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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화가 이중섭과 아이들
강원희 / 예림당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그림이 있다. 따뜻하고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온기가 담긴 이중섭의 그림.
그의 그림에는 사물을 대하는 따뜻한 관심과 가족을 그리는 이의 애절함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림에
반영된 모습이 이중섭 바로 자신이었던 것은 당연하지만 그의 조용하고 나직한 모습은 보는 이를 감동
시킨다. 그림 자체로도 그렇지만 그의 삶을 알게 된다면 더욱 그러리라.
어린 시절 외할머니는 가끔 외손자들에게 사과 한 개씩을 나누어 주었는데 다른 이종 형제들은 받기가
무섭게 먹어치웠으나 그는 손바닥에 얹어 놓고 연필로 사과를 그렸다. 그리고는 혼잣말을 한다.
사과 속에는 한 그루 사과나무가 들어 있지. (23쪽)
나는 이중섭의 그림도 좋지만 인간 이중섭도 좋다. 이런 말을 하는 그를 어찌 미워할 수 있겠는가.
또한, 평양에서 어린 시절에 고구려 고분벽화를 보고 이후 그는 많은 영향을 받았다 전해진다. 거친 소
의 모습 등으로 드러나는 힘찬 모습. 소를 좋아해서 부분적으로 반복해서 그리고는 했다. 무엇이든 관
심이 가면 열심히 그려낸 화가. 그런 노력이 그림을 그리는 이중섭을 만들었다. 그의 그림에 어김없이
들어 가는 사인도 재미있다. 'ㅈ ㅜ ㅇ ㅅ ㅓ ㅂ' 그러나 이는 재미나 간단한 기호가 아니라 그의 긍
지였다. 일본강점기 국어 말살정책 시 소신껏 사용한 것이 계속 이어진 것이다. 거기서 끝나지 않고 노
래도 한국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천성적으로 착한 마음의 소유자이며 자연과 하나인 사람이었다.
그의 사랑 마사코도 빼놓을 수 없는 이야기.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그러나 첫아들이 병
으로 죽자 이에 절망하기보다 낙천적인 성격대로 그는 아들이 길떠날 때 심심하지 않게 길동무하라고
그림을 그린다. 무릉도원을 뜻하는 <도원>이란 작품이다. 또한, 이중섭은 6·25 전쟁으로 남쪽으로 피난
을 가던 때의 기억을 그린 <길 떠나는 가족>조차도 슬픔이 아닌 평화와 행복을 기대하고 담아 정말 밝
은 작품을 탄생시켰다. 또한, 친구 구상이 아플 때는 힘내라고 천도복숭아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그러
나 현실은 힘들었다. 피난오며 북에 어머니를 두고 왔으며, 아내와 아이들은 일본에, 이중섭은 남쪽에
홀로 있었다.
쓸쓸한 그림도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오히려 절망이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고요해진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것은 하나의 대상을 그릴 때 그 사물과 친해지지 않고는 함부로 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없이 관찰한 후에야(친해져야) 그렸다. 그래서 소를 그릴 때는 소도둑으로 몰리고 닭을 그릴
때는 닭의 이가 옮은 사람이다.
그러나 삶은 쓸쓸했고 단 하나의 희망이던 전시회는 모두 실패했다. 전시회를 성공적으로 치러야 일본
으로 가서 가족과 만날 수 있었다. 경제력 없이 홀로 외떨어져 생활하는 것은 그에게 참혹했다. 정확하
게 말하자면 그림은 인정받았으나 어려운 시절이라 돈이 회수되지 않았던 것이다. 곧 세상에 실망한 이
중섭은 자학을 하기 시작하고 피가 나도록 손을 문지르던 그를 사람들은 정신병자라 불렀다. 그러자 그
는 정신병자가 아님을 알리고자 자화상을 실물에 가까운 사진처럼 그렸다. 이중섭의 유일한 초상화다.
가족을 보고 싶은 간절한 염원이 지쳐 그가 마지막까지 그린 작품은 <돌아오지 않는 강>이다. 그 작품
에는 그의 마음이 고스란히 베여 있다. 이후 홀로 병원서 죽었다. 머리맡에는 친구 구상의 <세월>이란
시구와 해와 달, 나무와 초가집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노는 아이들을 그린 그림이 있었다. 그의 나이 40
세였으며 바로 오늘이다. 9월 6일. 그래서 주섬주섬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서평을 쓰다.
천재화가 이중섭. 오늘 하루쯤은 그의 작품을 두고 진품이니 아니니를 따지는 것은 잠시 접어두길 바란
다. 그리고 천재이기 이전에 가족과 함께하고 싶었던 인간 이중섭의 그리움을 가을이 오는 길목에서 느
껴보기 바란다. 이달 말에 있는 추석에는 아마도 그의 작품에서 <달과 까마귀>가 떠오를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