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최재천 지음 / 궁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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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면 사랑한다’는 말이 참 좋았다. 사실 모든 역사적 만행은 무지에서 비롯되었다. 인종차별 역시 유색인종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서 시작되었으며, 동성연애자 차별 역시 동성연애자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에서 유래했다. 최근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가 에이즈에 대한 편견을 깨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 에이즈환자에 대한 부정적 인식 역시 그 근저에는 무지가 자리 잡고 있다. 실제로 무지는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내가 모르는 무언가에 대해 인간은 불안감을 느끼게 되고 그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 자연스레 방어적 공격을 가한다. 할리우드 영화에도 외계인이나 이방인(Alien)은 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제국주의의 횡포도 사실 상대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했다. 조셉콘라드의 <암흑의 핵심>에도 이방인을 묘사하는 제국주의적 시선이 잘 나타난다. 제국주의자들이 갖고 있는 불안, 그리고 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한 일말의 이해가 없는 상황에서 자연스레 제국주의자들은 자신의 방식대로 아프리카 원주민을 다룬다.


그래서 그 문구 한 마디(알면 사랑한다)에 바로 최재천 교수의 <인간과 동물>을 샀다. 게다가 동물 이야기는 누구나 좋아한다. SBS의 <동물 농장>이나 KBS의 <환경스페셜>이 항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만 봐도 사람들이 일단 동물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어른들은 <동물의 왕국>에 나오는 약육강식의 세계를 보며 ‘동물 세계는 징그럽게 우리 삶이랑 닮아있어’ 라고 하며 흥미롭게 시청한다. 이 때 어른들을 동물의 세계에 끌어들이는 힘은 동물세계와 인간 세계와의 유사성이다.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어머, 어떻게 저렇게 행동할 수 있지’ 라고 놀라며 동물의 행동에 빠져들기도 한다. 우리와 다른 무엇이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이다. 나 역시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그동안 동물 이야기를 좋아했다. 하지만 이때의 관심은 철저히 대상화된 동물을 향한 그것이다. 나와 다른 곳에서 사는 생물에 대한 피상적 관심이 동물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는 의미다. 내가 갖고 있는 관심은 18세기 백인들이 유색인종에게 보인 관심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이런 이유로 좀 더 알고 싶었다. <퀴즈탐험 신비의 세계>에 나오는 내용 보다는 좀 더 깊고 자세한 동물들의 정보를 얻고 싶었다.


동물들의 행동은 크게 태어날 때부터 알고 있는 본능적 부분과 경험으로 학습하게 되는 후천적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고 한다. 여기서 내가 특히 관심을 가진 부분은 후천적 부분이다. 사실 동물에 대한 편견도 동물은 오직 본능에 기초해 행동한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동물이 지닌 학습능력이 가장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예를 들어 호박벌을 먹고 침에 쏘여 크게 당한 두꺼비는 다시는 그 비슷하게 생긴 곤충을 건드리지 않는다. 경험을 통해 ‘호박벌=고통’ 이란 공식을 터득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푸른 어치 역시 제왕나비 애벌레를 먹다가 제왕나비 애벌래에서 나온 해당강심제(심장을 멎게 하는 화학물질)에 호되게 당한다. 이후 푸른 어치는 제왕나비 애벌레와 비슷하게 생긴 벌레 근처에도 가지 않는다. 동물도 경험을 통해 학습한다는 좋은 사례다. 지능이 높은 침팬지의 행동에는 동물도 학습한다는 사실이 잘 나타나있다. 예를 들어 침팬지는 열쇠와 자물통을 주면 수많은 시도 끝에 적합한 열쇠로 자물통을 연다. 미로를 하는 경우에도 침팬지는 무턱대고 덤비기 보다 미로를 충분히 살핀다고 한다. 침팬지와 인간의 DNA가 99%나 같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는 순간이다.


