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 시인선 37
진이정 지음 / 세계사 / 199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외로운 이는
얼굴이 선하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그의 일과 중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일어나자마자 깃발을 단 뒤
한바퀴 섬을 둘러보는 일,
잰 걸음으로 얼추 한 식경이면
그 섬을 일주할 수 있었다
나도 그런 곳에서
산보나 하며 살고 싶었다
한 식경이 너무 과하다면
몇 걸음 디디지 않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어린 왕자의
알사탕 별일지라도

외로운 이는
마음이 고르다
그 등대지기도 그랬다
심심할 땐
바이블을 읽는다던 그는
할망당의 굿을 믿는
토종 인간이었다
하찮은 잡귀일지라도
박대해선 안된다는 것을
어질지 않은 탐라의 바다에서
애써 깨우쳤는지
그는 만물에 대해 겸허했다

외로운 이는
가슴이 저리다
안개 조짐이 있던 날
나는 떠났다
떠나는 나를 위해
(나는 그렇게 믿었다)
그가 길게 길게
안개 신호를 울려주었다
짙어가는 연기 속에서
잦아지는 사이렌을 들으며
내 눈은 젖어들었다
아아 나의 등대는
이미 빛을 잃은 것이다
이제 내 가야 할 뱃길은
희미한 그림자 놀음,
누구는 나를 위해
안개의 나팔을 불어대고
누구는 또 나를 위해
안개의 올을 촘촘히 한다

-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세계사(1994)>에서 '등대지기'전문. 32-34쪽.)  

 
 작년 1월에 詩를 좋아하는 이웃분이 진이정의 시('시인' 전문.)를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 시집을 읽지 않았지만 <시인세계> 2003년 여름호에 실렸던 진이정의 시를 읽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미루다 읽은 그의 시집에서 이웃분이 좋아한다는 시 중 한 개를 올려보았다. 나도 이 시가 참으로 좋다. 요즘은 활동이 없는 이웃분이지만 여전히 시 안에서 살고 계시지 않을까 싶다.  
 어젯밤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와도 여전하다. 아침부터 시집을 펴들었다. 배가 고프다. 詩가 고프다. 읽으면 읽을수록 그렇다.그리움 때문에 허기를 느낀다('엘 살롱 드 멕시코' 중에서.)는 시인처럼 나도 무언가 그리운 것이 시 안에 있어서 허기가 채워지지 않는 것일까.  

 예전에 재즈와 詩를 동시에 좋아하는 이웃도 있었다. 오래전이고 그사이 블로그도 몇 번 바뀌면서 서로 연락이 끊어졌지만 그는 늘 말했다. 재즈 음악을 들려주면서…. 시란 우리의 생활 속에 가득하다고. 빗방울이, 나뭇가지가 우리에게 말을 걸듯 그렇게 말이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이면 수많은 시어가 그의 귓가를 간질여서 행복해 하고 있을지도….  

 귀를 쫑긋 세워도 내게는 빗소리조차 아득하게 들려올 뿐이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가만가만 귀 기울이며 그렇게 하루를 맞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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