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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한집 ㅣ 범우문고 113
이인로 지음, 이상보 옮김 / 범우사 / 1994년 7월
평점 :
품절
<파한집>은 장거리 버스여행 시 애용하던 책 가운데 하나이다. 그야말로 제목처럼 한가로움을
깨기 위한 책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가볍고 산뜻한 예쁜 책은 아니며 오히려 생각을 부르는 책
인 동시에 이인로가 뛰어난 문장가임을 새삼 느끼게 한다.
그래서 늘 마주할 때면 나의 한계를 느낀다고나 할까. 한 번에 읽기보다 조각조각 나눠 읽는 책으로 그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발견하기 원했으나 한결같다는 사실은 책을 탓하기보다 나를 탓할 일이다. 아직
깊이가 형성되지 않아 새로움을 음미하기에는 모자란 그릇 탓이니 말이다. 그런들 어떠하랴. 명상하듯
쉬엄쉬엄 읽기에 제격이다. 파한집을 펼치고 읽다 어느 날 무르팍을 탁-치며 껄껄거릴 날이 올지도 모
르기에 여전히 책상 가까운 곳에 두고 있다. ㅡ 실은 모시고 있다.
김훈의 <자전거 여행>등 가끔 다른 책에서도 언급되었던 이 책의 가치는 인정하는 부분이므로 많은 이
에게 읽혔으면 좋겠다. 한문이 많고 고전이라 선뜻 손이 가지 않더라도 이인로의 책에서 유일하게 전해
지는 책이며 더구나 고려시대의 문인의 글이자 당시를 알 수 있는 연구자료이다. 희소적인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발문을 쓴 이는 세황인데 이인로의 아들이다.
이인로하면 죽고칠현 즉 해좌칠현으로 유명한데 이들은 자연을 찾아 술과 글로써 보낸 이들이었다. 이
미 역사에서 보면 조정에서 뜻을 다하지 못하고 은둔생활을 하며 시화로 여생을 보낸 사람이 많았다.
그들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은둔자 만으로 기억하기에는 이들의 문학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이런
속에서 꽃핀 문학이 지금도 전해지며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들의 반대 부류인 조정을 좌지우
지한 이들도 있었지만 그들과는 다른 것을 역사에 실어 전해져 오는 것이다.
선인의 풍류 속에는 여유와 혼이 들어 있으며 이인로의 경우는 그의 문장에서 느낄 수 있다. 선인들끼
리 시를 짓고 화답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인상적이며 과히 부러운 부분이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시나 글을 떠나 말조차도 서로 귀담아듣지 않는 경우가 많다. 듣지 않고 말하기만 하니 화답은
커녕 일방적인 외침이란 말이 맞을듯하다. 그러니 이들의 여유가 퍽 부러울 수밖에.
이 책의 구성은 평론 41편과 수필 42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인로는 시인이자 평론가며 수필가로 그의
글을 많이 보고 싶었으나 평론은 다른 이의 시를 전하기에 아쉽기도 했으나 고려시대 때도 비평가가 있
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만큼 문학이 발전해온 것이라 판단된다. 또한, 평론도 글이기에 그만의 글
맛이 느껴진다. 문장의 가치는 신분이나 빈부귀천이 좌우할 수 없다는 그의 말처럼 이 시대는 그만큼
많은 이들이 글을 쓴다. 그러나 얼마나 진정성을 갖고 임하는지는 한 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은둔하며 그 속에서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글을 쓴 자체가 바로 파한(破閑)이 아닐까 한다. 파한집의
유명구절이나 글은 많지만 그의 수필 하나를 끝으로 적어본다.
내가 8, 9세 때 한 늙은 선비를 따라 글을 배웠다. 한번은 고인(古人)의 경구(警句)를 가르쳐주었는데
"꽃은 난간 앞에서 웃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고, 새는 수풀 아래서 우나 눈물을 보기 어렵도다"
라 한 것이다. 내가 말하기를 "이것은 결국 '버들이 문 밖에서 찡그리나 뜻은 알 수 없다'한 것처
럼 사(詞)가 대단히 적절하고 어의(語意)가 교묘하지 못하다"고 하니 늙은 선비가 깜짝 놀랐다.
(파한집·하-28, 134-135쪽)
* 이인로(1152-1220)
: 고려 무신집정기 때의 문인. 본관은 경원, 호는 쌍명재.
어려서 고아가 되어 요일(친중이며 중)밑에서 유교 전적과 재가백가서를 두르 섭렵.
정중부의 난을 기화로 불교에 귀의했으나 다시 환속하며 6경을 공부하고 문과에 장원급제 후 14년간
사국와 한림원에 재직함. 그의 저서로는 <<은대집>>, <<쌍명재집>>, <<파한집>> 등이 있으나
<<파한집>>만 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