이외에도 책 속에는 그동안 알지 못했던 동물들의 행동습관이 세밀하게 분석되어 있다. 이 분야의 1인자답게 저자는 다양한 사례를 이용해 깊이 있는 내용을 쉽게 풀어내고 있다. 즉 쉽게 읽히면서도 내용의 깊이는 전공서적 못지않다는 의미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얻은 가장 큰 성과는 이런 쉽게 풀어쓴 깊이 있는 내용이 아니다. 오히려 책을 읽고 동물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는 점, 그리고 기회가 되면 책에 있는 내용을 영상으로 표현해보고자 하는 욕심 등이 생겼다는 사실이다. 알면 사랑한다는 그의 명제를 다시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동물 행동학 분야의 아버지라 할 수 있는 다윈의 이야기를 끝으로 동물에 대한 내 애정의 근거를 밝히고자 한다. “다윈주의는 한 마디로 개체를 중요시하는 이론입니다. 이전 사상들에게서는 전체가 중요했고, 목표가 뚜렷한 전체를 위해서 개체의 희생은 불가피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다윈에게 중요한 것은 하나하나 따로따로 숨쉬는 개체, 그리고 개체의 번식을 통한 형질의 계승이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변이를 통해 변화가 일어나며, 이것은 다시 각각의 개체를 이전의 개체들과 다르게 만듭니다. 이렇게 각기 다른 것이 우리의 본질이며, 그 다양성이야말로 아름다운 것이라고 다윈은 주장했습니다. 플라톤 본질주의와는 전혀 딴판이죠.” 동물에게 관심을 가져야 할 가장 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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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
정철진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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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술자리에서 80년대에 대학을 다닌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우리 때는 돈이나 돈 버는 것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인식이 많았어. 돈 많으면 뭐하냐 그런 거였지. 그래서 회사 와서도 월급 조금씩 저축만 하고 그랬어. 대출이란 건 죄악으로 생각했었고. 반면에 결혼하면서 집을 갖고 시작한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 친구랑 지금 나랑 너무나 큰 차이가 나. 난 아무 것도 모르고 저축만 하면서 이제 겨우 집을 얻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후회되더라고. 그 때 조금만 신경 썼더라면 그 친구랑 나랑 그렇게 차이는 안 날 텐데. 너도 혹 나 같은 생각 갖고 있으면 고쳐라. 돈이 좋은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 삶에서 배제할 수는 없어.” 프롬의 비물질적 삶을 동경하던 대학생에게 선배의 말은 술자리에서 들은 무수한 말 중 하나로 남아 다른 쪽 귀로 유유자적 흘러나갔다.


하지만 막상 처음 돈을 벌게 되니까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실제로 쓰고 남은 월급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궁금해졌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저축 왕에게 상장을 주고 했던 것으로 봐서는 일단 아껴 쓰고 저축해야 하는 것 같은데, 산술적으로 요즘 같은 시대에 저축만 한다면 어느 세월에 집 한 채 장만하겠나. 게다가 결혼과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봉착하면서, 누군가 내게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월급 관리 방법을 알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답을 구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서점에 가면 널린 것이 ‘부자 만들어 주는 책’ 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망설여졌다. 틈만 나면 우리 사회가 사람들에게 부자 되는 것이 인생의 유일한 목표라고 강요하는 것 같았고, 그런 책들이 강요의 선봉에 서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자아빠, 가난한 아빠>부류의 책을 보면, 우리를 경제 동물로 격하시키는 사회적 현상으로 판단하여 맹렬히 비판하곤 했다. 근데 그런 내가 ‘부자 만들어 주는 책’을 사야 한다니. 사실 부자가 되고 싶은 건 아녔다. 다만 이제 나도 독립을 해야 하는 나이인데, 기초적인 경제 상식 정도는 알아야 하는 건 아닐까 싶었다. 은행 업무, 세금 납부, 연말 정산 등등 내 밖에 있는 어른들의 세계를 나도 이제 조금은 알아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전략적인 공부가 무식하고 우직하게 하는 공부를 능가하는 시대에 나도 좀 더 전략적인 월급 사용법이 필요했다.


일단 ‘100억을 벌게 해주겠다.’느니 ‘5-6개월에 부자가 되게 해주겠다.’는 식의 책은 싫었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내가 읽는 유일한 실용서적은 운동서적이다. 그 책들 중에서도 난 ‘10분만 운동해서 몸짱을 만들어주겠다’느니 ‘아주 단 기간에 늘씬한 몸매 만들기 비법을 알려주겠다’는 식의 책은 절대 사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6개월에 10kg 빼는 방법’ 같은 책들이 덜 자극적이어도 신뢰도는 높았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책이 이미 베스트셀러가 된 <대한민국 20대, 재테크에 미쳐라>이다. 사실 자극적인 제목이 불편했다. 20대에 미칠 일은 재테크 말고도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재테크는 미칠 필요가 없는, 보조적 지식에 머물러야 한다고 지금도 믿는다. 하지만 책은 내게 돈을 버는 방법보다 모으는 방법을 알려주려 했다. 저자의 핵심도 짧은 시간 내에 돈을 벌어야 한다가 아니라 가급적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돈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재테크에 미치지 않아도 적절히 내 월급을 어떻게 사용해야 할런지는 알려줄 것 같았다.


