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벽 세계사 시인선 141
장석주 지음 / 세계사 / 2007년 12월
평점 :
절판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만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른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인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마라.

- 장석주 시집 <절벽>에서 81쪽-82쪽. '명자나무' 전문. 

 올봄에 만난 시집. 그때만 해도 나는 올해에는 시집을 폭넓게 많이 읽겠노라고 다짐했었다. 그러나 결국 올해가 끝나가는 지금 헤아려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밖에 읽지 않았다. 이렇게 반성하고 내년이 되면 또 잊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벌써부터 쓴웃음을 짓는다. 

 자연을 이루는 풍경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시인의 이야기에 기울였던 때를 더듬으며 그때 기억에 남는 시들 몇 편 가운데 '명자나무'를 올려본다.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에도(불구하고) 가끔 그러고 싶다. 오늘처럼 쓸쓸히 걸어본 날은 더욱 그렇다. 사람들을 만나고 즐겁게 웃고 돌아서서는 산다는 게 꽈배기에 설탕을 묻혀서 먹고 안 먹고의 차이처럼 가소로움을 느낀다. 우울의 근본에는 무엇이 들어앉았나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오래도 아니고 몇 초 만에 생각해 낸 사실은 낭만의 실종이었다. '우울해.' '뭐가? 왜?' '낭만이 없어.''….'

 따지고 보면 낭만이 실종되었다고 해도 찾으려 하면 지나가는 할머니의 종이박스에도, 휴대폰으로 엄마에게 막말하는 남학생에게도, 누군가를 기다리는 그 누군가의 발아래에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난 잠시 망각을 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잃어버린 것일까. 어둠이 점령한 거실에 촛불 두어 개를 밝히니 소리친다. 푸드득- 촛불이 공간으로 날아오르려는 듯 소리쳤지만 무시한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책장을 쳐다보니 <절벽> 시집이 빠끔히 나를 내려다본다. 오늘은 이 시집을 잡아야겠구나. 봄에 열심히 읽고는 손에서 놓았던 시집을, 명자나무를 만난다. 엄마 친구의 이름과 비슷한 어찌 보면 친근한 이름인 명자나무를 읽으며 달의 뒤편을 파헤치고 싶어진다. 

 소중한 지인이 선물한 <새벽 예찬>이란 책이 있다. 봄부터 읽으려고 책상에 올려두고는 손으로 쓰다듬기만을 몇백 번 하고 읽지 못했다. 준비가 되지 않아서였다. 역시 저자는 장석주였다. 원래 이 시인은 새벽 일찍 시를 쓴다고 알려졌는데 그런 책을 게으름으로 가득 찬 내가 책장을 넘길 수 없었다. 도저히! 아, 별의별 핑계를 다 댄다. 어찌 된 것이 이놈의 성격은 CD 음반을 사고도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고 3, 4년을 묵히고 뜯지 않기도 하니 말이다. 아무튼, 이래저래 헛소리만 늘어놓았는데 결론은 이렇다. 시 좀 읽자고…. 

 이 시집에는 시만큼이나 재미있는 시인의 산문 <단상들>을 빼고 넘어갈 수 없다. 짤막한 글에서 만족을 느끼고 동감을 표하며 한마디만 더 적는다.

27.

 보르헤스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라는 존재가 정말로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읽은 모든 작가들이 바로 나이며, 내가 만난 모든 사람들이, 내가 사랑한 모든 여인들이 바로 나다. 또 나는 내가 갔던 모든 도시이기도 하며 내 모든 조상이기도 하다."

 - 장석주 시집 <절벽>에서 134쪽. '단상들' 중에서.

 고로 내가 읽은 이 시집도 나이기도 해서 그래서 오늘을 이 시집에 바치기로 한다. 꽝꽝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