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질녘에 아픈 사람 민음의 시 120
신현림 지음 / 민음사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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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아무것도 아니었지
순식간에 불타는 장작이 되고
네 몸은 흰 연기로 흩어지리라

나도 아무것도 아니었지
일회용 건전지 버려지듯 쉽게 버려지고
마음만 지상에 남아 돌멩이로 구르리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도 괜찮아
옷에서 떨어지는 단추라도 괜찮고
아파트 풀밭에 피어난 도라지라도 괜찮지

나는 아무것도 아닌 것의 힘을 알아
그 얇은 한지의 아름다움을
그 가는 거미줄의 힘을
그 가벼운 눈물의 무거움을

아무것도 아닌 것의 의미를 찾아가면
아무것도 아닌 슬픔이 더 깊은 의미를 만들고
더 깊게 지상에 뿌리를 박으리라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낄 때
비로소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
무엇이든 다시 시작하리라


「아무것도 아니었지」전문, 본시집 34쪽.





 개구쟁이 소년 같은 표정의 당신이 표지 안쪽에서 나를 쳐다본다. 시인은 어떤 시를 들려줄 건가요?
당신의 시는 요 몇 년 새 현실에서 보낸 삶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문학이나 시적이라고 불리기 보다
자연스레 삶의 일부로 녹아든 모습이었다. 그래서 편안하나 또한 그래서 특별하지 않은 느낌.

 툭 하고 터놓는 듯하더니만 기대만큼은 아니었다는 것. 그러나 그 점이 당신의 매력이 될 수 있을 거라
고 강하게 확신한 나는 당신에게 툴툴거렸지요.
분명히 그러는 데는 어떤 이유가 있겠지요?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원했기에 약간 목이 말랐답니다. 그래서 물을 벌컥거렸죠. 당신의 다른 시집을 읽으면 상
황은 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을 쉬이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대학원에서 순수사진을 전공한 당신답게 시집에는 흑백의 사진들도 실려있더군요. 간간이 보이는 사진
들 또한 특별함보다 평범하여 돌출되지 않았죠. 좋아요. 시보다 사진이 튀면 그건 아니잖아요.
이 시집
에서 내 마음을 끈 것이 무언지 아세요? 싱글 맘 부분에 속한 시들…. 내가 아는 그 누군가가 자꾸만 겹
쳐서 그녀에게 시 한 편을 메일로 들려주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었답니다.
임신한 축복의 시간을
이야기할 때, 싱글 맘으로의 삶을 토로할 때 이 시는 내가 읽는 시가 아니라 당신과 그녀만의 시가 되었
거든요.

 '너로 인해 나이 먹는 게 두렵지 않아… 몸 가득 충전된 에너지를 느껴… 믿을 수 없는 내일을 믿으
며.'
(달콤한 육체 中, 46쪽), '너를 보면 섬이 된단다/너라는 근사한 바다를 헤엄치는 섬.'
(싱글 맘-
엄마는 너를 업고 자전거 탄단다 中, 52쪽)
등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은 싱글 맘이 아니더라도 느낄
수 있는 행복이죠. 그러나 '어미 품속에서 너는 웃지만/까만 네 눈 속에서 나는 울고….'
(싱글 맘-
술 마시고 간다 中, 49쪽)
, '아가야, 엄마는 술이 필요하구나 생존의 회전목마를 돌리느라… 아름다운
밤거리에 몸을 맡기니/사방 천지 술이 내게로 흘러온다.'
(싱글 맘-술이 쏟아지는 샤워기처럼 中,
50~51쪽)
등을 통해 싱글 맘인 당신의 고단한 삶 또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나중에 새아빠 만들
어줄게.'
(싱글 맘-스텝 패밀리를 생각한 아침 中, 56쪽)에서는 현실을 직시하는 담담한 모습도 보여
지더군요. 제가 아는 그녀도 그렇답니다. 시인과 그녀를 교차편집하는 제 머리와 가슴은 왠지 모를 뜨
거움이 북받쳤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당신은 고단해 보이네요.
시는 시인의 마음을 투영하는 창인데 내게 비치는 당신의 모습
에는 왜 치열한 삶의 흔적이 강하지 않았을까요. 그것이 텍스트의 더딘 조합인지 아니면 무딘 내 마음
때문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마도 고뇌의 흔적을 애써 찾고 있었나 싶습니다. 그래야 한다
고 그것이 마음을 공명하는 시가 아니겠느냐는 제 머리에서 나온 생각 때문이죠.


 전문을 옮겨적은 시에서 단추라는 단어가 보였을 때 천양희 시인의 시가 하나 떠올랐습니다. 시집을 덮
으며 보니 마침 천양희 시인의 추천글이 보이더군요. 무언의 진동이 미세하게 느껴졌죠. 그녀의 말처럼
당신의 시에
'여성의 슬픈 등에 꽃을 피운 이 시집.'이란 말에 조금은 공감합니다.「부엌」이란 시
가 떠오르더군요. 그러나 '희망의 폭동.'이라는 말은 인정할 수 없더군요.
그래서 거듭 말하지만 조
금 더 세게 나가시지 그러셨어요. 더 세게- 더 치열하게-

 그렇지만, 이 시집 나쁘진 않았어요. 조금 더 고뇌하신걸 글로 토하시길 빌어요.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
하니까요. 멋도 모르고 속도 모르는 충고 아닌 충고는 다만 아쉬움에서 하는 말이었으니 크게 신경 쓸
필요는 없다는 걸 아셨으면 합니다.
시인과 내게 소중한 그녀의 삶이 더 풍요롭고 밝아지길 기원하면서
이제 그만 끼적임을 멈출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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