실용서적을 읽는 방법은 간단하다. 위에서도 얘기했듯, 운동관련 서적을 사면 일단 내가 필요로 하는 부분, 그리고 내가 정말 궁금해 했던 부분을 선별적으로 읽는다. 내가 이미 알고 있다거나, 나랑은 조금 무관한 내용 등은 읽지 않는다. 그래도 전체적 내용을 이해하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이 책의 강점은 여기에 있다. 정보가 체계적으로 담겨 있어, 내가 필요한 내용만 골라 읽을 수 있었다. (주식 투자 부분 같이 돈을 버는 방법에 대해선 넘어갔다.) 또한 정보 자체가 매우 구체적이어서, 바로 따라 할 수 있었다. ‘은행수수료를 아껴라’, ‘개인 재무제표를 만들어라’ ‘주식저축을 해라’ ‘보통예금통장을 버리고 통장을 쪼개라’ ‘보험과 주택청약통장에 관한 설명’ ‘세테크는 이렇게 해라’ 등 필요한 핵심만 간단하게 설명은 한다. 그리고 ‘나라면 주택 청약을 들고 보험은 종신 보험 하나 외에는 안 들겠다’는 식으로 추천도 해준다. 마지막 챕터에서는 실제로 20대가 재테크 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다시 말해, 내가 월 100만 원 이하를 투자한다면 어떻게 투자를 해야 하는지, 3,000만원을 모았다면 이후엔 어떤 방법으로 돈을 모을 것인지 등에 대해 당장 우리가 따라 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해준다. 물론 가끔 술, 담배를 끊어라, 연애도 늦게 해라식의 평범하고 어려운 충고를 하는 등, 지나치게 내 사적 영역까지 침범하여 잔소리를 하는 면도 없지 않지만.

신영복 선생의 글 중 ‘무항산무항심’이 있다.
‘한결같은 마음을 가질 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을 뒷받침해주는 물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한다.’는 것은 옳은 말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항산(恒産)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항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심을 갖기가 어려운 오늘의 현실입니다. 얼마만큼의 소유가 항산이 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항산이 항심을 지켜주지 못하는가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후략)

재테크라고 해서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중용이다. 책의 제목처럼 우리가 재테크에 미쳐서는 안 된다. (생각해보라. 모든 젊은이들이 재테크에만 열을 올리는 사회를.) 오히려 보조적으로, 필요한 정도에 맞춰 기초적인 재테크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다. 미치려고 하기 보다는, 좀 더 거리를 두어 필요한 정보만 얻어간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읽었으면 하는 것이 개인적인 내 생각이다. 20대 독자들이 이 책의 알맹이만 빼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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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처럼 - 신영복 서화 에세이
신영복 글.그림, 이승혁.장지숙 엮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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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교수가 예전, 이정우, 홍윤기 교수의 들뢰즈 논쟁을 두고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철학이란 철학적 문헌을 다루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사유하고 사유를 삶으로 만드는 것임을 보여준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훌륭한 이론과 개념에 대해 말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혹은 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지식이나 사유를 삶에서 분리된 것으로, 고상하고 그저 지적인 것으로 분리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이나 사상을 무력화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당시 이 부분을 읽고 흠칫 놀랐었습니다. 나를 두고 한 말 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나는 종종 사유와 삶의 괴리를 경험한니다. 책을 읽고, 고민하고, 생각을 정리하곤 하지만, 그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합니다. '사람은 삶의 준말입니다. '사람'의 분자와 분모를 약분하면 '삶'이 됩니다. 우리의 삶은 사람과의 관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가장 아픈 상처도 사람이 남기고 가며, 가장 큰 기쁨도 사람으로부터 옵니다.'란 신영복 선생의 말을 혼자 곱씹고,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를 읽고 '사람을 위한 정의만이 진정한 정의'란 결론을 내리면서도, 실제로 우리 주변의 어려운 이웃에게 작은 도움 한 번 준 적이 없습니다. 신영복 선생의 글 중 이런 글이 있습니다. '인생의 가장 먼 여행은 머리에서 가슴까지의 여행이라고 합니다. 냉철한 머리보다 따뜻한 가슴이 그만큼 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가장 먼 여행이 있습니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입니다. 발은 실천입니다. 현장이며 숲입니다.' 선생의 말을 빌리자면 난 아직 생각이 마음으로도 온전히 내려오지 못한 상태입니다. 발까지 내려오려면 한 참 남은 것이고요. 나는 책 속에 들어있는 화석화된 형태로 지식을 받아들였습니다다. 피부가 세상과 마찰할 때, 몸으로 전달되는 살아있는 지식은 내게 별반 없습니다. 이런 이유가 발로 향하는 사유의 여행을 더디게 하는 것이고, 지식과 사유를 삶에서 분리시킨 것이라 생각합니다.


