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알랭은 알랭 드 보통이 아니라 에밀 샤르티에의 필명이었다. 우연히 보통의 <행복한 건축>을 읽은 직후라 동명이인의 이름에 피식 웃고 말았다. 철자까지도 똑같았으니 말이다.
책을 읽을 때 어록을 마주할 때면 즐겁기도 하지만 부럽기도 하다. 얼마나 많은 자아와의 시간을 갖고 탐색해서 얻어낸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일까 싶기 때문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치열한 내면탐색기는 중학생 때와 대학생 때였던 거 같다. 그나마도 안으로 제대로 들어갔던 때는 순수했던 사춘기였고 후자 때는 안과 겉을 아우르느라 깊이 있게 들어가지 못했던 거 같다.
초판이 77년이라 오래된 느낌이었으나 다음 순간 아차 싶었다. 나도 70년대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먼저 살다 간 이들의 철학과 마주하면 언제나 흥미롭다. 각설하고 앞에서도 잠시 말했지만 얼마나 깊이 골몰했는지 곳곳에서 흔적을 찾기 쉬웠다. 모두에게 자신만의 철학이 있겠지만, 그것을 얼마나 진지하게 숙고하여 이룩했는지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거창하거나 절대적 진리가 아니어도 상관없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절대적 진리란 그리 흔하거나 많지도 않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을 바라보고 온몸으로 겪고 유추해서 정착해가는 과정이다. 서른 해가 넘었어도 나만의 철학에 큰 획이 그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에 치열하게 고민하던 때를 다시 꺼내오고 싶은 심정이다. 언제부터인가 메마른 자아의 샘물에서 한 바가지 가득 물을 뜰 수 있을지 실로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정념론(18쪽 참고.)을 읽으며 그렇게나 오랜 시간 감정과 마주했던 순간이 애쓰지 않아도 생생히 살아났다. 저자가 말하는 정념론을 간략하게나마 책을 인용해서 적자면 정념론(精念論)이란 데카르트의 저서를 알랭이 즐겨 예시인용하는 책으로 알랭 자신의 정념론도 있으며 정념(Passion)의 어의만으로 보면 감정에서 생기는 사념을 가리키나, 심리학이나 철학에서는 그리고 특히 이 글에서는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의 총칭이라 한다. 여기까지 몇 줄에 걸쳐 적었지만 결국 다스려지지 않는 감정의 총칭을 다스려야 함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그간 철학서를 등한시해왔음을 알았다. 또한, 사고의 흐름이 고였으니 길을 터주어야겠다. 저자의 사상을 접하며 크게 파동이 치는 부분은 없었지만 이런 생각들을 돌려주었으니 충분한 가치 있는 시간이었다. 책을 읽으며 뇌를 고문하거나, 시간을 팔아먹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반대로 마음에 고은 일렁임을 조금이라도 주는 책을 만나는 시간은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