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 - 오래된 사물들을 보며 예술을 생각한다
민병일 지음 / 아우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손때묻은 물건을 만나는 일은 행복하다. 낡아서 날이 서지 않은 느낌은 언제나 뭉클하고 정겹기 때문인데 물건마다 추억이 깃들어 있어서 그럴 것이다. 다리 하나가 어딘가 사라진 클래식한 작은 탁상시계, 학창시절의 감수성이 담긴 시 액자, 누군가가 만들어 준 열쇠고리, 몽당연필…. 사물은 말없이 제자리를 지키며 시간을 견뎌왔고 사람은 거기에 추억을 덧칠한다. 그리하여 온기가 피어난다.

 

 저자는 시인, 출판편집을 거쳐 뒤늦게 예술에 대한 동경으로 독일 유학길에 오른다. <나의 고릿적 몽블랑 만년필>은 독일 유학생활 중 벼룩시장 등을 돌며 만난 그만의 물건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첫 산문집이라 그런지 독일과 오래된 사물이라는 한정된 주제임에도 많은 것이 응축되어 있다. 읽기 편하고 사진도 예쁘다. 특히 처음 소개되는 램프는 다음 장에 한 면을 할애해 은은한 빛을 보여주는데 사진을 보는 즐거움을 빼놓을 수 없었다.

 

세속 도시에서 한 발만 비켜서면 차 한 잔으로 비울 수 있는 마음이 곁에 있는데,

비울수록 차오르게 할 수 있는 것들이 내 안에 있는데……

 

(57쪽. 백년 찻잔과 찻주전자에서.)

 

 개인적인 일기를 펼쳐보는 느낌처럼 조심스럽지만 이내 부러워지는 물건을 만날 수 있었다. 램프, 연필깎이, 촛대, 타자기 등을 비롯한 사물 그리고 독일문화를 간접적으로 맛보는 즐거움까지 얻을 수 있다. 휠덜린, 괴테, 쉴러, 헤세, 베토벤 등 내가 사랑하는 독일의 예술가 그리고 저자의 클래식 사랑도 엿보인다. 책을 읽어갈수록 머릿속에서는 바그너의 <탄호이저 서곡>이 둥둥 떠다녔다. 왜 그랬을까. 웅장한 그 음악이 책과는 그다지 어울리는 거 같지는 않지만, 독일 이야기라서 그런 거 같다.

 

 외로운 유학생활을 버티게 해준 벼룩시장, 엔틱한 물건, 미술과 음악 등을 비롯해 그에게 친절했던 이들 덕택에 좋은 기억이 가득한 거 같다. 클레의 소묘집 편에서 '책은 사물이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인간적이다.' (72쪽.) 라는 말에 공감했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건 독일에서 출판한 <고요한 아침의 나라>였는데 정말 심봤다가 아닐까 싶다. 물론 외국인이 본 조선의 모습이라 조금 생소하기도 하지만 흑백, 칼라시진을 비롯해 세밀화까지 담아낸 소중한 자료였다. 1915년 초판본의 견고한 제본술이라니 책장 한 장 잘못 건드려 십 여 장이 절로 뜯어지는 책과는 비교할 수조도 없다.

 

 누군가의 소중한 물건을 보며 거기에 깃든 이야기까지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그리고 새삼 느끼지만 소박하게 사는 독일인의 모습도 보기 좋았다. 물건을 사는 이에게 "오래 머무르는 좋은 친구가 되길 바란다." (60쪽.) 고 행운을 비는 모습이 정겹다. 우리에게도 오래된 우리만의 풍경이란 게 있다. 다듬이, 맷돌을 비롯한 그 많은 사물이 떠오르는 날이다. 나의 고릿적 풍경에는 어떤 사물이 들어 있을까 기억을 더듬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