신영복 선생님의 <처음처럼>을 읽고 육중한 돌을 가슴에 내려 찧은 듯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내가 그동안 고민하던 생각들이 얼마나 뜬 구름 속에 머무르고 있는지를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생각은 인간에 대한 진실한 사랑, 그리고 감옥에서 겪은 육체적 고통이 어우러지며 탄생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진실함이, 사랑이, 지식인의 비판적 사고와 실천이 들어있습니다. 특히 '세상에 남이란 없습니다. 네 이웃 보기를 네 몸 같이 하라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근대사는 타자화의 역사입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보지 못하고, 인간을 타자화하고 자연을 대상화해온 역사입니다.'라는 글에서 알 수 있듯, 선생의 모든 사고는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선생의 글이 뜬 구름 위가 아닌, 딱딱한 땅 아래 머무를 수 있는 이유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은 인간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실천의 형태로 나타납니다. 관계가 중요하기에 저마다 잘난 나무가 되기 보다는 모두가 함께 어우러진 숲이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진정 나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이며, 우리 사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이상향인 것이죠. 평등은 자유의 최고치란 글에도 그런 생각이 잘 나타나있습니다. ''평등이 자유의 최고치'라는 메시지는 삶의 근본을 되돌아보게 하는 성찰의 언어입니다. 생각하면 이것은 '타인의 행복'을 자신의 '행복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평범한 양식에 다름 아닌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평등은 자유의 최고치일 뿐만 아닐 자유 그 자체의 실체이며 내용입니다. 자유는 양적 접근으로서는 결코 도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긍정과 사랑에서 출발하기에 선생의 생각은 설득력 있게 우리 가슴에 파고듭니다. 우리 사회를 부유하는 무수한 정의의 담론들 속에는 없는 인간에 대한 사랑이 있기에, 선생은 진정한 정의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동시에 당신이 감옥에서 겪은 어려움을 정신적 발전의 단계로 승화시키려는 노력, 진정한 지식인이 갖춰야 할 태도 등이 <처음 처럼>에 담겨있습니다. 특히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선생의 생각들은 죽어있는 책 속의 지식을 통해 생긴 것이 아닌, 자신이 육체가 겪고 사유한 내용에서 기인합니다. 아마 이 점이 신영복 선생의 글 <처음처럼>이 지닌 가장 강한 힘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내가 책을 읽고 육중한 돌에 가슴을 맞은 듯한 느낌을 받은 이유는, 죽어있는 지식 속에 살고 있던 사이비 지식인의 생각들이 생생한 활어처럼 펄떡이는 사고의 역동성을 마주하면서 생긴 부끄러움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난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됩니다. 시작과 함께 <처음처럼>을 만난 것은 나름 행운입니다. 내 가슴 속에 아로 새겨, 일 할 때 마다 항상 되새기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처음 시작을 하는 내게 <처음처럼>에 담긴 글들은 성서의 말씀처럼 무겁고 신중하게 다가옵니다. '사상은 실천됨으로써 완성되는 것입니다. 생활 소에서 실천된 만큼의 사상만이 자기 것이며, 그 나머지는 아무리 강론하고 공감하더라도 결코 자기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하물며 지붕에서 날리는 종이비행기가 그의 사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종이비행기), '올바른 인식은 솨학적 분석이나 많은 정보가 아니라 대상과 필자가 맺는 '관계'로부터 옵니다. 애정의 젖줄로 연결되거나 운명의 핏줄로 연결됨이 없이 대상을 관찰하는 관계는 '관계 없는' 것과 같습니다.'(인식과 관계), '사다리보다 너의 돼지 등이 좋다.'(돼지등)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 함께 비를 맞지 않는 위로는 따뜻하지 않습니다. 위로는 위로를 받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위로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입니다.' (함께 맞는 비), 히말라야의 높은 산에 살고 있는 코끼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자기가 평지에 살고 있는 코끼리보다 크다는 착각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합니다.' (히말라야의 토끼가 주의해야 할 일)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오늘 한 내 생각들을 항상 유지해야 하는 일일겁니다. 앞으로 가슴 속에 새긴 말들을 일터에서 실천할 수 있는, '인간을 위한'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게 해달라고 오늘도, 내일도 기도하겠습니다.

