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옹 창비시선 279
정호승 지음 / 창비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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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출간된 정호승 시인의 <포옹>은 겨울이 오는 길목의 내게 많은 위안을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책상에 올려두고 책장으로 가지 못하는 책 중 한 권이 되어버렸다. 처음 이 시인의 시를 읽었을 때부터 어둠 속에서 희망을 이야기하는 감수성 가득한 느낌을 잊을 수 없었다. 살면서 때때로 생각나는 시였기에 언제부터인가 가슴 한켠에 콕 박혀있음을 알아버렸다.게다가 정호승은 대중에게도 친숙하며 그 누구에게 선물해도 늘 좋다는 말을 들은 시인이었다. 그의 시는 참으로 따뜻하다. 단지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끝끝내 고통을 감수해낸 후 보답을 받을 때의 그런 따스함을 지녔다. 그러던 그의 시가 이번에는 더 현실적으로 와 닿는다. 

 
살얼음 낀 겨울 논바닥에
기러기 한 마리

떨어져 죽어 있는 것은
하늘에
빈틈이 있기 때문이다

(10쪽, 빈틈 전문.)


 처음 시작부터 책장 넘기는 일을 주저했다. 그가 말하는 빈틈 때문이었다. 그저 무심하게 지나친 어느 순간의 기억과 맞물려 당시의 쓸쓸함, 죽음, 자연 등이 스친다. 결국, 당시에 하던 생각을 되풀이하며 이제는 당사자 혹은 대상에게는 죽음이거나 끝이지만 자연이나 관찰자에게는 어느 날의 장면이거나 순간임을 대놓고 비교해 본다. 그래서 무언가 결론을 얻었을까. 그렇지 않다. 나 역시도 시인이 무엇을 표현하고자 하는지 이해하려기 보다 내가 생각했던 것을 미약하게나마 정의해 보려 시도한다. 이렇게 인상적인 첫 시부터 온통 마음을 사로잡는 시가 많았다.

  어쩌면 이리도 시마다 마음을 흔들고 돌아보게 하는지. 자연, 부모님, 늙음, 죽음, 대상에 이입된 감정, 절제, 현실…. 시인은 마술사처럼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눈앞에서 꺼내 보여준다. 그것도 펑- 펑-. 늘 보던 거였는데도 지루함 없이 인식하게 되어버리는 것은 그가 필시 무슨 조화를 부리나 보다라 생각한다. 결혼준비 때부터 그리고 아팠을 때까지 두 계절을 거의 책과 담쌓았었다. 그러다 가을을 맞고 겨울이 오던 때에 그의 시가 나를 다시 시의 세계, 언어의 세계로 데려다 주었다.  

 포옹을 빨리 말하면 퐁ㅡ이란 말이 된다. 그리고 또 퐁ㅡ은 눈이 내리거나 눈물이 날 때의 펑ㅡ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생각과 감정의 꼬리가 이어져 포옹이란 끌어안는다는 말밖에 모르던 내가, 삶을 다 포옹하기 버겁던 내가 조금씩 현실을 돌아보았다. 소설처럼 어쩌면 그보다 더 현실적이고 따뜻한 이 시집은 또한 멋 부리지 않아서 그만큼 살갑다. 학창시절 때 번역된 외국 시에 심취했을 때와 사뭇 다른 감정이다. 자연의 위대함을 숭배하기보다 아주 사소하고 작은 것들, 바닥에 있는 모든 것들을 들춰내는 정호승의 이야기를 듣는데, 중독된 거 같다. 
 

밤의 연못에 비친 아파트 창 너머로
한 소년이 방바닥에 앉아 혼자 라면을 끓여먹고 있다
나는 그 소년하고 같이 저녁을 먹기 위해
나도 라면을 들고 천천히 밤의 연못 속으로 걸어들어간다

(17쪽, 밤의 연못 일부.)


 
누군가에게 구워진다는 것은 따끈따끈해진다는 것이다
따끈따끈해진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맛있어진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누구에게 맛있어본 적이 없었던 청년이
다 익은 군고구마를 꺼내 젓가락으로 쿡 한번 찔러보는 것은
사랑에서 기다림이 얼마나 성실하게 잘 익었는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30-31쪽. 군고구마 굽는 청년 일부.)


 
내 사랑에 묻어 있는 죄의 흙을 제대로 씻기 위해서는
죄의 몸끼리 서로 아프게 부딪히게 해야 한다
흙 묻은 감자처럼
서로의 죄에 묻은 흙을 깨끗하게 씻어주기 위해서는

(46쪽. 감자를 씻으며 일부.)

 

 마음에 담아 두고 꺼내기 어려웠던 말, 겸연쩍었던 말, 표현하지 않았던 말들이 물 위로 자꾸만 떠올랐다. 그래서 소중한 시집이다. 시인의 나이 듦과 숙성이 내게 좋은 보약이 되었다. 올해가 가기 전에 더 많은 시집을 읽어야겠다고 한해의 마지막 달에 문득 깨달았다. 오늘은 양변기를 끌어안고 앉아 세수나 시켜줘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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