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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현기영 작가의 성장소설인 『지상에 숟가락 하나』는 정말이지 책을 읽으면서 오랜만
에 소리 내어 웃게 한 장본인이다.
앞으로 힘차게 나아가는 것에 치중하여 살던 내 삶에 잠시 쉬라고 말해주는 듯하다. 지나간 과거를 돌
아보는 시간 또한 소중하다는 것을 왜 가끔 잊어버리는 것일까. 작가의 잊혀진 유년을 만나고자 쓴 책
에서 더불어 나의 유년도 살며시 꺼내보았다. 물론 작가와 나는 세대 차가 있기에 내가 경험하지 못한
시대상을 간접적으로 느끼는 즐거움도 선물 받았다.
제주도의 풍경과 어우러져 커 나간 작가의 모습은 잔잔한 감동을 주었다. 내게 제주도는 그저 수학여행
으로 다녀와 본 것이 전부였다. 그리고 일본TV에 제주도에 관한 내용이 자주 반영되는 것을 보고 역시
자랑스러운 제주도라고만 생각했다. 이질적인 제주도 말을 들으면 도대체 어떤 말인지 몰라 궁금해하
던 내게 작가의 제주도와 만나고 나자 친숙한 느낌마저 든다. 이렇듯 내게도 자신의 유년시절과 제주도
를 나눠 눈 책이라 책장을 덮고 나도 기분이 좋다. 제주도의 사투리도 구수한 누룽지처럼 느껴진다.
어머니만이 나를 키운 것은 아니다. 내 동무들도 내 성장을 도왔고, 동무들과 함께 뛰놀던 대지 또한
내 성장의 요람이었다. 나는 어머니의 부속물이면서 동시에 아이들 무리 속의 일부였고 대자연 속의
한 분자였다. ㅡ 82쪽
정말이지 제주도의 다채로운 풍경만큼이나 풍요한 유년시절 이야기가 샘솟듯 흘러나오는데 거기에는
좋은 추억만이 아닌 슬픔과 고뇌가 함께여서 감동적이다. 제주도 4.3이야기는 나 같은 육지인은 잘 모
르거나 알더라도 관심에서 비켜가는데 그래서인지 묻혀진 아픈 역사의 한 가닥이 서글펐다. 시대의 참
상을 바로 알아야 현재를 제대로 보고 미래도 예측할 터. 그런 부분을 읽을 때는 마음을 다잡고 경건하
게 임했다. 또 작가는 너무도 생생하게 묘사하기에 내가 겪은듯한 몽롱함을 주었다. 물론 그중에는 너
무도 생경한 것도 있었지만 입가에 미소를 머금게 해서 마음마저 밝아지게 했다.
삶이란 두려움의 대상을 하나하나 극복해 나가는 것. ㅡ 167쪽
소리 내 웃은 부분은 바로 맥베스를 연극하는 부분이었다. 바로 전에 읽은 책이『맥베스』였기에 친
근감까지 들었다. 누구라도 이 부분을 읽는다면 웃지 않을 수 없을 거 같다. 사람이 태어나서 살아가는
일은 참으로 많은 것을 겪으며 터득해가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힘들던 일이 아니 바로 얼마 전의 일
도 지나고 나면 괜찮아지듯 말이다. 물론 시간의 흐름이 지니는 장점일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숙이
라고도 부르지만.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고 하지 않는가.
아버지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버지를 닮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며 작가는 유년시절의 여행을 끝
맺는다. 그리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마지막 구절의 모습에서 작가이기 이전에 성숙한 인간에게서 느껴
지는 참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아직도 익어가는 길에 서 있는 내게 숙연함을 주었다.
죽음이 궁극적으로 나를 자연으로 데려다 줄 것이다. 이렇게 귀향연습을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중략)
..저 바다 앞에 서면,궁극적으로 내가 실패했음을 자인할 수밖에 없다. 내가 떠난 곳이 변경이 아니라
세계의 중심이라고 저 바다는 일깨워준다. 나는 한시적이고, 저 바다는 영원한 것이므로 그리하여 나는
그 영원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위해 모태로 돌아가는 순환의 도정에 있는 것이다. ㅡ 37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