"처음으로 하늘을 만나는 어린 새처럼,
처음으로 땅을 밟는 새싹처럼
우리는 하루가 저무는 겨울 저녁에도
마치 아침처럼, 새봄처럼, 처음처럼
언제나 새날을 시작하고 있다."
산다는 것은 수많은 처음을 만들어가는 끊임없는 시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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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 District 9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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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9>은 SF를 표방한 사회 비판적인 영화다. 영화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이기적인 개인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의 폭력과 부조리를 고발한다. 영화의 배경 자체가 뉴욕이나 파리가 아닌 요하네스버그란 사실에서부터, <디스트릭트9>이 작정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의 타겟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요하네스버그에선 흑백 차별이 극에 달했었고, '디스트릭트6'란 지역을 설정해 흑인들을 몰아낸 경험이 있다. <디스트릭트9>의 감독 브롬캠프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과거 남아공에서 발생했던 차별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현대 사회에서도 외모, 성별, 인종, 계급 차별 등 차별이 더욱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외계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판은 미국과 남아공에 존재했던 극단적인 차별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디스트릭트9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빈곤하게 살아가는 외계인의 모습은 필리핀 쓰레기 섬에 사는 빈민층을 연상시킨다. 외계인을 강제 이주 시키는 모습과 그 정책에 폭력적으로 반발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냉혹한 정책과 팔레스타인들의 폭력적인 테러 장면과 오버랩된다. <디스트릭트9>은 남아공이라는 고거의 차별적 공간에서 SF라는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의 비판 칼날이 핵심적으로 조준하고 있는 곳은 MNU로 대변되는 다국적기업과 군산복합체이자, 자본주의의 냉혹함이다. 더 많은 수익 앞에서 장인과 사위라는 개인적인 관계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주인공을 한 순간에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언론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복종하는 충실한 종이다. 이익 앞에서 진실과 생명은 한낱 먼지와 다를 바 없다. 외계인을 살해하며, '이렇게 쉽게 돈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너희의 죽음은 곧 나의 기쁨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라고 외치는 용병 대장의 모습은 이러한 현실을 명확히 대변해준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두 축을 중심으로 진보하는 현대 사회. 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워 더욱 노골적이고 악랄해진 음모를 위장한다. 시스템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 속에 사는 개인의 삶은 더욱 윤택해지는 듯 보이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로서의 권리는 늘어나는 정치/자본 권력 앞에 작아지고 있다. 19,20세기는 폭력이 지배했다면, 21세기는 교묘한 시스템이 지배한다. <디스트릭트9>은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차별을 일상화하고, 자본주의를 통해 효율 앞에 생명과 자연의 가치가 묵사발되는 모습을 매우 직접적인 은유를 통해 보여준다.


특히 예상치못한 변이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외계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세포를 얻게 되자, 다국적기업은 주저 없이 살아있는 그의 장기를 적출하고 세포를 추출하고자 한다. 이는 박형서의 단편중 '두유 전쟁'' 이라는 기가 막히게 웃긴 소설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주인공의 머리에서 유전이 발견 되면서, 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세계가 전쟁을 벌인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엄청난 양의 기름을 지닌 천혜의 자원일뿐, 더 이상 개인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인간이 아니다. 소설은 주인공을 소유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탐욕을 조롱한다. <디스트릭트9>역시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을 통해 회사의 이익 앞에서 개인의 생명이 얼마나 보잘 것 없어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한 발 더 물러서서 소설과 영화를 바라보면, 머리에서 기름이 나는 주인공이나 외계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이 겪는 비극은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의 눈에 비친 인간 역시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기계일 뿐이다. 회사는 그의 기능을 최대한 뽑아내면 된다. 그의 노동력이 바닥나면 미련 없이 제거한다. 해고가 개인의 생존권을 위협한다해도 상관없다. 회사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회사는 그저 자본주의의 룰을 따랐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효율성 뒤에 냉혹한 얼굴을 숨기고 있다. 때문에 최근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다.


