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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유럽의 근대는 이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성은 당시 유럽사람들에게 중세의 어둠을 밝혀준 빛이자 유럽이 안고 있는 온갖 병을 치유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성은 중세의 종교와 같은 신화가 되었다. 특히 유럽인들은 문명을 이성이 인류에게 제공해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문명은 인간들의 삶을 높여주었으며,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만의 상태는 불행한 것이라 믿었다. 그랬기에 1,2차대전의 발발은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만병통치약이 오히려 병을 불러온 꼴이었으니. 특히 2차대전의 발발은 이성의 신화를 무너트릴 정도의 충격을 가져왔다. 이성을 지닌 근대인들이 정치적 절차를 통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야만의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이성은 약이 아니라 새로운 병균체였다. 사람들은 이성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해체주의, 계보학 등 이성에 내재한 새로운 병을 밝히는 학문이 속속 등장했다. 점차 사람들은 이성이 우리에게 빛과 약을 제공함과 동시에 어둠과 새로운 질병을 가져다줬음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에 내재한 비합리성을 끄집어 냈으며, 이성의 신화는 그렇게 조금씩 붕괴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에게 우려를 나타냈다. '이성이 우리에게 새로운 병을 가져다 준 것은 맞지만, 우리가 지니고 있던 많은 병을 치유해 준 것 역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구더기를 잡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우듯, 이성에 내재한 문제점을 고치다가 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예전에 <나비와전사>를 읽고 블로그에 썼듯, 이성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비이성에 대한 예찬으로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계적 이성에 사로잡힌 사람을 비판한다고 해서 야만적 감성을 옹호할 수는 없다. 칼 포퍼 역시 "내가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논할 때는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수와 오류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통해, 그리고 나아가 자기비판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에 내재한 문제점을 밝혀내는 것 역시 이성이며, 이성의 효용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의미일게다.
<혁명을 팝니다> 역시 이런 우려를 나타낸다. 저자들은 문명과 이성을 공격하는 반문명주의자들을 비판한다.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명주의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문명 속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당한다고 꼬집으며, 이성이나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을 무시하고 무조건 문명과 이성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이성에 내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이성 자체를 폐기하는 행동은 기계가 일자리를 앗아갔다며 기계 자체를 폐기하려고 했던 '러다이트 운동'의 재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혁명을 팝니다> 저자들의 눈에 반문명운동은 궤도를 이탈한 통제 불능의 움직임으로 비친듯 하다. 실제로 이들은 수많은 사례와 영화, TV 등 대중문화의 창을 통해 논리적으로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이 된 급진 니체주의자들을 비판한다. 특히 반문명운동과 자본주의 사이에 일치하는 속성을 들며, 반문명주의자들의 자기모순을 비판하는 부분은 날카로운 지적이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문화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기존의 가치와 다른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들은 팝송을 거부하고 얼터너티브 음악을 들으며, 기존의 음악평론을 거부하는 비비스앤버트헤드를 선호한다. 문명에 순응하는 가치가 아닌, 유럽의 보헤미안적 가치를 추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자본주의 정신은 이러한 보헤미안적 가치와 정확히 일치한다. 항상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추구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에게 필요한 것은 순응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이다. 너바나의 노래와 비비스앤버트헤드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품이 된 것은 이들이 자본주의 제도에 포섭됐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 반문화의 속성에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혁명을 팝니다>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면이다. 또한 이들은 순응과 준수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분별하거나 낡은 관습들에 반기를 드는 저항 행위와 합법적인 사회규범을 위반하는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불찬성'과 '일탈'을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104))
하지만 이성을 공격하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이성 자체의 의의를 무시했듯이, <혁명을 팝니다>역시 지나치게 반문명주의자들을 비판하여 반문화운동 자체의 의의를 짓밟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이 책에서 쉽게 논리적인 오류나 극단적인 주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화의 의도치 않은 결과를 기준으로 반문화 자체를 비판한다. 이런 이유로 반문화가 애초에 지니고 있던 생각자체를 폄하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반문화주의자들은 문명의 보수성을 비판하기 위해 펑크족처럼 옷을 입고 저항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차차 옅어지고 펑크족처럼 입는 것 자체가 '반란자'라는 새로운 동경의 기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이비반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애초에 저항하기 위해 한 반문화행동들이 사이비반문화행동들을 나았다는 이유로 반문화를 비판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애초의 반문화행동과 사이비반문화행동을 하나로 묶어 비판한다. 이런 식이다. A가 지나치게 순응을 강요하는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귀를 뚫었다.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B도 귀를 뚫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C는 그저 귀를 뚫으면 저항자같아 보여서, 그게 멋있어서 귀를 뚫는 행위에 동참한다. 귀를 뚫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A,B의 행동과 C의 행동은 하나로 묶일 수 없다. 물론 의도와 결과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난제가 있지만, 소수의 생각없는 행위를 근거로 초기의 의미있는 행위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반문화 운동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반문화운동의 의식까지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다.
또한 반문화운동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시적으로 해결하진 못했다.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화의 이런 특성을 들어 반문화를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문제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미술 사조 중 다다는 기존의 미술을 파괴하며 어떠한 새로운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찢어진 종이를 캔버스에 붙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다다의 움직임이 결국 초현실주의를 비롯, 추상화 등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다. 반문화는 이런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반문화 역시 구체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화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오류도 보여준다. 이런 부분에서 난 <혁명을 팝니다>가 단순히 반문화가 보여주는 운동의 방식을 비판한다기 보다는 반문화 자체를 비판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복을 옹호하며 그들은 말한다. 교복을 폐지하면 사람들은 남보다 한 수 앞서고 싶은 유혹과 뒤처지지 않으려는 욕망이 크기에 소비주의가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창조해내어 상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인한 것이다. 교복은 단순히 그 속성을 차단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냥 넘어간 채 애꿎은 교복에게 소비주의를 자극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쳐보인다. 다시 말해 교복을 입게 하여 소비주의를 억제하는 것은 미봉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문명주의자들이 반소비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획일적인 문화를 제공하는 대가로 소비주의를 억제하는 것은 어째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얻는 불평등한 거래같아 보인다.
사실 난 극단적인 주장을 싫어한다. 하나의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는 것 자체가 싫다. 이세상에 착하기만 한 사람도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듯, 이 세상의 현상도 그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항상 균형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극단적인 반이성운동, 반문화운동을 비판하는 <혁명을팝니다>는 그 의도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논쟁적인 이슈임에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단정한다거나(광고는 소비자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극단적 주장, 인터넷의 문제점만 부각하여 자신의 논리로 끌어들이는 태도-웹2.0을 읽어보시지), 반문화의 방식에 딴지를 걸며 반문화 전체를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 등을 통해서 어째 이 책은 지나치게 오른쪽으로로 기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고종석씨는 복거일의 <죽은자를 위한 변호>를 읽고 '이 책이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변호'인 것만 같고, 살아 있는 자들가운데서도 특히 '힘센 자들을 위한 변호'인 것만 같다' 고 이야기했다. 내가 <혁명을 팝니다>를 읽고 느낀 점도 마찬가지다. 어째 그들의 주장이 자본주의, 즉 아직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가치에 대한 지나친 옹호같다는 느낌이 든다. 반문화운동의 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은 반문화운동 자체를 위해서도 정말 바람직하다. 하지만 반문화운동이 갖고 있는 의의는 좀 더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 말로 이 책이 옹호하는 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