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랑말랑한 힘 - 제3의 시 시인세계 시인선 12
함민복 지음 / 문학세계사 / 2005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 함민복의 시를 만난 것은 지인을 통해서였다.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시집)>, <눈물은 왜 짠가(산문집)>를 읽으며 단숨에 시인에게 빠져들었다. 시인이기 전에 이 사람 정말이지 마음결이 곱지 않은가 싶어서였다. 억지로 아름답게 꾸미지도 않고 덥석덥석 내려두는 말들이 이다지도 정겹고 포근할 수 없었다. 마음이 메마른 날 그의 글과 만나면 단비를 촉촉이 머금은 순한 마음이 되리라.  
 그렇다면, 어떤 점이 마음을 움직이는 것일까. 현대적이거나 세련미와는 다르게 친근함을 들 수 있겠다. 눈물이 날만큼 슬프지는 않지만, 가슴 한구석이 짠해지는 느낌. 이것이 특징이라 생각된다. 어려운 말, 지독히도 형이상학적인 말을 사용하지 않고도 분명히 그만의 언어로 들려주지만,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는 게 좋았다. 그래서 마음이 정화되는 것 같다. 

 이번 시집에는 유난히 짧은 시가 와 닿았다.
"천만 결 물살에도 배 그림자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움(64쪽.)이란 시의 전문인데도 단 한 줄이다. 시집 한 페이지를 차지하는 단 한 줄의 시가 여백을 가득 남기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살면서 우리네 눈에서는 얼마나 많은 물살이 일어날까. 눈 물살 만으로도 지워지지 않는 삶의 고난을 겪어보았다면,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간절히 그리워한 적이 있었다면 충분한 공감을 할 것이다.  

 사실 함민복이란 이름만으로 기대가 큰데 <김수영 문학상>까지 수상한 시집이라 시를 시만으로 읽지 못해 조금 아쉬웠다. 타이틀은 중요하지 않다고 늘 외치면서도 정작 그 타이틀 때문에 신경 쓰게 된 것이다. 못마땅한 내 태도를 반성했다. 그래서 처음 읽을 때는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보다 감동이 떨어진다고 생각하며 그래도 함민복이지 않느냐고 자신을 다독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다시 읽을수록 교만했음을 알았다. 곱씹을수록 잔잔해져서 마음이 편해졌다. 시집의 후반(4 뻘)으로 가면 섬에 대해 쓴 글들이 나타난다. 서정시인의 계보를 이어가는 시인의 정수가 이 책에 가득하다. 어민후계자 함현수(110쪽.) 같은 시는 구수하고 정겹다. 그리고 이어지는 섬에 대한 글들은 그가 사는 강화도의 바다, 뻘이 숨 쉰다. 짧은 시와 더불어 가장 좋았던 부분이다. 

 섬이 하나면 섬은 섬이 될 수 없다(-섬이 섬에게 보내는 편지) 편에서 그가 풀어둔 섬에 대한 이야기를 접하며 언제였더라. 몇 해 전 섬에 대해 한참 생각해 보던 때가 떠올랐다. 지방에서 혼자 직장생활을 할 때였는데 날마다 작은 섬에 갇혀 지내던 때였다. 일 중독에 빠져서 회사에서 밤을 넘기기가 허다했는데 그러다 집에 돌아오면 빈집 이상한 공간의 섬에 착륙하고는 했다. 우울함으로 나무를 가꿔서 기묘하게 자라기만 했는데 그 시절에 섬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었다. 그래서 글을 읽으며 공감하며 웃을 수 있었다. 킹크림슨의 <아일랜드>라는 곡을 무한 반복으로 들으며 지구라는 큰 섬에 사는 나를 되돌아 보았다.  


배 언저리만 보이는 안개에 갇혀 있는 상황과 내가 살고 있는 삶이 무엇이 다른가. 내 삶을 좀 먼 시간 밖에서 바라다보면 결국 안개에 갇혀 있는 것과 같지 않을까. 현재란 시간의 섬이다. 세월이 가는 길 시간은 현재의 뭍이다. (129쪽. 3.뱃길의 일부.) 

달빛이 우는 소리를 오랫동안 들었습니다. 물결 위에서, 물을 끌어당겼다가 놓았다가 반복하는 달의 힘 위에 올라앉아, 달의 힘을 느끼며, 달빛을 타며……, 내륙의 한복판 중원 땅에서 태어나 바다 한가운데까지 오게 된 내 지나온 길들을 낚싯줄처럼 풀어도 보고 그물처럼 엮어도 보았습니다. (130쪽. 4.그물터의 일부.) 

섬은 외로워서 지상에서 가장 낮은 울타리, 물울타리를 치고 제가 품고 있는 그리운 마음 상할까 사방에 소금물을 둘렀습니다. 우주에 떠 있는 지구라는 섬에서 움직이고 있는 나라는 개체는 얼마나 작은 섬인가. 그리움에 가득 찬 존재인가. 영종도 공항 쪽에서 날아오른 물고기 닮은 비행기를 쳐다봅니다. (130쪽. 5.귀항의 일부.) 

 
 생각이 통하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고 또 반갑다. 책을 읽을 때도 마찬가지라 만나지 않았어도 왠지 친숙하다. 그래서 함민복 시인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 특히 위의 마지막 귀항의 일부를 읽으며 소름이 돋았다. 나 또한 소금물 두르고 섬을 만들었지만, 시인처럼 표현하진 않았다. 다만, 힘든 시기였다. 일직선이 아닌 여러 각도의 선이 존재한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지 않았으면 정말 단조롭기만 할 텐데. 이렇게 혹은 저렇게 어디에선가 마주치는 것만으로 서로 위안을 주고 격려해줄 수 있어서 살만하지 않은가 싶다. 함민복, 정호승 등 이렇게 몇몇 시인에게 나는 빚을 진 셈이다. 고마워요, 이 시대의 위대한 시인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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