주인공 비커스 베르바는 <디스트릭트9>이 그린 암울한 현대 사회에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사는 현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악하지 않다. 가족을 사랑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는 필부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 퇴거 정책을 주도하면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외계인을 폭력적으로 다룬다. 2차 대전 당시 어떠한 죄책감 없이 유태인을 학살했던 아이히만에게서 발견된 악의 평범함이 떠오른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친절하게 악을 설명하는 비커스의 모습은 차별과 폭력의 구조 아래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현대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분명 권력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해 차별과 효율성을 앞세운 폭력을 일상화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차별과 폭력의 문제점을 배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현대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발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일상화됐기 때문일까. 부르디외는 자본주의 속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해지면서, 현대인은 먹고 사는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이는 곧 시스템의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으로 발현됐다고 주장했다. 보드리야르는 시스템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악의 모습이 예전처럼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분명한 건, 고민 없이 사는 현대인은 주인공 비커스처럼 <디스트릭트9>이 그린 현대사회의 폐부를 결코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현대 사회의 차별과 폭력의 중심에 놓이기 전에는 말이다.


<디스트릭트9>은 SF의 형식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리얼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외계 우주선이 도시 상공에 떠오른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허구적이기 때문에 <디스트릭트9>이 제기하고자 하는 사실적인 문제 자체를 픽션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스트릭트9>은 <블레어 위치>나 <클로버필드>가 보여줬던 모큐멘터리 형식을 취한다. 뉴스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외계인의 등장을 전하며, 외계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현실의 차별과 폭력으로 재현한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정신없는 화면은 <클로버필드>가 보여준 현기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은 모큐멘터리 형식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클로버필드>와 달리 현명하게 모큐멘터리와 전형적인 영화의 형식을 넘나든다. 형식의 엄격함을 포기하면서 영화의 오락성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중반부는 잠시 모큐멘터리의 형식을 버린다. 하지만 두 형식의 넘나듦이 영화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수준은 아니다. 모큐멘터리 형식을 초반에 내세워 관객들에게 ‘이건 현실입니다’라고 주입시켰기 때문에, 중반부의 영화 형식을 보면서도 관객은 ‘이건 현실입니다’라는 주문에 빠진 채 집중한다. 게다가 중반부의 촬영 방식도 <라이언일병구하기>처럼 카메라에 피가 튀는 등의 사실적인 방식을 버리는 건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만큼 사회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예술 장르는 드물다. 물론 사회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높은 몰입도를 바탕으로 관객이 사회의 문제점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차별과 폭력의 문제는 결코 머리로 받아들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사실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는 영화는 지나치게 교훈적인, 가끔은 관객을 계몽시키려는 작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은 충분한 오락성에 적절한 비유로 그러한 불편함을 말끔히 씻었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았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디스트릭트9>은 내가 최근에 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효과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은 최고의 오락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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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팝니다 - "체 게바라는 왜 스타벅스 속으로 들어갔을까?"
조지프 히스.앤드류 포터 지음, 윤미경 옮김 / 마티 / 2006년 4월
평점 :
절판


유럽의 근대는 이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이성은 당시 유럽사람들에게 중세의 어둠을 밝혀준 빛이자 유럽이 안고 있는 온갖 병을 치유해줄 수 있는 만병통치약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성은 중세의 종교와 같은 신화가 되었다. 특히 유럽인들은 문명을 이성이 인류에게 제공해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문명은 인간들의 삶을 높여주었으며, 문명의 혜택을 받지 못한 야만의 상태는 불행한 것이라 믿었다. 그랬기에 1,2차대전의 발발은 그들에게 충격적이었다. 만병통치약이 오히려 병을 불러온 꼴이었으니.  특히 2차대전의 발발은 이성의 신화를 무너트릴 정도의 충격을 가져왔다. 이성을 지닌 근대인들이 정치적 절차를 통해 유대인을 대량 학살하는 야만의 행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이제 이성은 약이 아니라 새로운 병균체였다. 사람들은 이성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실존주의, 해체주의, 계보학 등 이성에 내재한 새로운 병을 밝히는 학문이 속속 등장했다. 점차 사람들은 이성이 우리에게 빛과 약을 제공함과 동시에 어둠과 새로운 질병을 가져다줬음을 알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이성에 내재한 비합리성을 끄집어 냈으며, 이성의 신화는 그렇게 조금씩 붕괴되었다.


