 말씀을 들으면 느끼는 바가 크지만 매 순간 깨어 있기 어렵듯 행동으로 연결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책과 마주하는 내내 마음은 편안했다. 홀로 있는 일을 배우라. 으뜸가는 수행은 홀로 있는 것이다. 홀로 있어야만 진정으로 즐거울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온 세상은 빛나리라. 욕망을 버리고 명상하고 있는 그의 이름을 들으면, 내 제자는 더욱더 겸손해지고 믿음이 깊어질 것이다. (74쪽. 홀로 가는 수행자에서.) 아난다여, 누구든 지금이나 여래가 열반에 든 후에도 자신을 등불로 삼고自燈明, 자신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가르침을 등불로 삼고法燈明, 가르침을 귀의처로 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지 말라. (88쪽. 자신을 등불 삼아라에서.) 모든 현상은 소멸해 간다.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242쪽. 열반에 드시다에서. 여래의 마지막 말로 부처님의 짧은 유언.) 마음을 닦아 삼독의 비를 맞지 않는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가만히 생각해 보았다. '삼독은 불교에서 깨달음에 장애가 되는 세 가지 번뇌 탐욕, 진에(화냄), 우치(어리석음)를 말하며 줄여서 탐·진·치라고도 한다.' (본문 23쪽 참고.) 살면서 삼독의 비를 맞지 않고 살기란 얼마나 어려운지. 아니 애초에 그게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수행에 정진하라는 것이겠지만 내가 이중 가장 이겨내기 어려운 게 무엇인가 하면 우치(어리석음)가 아닐까. 탐욕과 진에(화냄)는 참을 수 있다고 치자. 그러나 어리석음은 참아서 가능한 게 아니라는 말이다. 책을 덮자 나만의 화두가 마음을 누르며 놓아주지 않는다. 마음의 평온과 묵직함을 동시에 주는 책의 여운이 참으로 그윽했다. 열반에 드는 마지막까지 말씀을 전하는 모습이 따뜻했다. 무릇 말이란 순수하게 처음의 의도를 지켜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새삼 깨닫는다. 부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종교가 그렇겠지만 변질하지 않은 본연의 진리를 추구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의 마지막 말인 게으르지 말고 정진하라는 말을 기억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