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목 박완서 소설전집 10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2년 7월
평점 :
품절


박완서 작가의 데뷔작인 『 나목 』은 6·25 전쟁에 관한 이야기의 출발이며 자신에 관한 이야기의
출발이라 생각된다. 이후 그녀의 여러 작품에서도 전쟁은 되풀이된다. 그뿐 아니라 PX에서 근무한
이야기와 박수근 화가의 이야기를 빗댄 이야기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도 어김없다. 그래서 가끔은
작가에게 있어서 전쟁과 가족사는 풀어도 풀어도 끝없는 실타래일지도 모르기에 지속적으로 살아숨
쉬는 것이 아닐까라고 여겨진다.

전쟁은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간다. 주인공 경은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초반의 싱그러운 여자이
다. 그러나 불안한 시대에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한참 꽃이 피는 나이지만 온통 회색빛으로
둘러싸인 경도 피해갈 수 없는 공간에서 살아간다. 집 일부가 날아갔고 거기서 오빠들은 죽었고 그로인
해 어머니는 삶의 의미를 잃었다. 내가 살아가는 지금은 이 땅에서 전쟁은 없지만 보이지 않는 전쟁은
아직도 끝이 없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암울한 회색빛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경은 아직 성장하고 있었기에 온몸으로 성장통을 앓고 있었다. 유일한 가족인 어머니는 그녀를 향해
웃음 한번 주지 않고 자신만의 상처에 빠져있었고 경은 방황하고 목적 없는 몰두와 간절한 그 무언가를
갈망하며 허우적거렸다. 나 또한 20대 초반에 정체성을 찾고자 부단히도 허우적거리며 까닭 없는 외로
움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경처럼 어떤 일인가 일어나길 바라면서 동시에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여겼다. 물론 나는 경처럼 확고하게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는 못한 것 같았다. 그래서 그만큼
많이 깨지기도 했지만.


그놈도 자신을 역겨워하고 있는 눈치였어. 그래서 그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 게야.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태엽만 틀면 그 시시한 율동을 안할 수 없고… 한없이 권태로운 반복, 우리하고 같잖아.

[172쪽, 화가 옥희도의 말.]



내면의 혼란과 어딘가 비어 있는 상태를 간직한 사람들은 한눈에 서로 알아보는 것일까.
경과 옥희도는 서로에게 끌렸으며 기꺼이 상대의 탈출구가 되었다. 그러나 구원까지는 해줄 수 없었다.
경에게는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 옥희도에게는 화가로 살고자 하는 예술적 소망이 더 강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계를 쉽게 사랑이라고 단정 지을 수가 없는 이유다. 하나의 끌림이 반드시 사람관
계에 있어서 사랑이라는 것 하나로 정의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사랑보다는 미치도록 몰두할 그
무엇이 절실했다. 경은 오빠들의 죽음이 자신 때문이라는 죄책감을 억누르며 살았고 자신을 보지 않는
엄마에게 작은 관심을 받기를 원했다. 현실이 고달플수록 그것을 잊어버릴 달콤한 알약이 필요하다. 누
군가가 절망의 나락에서 건져주거나 새롭게 태어나게 해주길 원하는 것이다. 그것은 근원적인 외로움
까지 벗겨줄 희망이었다. 경은 친절하지만 때로는 심술도 부린다. 그러나 자신을 버리지 않고 끝까지
지켜가는 모습에서 덤덤하지만 강한 모습을 보았다.

제목이 나목(裸木)인 이유는 넘어가는 책의 두께가 줄어들수록 알게 된다.
눈앞에 닥친 현실의 어려움이 고목처럼 소름끼치게 두려워도 지나고 나면 여유 있게 웃으며 말할 수 있
듯 경의 눈에도 고목은 나목으로 다시 보인다. 이것이 삶의 신비로움일지도 모르겠다.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에서 봄을 기다리듯 나목(잎이 지고 가지만 앙상히 남은 나무)을 보며 또 한 번 주어지는 봄을 감사
하고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려 본다. 불어오는 봄바람처럼 나긋하게 흘러가는 작가의 문장력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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