하지만 일부에선  이성의 신화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에게 우려를 나타냈다. '이성이 우리에게 새로운 병을 가져다 준 것은 맞지만, 우리가 지니고 있던 많은 병을 치유해 준 것 역시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이었다.  이들은 구더기를 잡다가 초가삼간을 다 태우듯, 이성에 내재한 문제점을 고치다가 이성 자체를 부정하는 상황에 빠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 역시 예전에 <나비와전사>를 읽고 블로그에 썼듯, 이성에 대한 비판이 지나치게 비이성에 대한 예찬으로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기계적 이성에 사로잡힌 사람을 비판한다고 해서 야만적 감성을 옹호할 수는 없다. 칼 포퍼 역시 "내가 이성이나 합리주의를 논할 때는 오직,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수와 오류에 대한 타인의 비판을 통해, 그리고 나아가 자기비판을 통해 학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성에 내재한 문제점을 밝혀내는 것 역시 이성이며, 이성의 효용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다는 의미일게다. 
 

<혁명을 팝니다> 역시 이런 우려를 나타낸다. 저자들은 문명과 이성을 공격하는 반문명주의자들을 비판한다.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명주의자들의 주장이 오히려 문명 속에서 상업적으로 이용당한다고 꼬집으며, 이성이나 제도로 고칠 수 있는 부분을 무시하고 무조건 문명과 이성을 부정적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이성에 내재한 문제점을 고치기 위해 이성 자체를 폐기하는 행동은 기계가 일자리를 앗아갔다며 기계 자체를 폐기하려고 했던 '러다이트 운동'의 재현이라고 보는 것이다. <혁명을 팝니다> 저자들의 눈에 반문명운동은 궤도를 이탈한 통제 불능의 움직임으로 비친듯 하다. 실제로 이들은 수많은 사례와 영화, TV 등 대중문화의 창을 통해 논리적으로 디오니소스적 야만인이 된 급진 니체주의자들을 비판한다. 특히 반문명운동과 자본주의 사이에 일치하는 속성을 들며, 반문명주의자들의 자기모순을 비판하는 부분은 날카로운 지적이다. 논리는 다음과 같다. 문화에 순응하지 않는 자들은 기존의 가치와 다른 새로운 것을 끊임없이 추구한다. 그들은 팝송을 거부하고 얼터너티브 음악을 들으며, 기존의 음악평론을 거부하는 비비스앤버트헤드를 선호한다. 문명에 순응하는 가치가 아닌, 유럽의 보헤미안적 가치를 추구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날 자본주의 정신은 이러한 보헤미안적 가치와 정확히 일치한다. 항상 끊임없이 새로운 상품을 추구하는 오늘날 자본주의에게 필요한 것은 순응이 아니라 창조이기 때문이다. 너바나의 노래와 비비스앤버트헤드가  자본주의의 새로운 상품이 된 것은 이들이 자본주의 제도에 포섭됐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 반문화의 속성에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대로 들어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혁명을 팝니다>가 보여주는 날카로운 면이다. 또한 이들은 순응과 준수를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무분별하거나 낡은 관습들에 반기를 드는 저항 행위와 합법적인 사회규범을 위반하는 행위를 구별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불찬성'과 '일탈'을 구별해야 한다는 뜻이다. (104)) 

 하지만 이성을 공격하던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움직임이 지나치게 극단적인 모습을 보여 이성 자체의 의의를 무시했듯이, <혁명을 팝니다>역시 지나치게 반문명주의자들을 비판하여 반문화운동 자체의 의의를 짓밟는 느낌이 든다.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이 책에서 쉽게 논리적인 오류나 극단적인 주장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단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화의 의도치 않은 결과를 기준으로 반문화 자체를 비판한다. 이런 이유로 반문화가 애초에 지니고 있던 생각자체를 폄하하는 문제를 드러낸다. 예를 들어 반문화주의자들은 문명의 보수성을 비판하기 위해 펑크족처럼 옷을 입고 저항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이 차차 옅어지고 펑크족처럼 입는 것 자체가 '반란자'라는 새로운 동경의 기준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사이비반문화가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애초에 저항하기 위해 한 반문화행동들이 사이비반문화행동들을 나았다는 이유로 반문화를 비판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애초의 반문화행동과 사이비반문화행동을 하나로 묶어 비판한다. 이런 식이다. A가 지나치게 순응을 강요하는 체제에 저항하기 위해 귀를 뚫었다. 이런 생각에 동조하는 B도 귀를 뚫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C는 그저 귀를 뚫으면 저항자같아 보여서, 그게 멋있어서 귀를 뚫는 행위에 동참한다. 귀를 뚫는다는 결과는 같지만 A,B의 행동과 C의 행동은 하나로 묶일 수 없다. 물론 의도와 결과를 구별하기 어렵다는 난제가 있지만, 소수의 생각없는 행위를 근거로 초기의 의미있는 행위자체를 폄하할 수는 없다. 더 나아가 반문화 운동의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반문화운동의 의식까지 싸잡아 비판할 수는 없다.  


또한 반문화운동이 우리 사회의 문제를 가시적으로 해결하진 못했다.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화의 이런 특성을 들어 반문화를 비판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엔 문제의식을 갖게 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일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20세기 미술 사조 중 다다는 기존의 미술을 파괴하며 어떠한 새로운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그저 찢어진 종이를 캔버스에 붙이는 식이었다. 하지만 다다의 움직임이 결국 초현실주의를 비롯, 추상화 등에 일정부분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했지만 그 대안이 나올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 것이다. 반문화는 이런 점에서 의의가 있다. 반문화 역시 구체적인 해결책은 제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현재의 상황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함께 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을 팝니다>는 반문화를 비판하는 과정에서  논리적 오류도 보여준다. 이런 부분에서 난 <혁명을 팝니다>가 단순히 반문화가 보여주는 운동의 방식을 비판한다기 보다는 반문화 자체를 비판한다는 인상을 받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교복을 옹호하며 그들은 말한다. 교복을 폐지하면 사람들은 남보다 한 수 앞서고 싶은 유혹과 뒤처지지 않으려는 욕망이 크기에 소비주의가 더욱 극성을 부릴 것이라고. 하지만 이는 인간의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창조해내어 상품을 판매하는 자본주의의 속성으로 인한 것이다. 교복은 단순히 그 속성을 차단하는 하나의 수단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냥 넘어간 채 애꿎은 교복에게 소비주의를 자극한다고 비난하는 것은 지나쳐보인다. 다시 말해 교복을 입게 하여 소비주의를 억제하는 것은 미봉책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문명주의자들이 반소비주의 운동을 하는 것이다. 획일적인 문화를 제공하는 대가로 소비주의를 억제하는 것은 어째 너무 많은 것을 내주고 얻는 불평등한 거래같아 보인다.     

 

사실 난 극단적인 주장을 싫어한다. 하나의 움직임이 대세를 이루는 것 자체가 싫다. 이세상에 착하기만 한 사람도 나쁘기만 한 사람도 없듯, 이 세상의 현상도 그러할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항상 균형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사물과 현상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진보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극단적인 반이성운동, 반문화운동을 비판하는 <혁명을팝니다>는 그 의도만으로도 가치가 있는 책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논쟁적인 이슈임에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단정한다거나(광고는 소비자에게 별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고 단정하는 극단적 주장, 인터넷의 문제점만 부각하여 자신의 논리로 끌어들이는 태도-웹2.0을 읽어보시지), 반문화의 방식에 딴지를 걸며 반문화 전체를 강하게 비판하는 태도 등을 통해서 어째 이 책은 지나치게 오른쪽으로로 기운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고종석씨는 복거일의 <죽은자를 위한 변호>를 읽고 '이 책이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변호'인 것만 같고, 살아 있는 자들가운데서도 특히 '힘센 자들을 위한 변호'인 것만 같다' 고 이야기했다. 내가 <혁명을 팝니다>를 읽고 느낀 점도 마찬가지다. 어째 그들의 주장이 자본주의, 즉 아직까지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주류가치에 대한 지나친 옹호같다는 느낌이 든다. 반문화운동의 방식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것은 반문화운동 자체를 위해서도 정말 바람직하다. 하지만 반문화운동이 갖고 있는 의의는 좀 더 부각시켜야 하지 않을까. 그것이야 말로 이 책이 옹호하는 자본주의의 건강한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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