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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스트릭트 9 - District 9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디스트릭트9>은 SF를 표방한 사회 비판적인 영화다. 영화는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탐욕과 이기심, 그리고 이기적인 개인이 만들어낸 사회 시스템의 폭력과 부조리를 고발한다. 영화의 배경 자체가 뉴욕이나 파리가 아닌 요하네스버그란 사실에서부터, <디스트릭트9>이 작정하고 현대 자본주의 사회를 비판의 타겟으로 설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요하네스버그에선 흑백 차별이 극에 달했었고, '디스트릭트6'란 지역을 설정해 흑인들을 몰아낸 경험이 있다. <디스트릭트9>의 감독 브롬캠프는 시간이 많이 흘렀지만 과거 남아공에서 발생했던 차별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민주주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삼는 현대 사회에서도 외모, 성별, 인종, 계급 차별 등 차별이 더욱 다양해졌기 때문이다. 외계인의 출입을 금지하는 표지판은 미국과 남아공에 존재했던 극단적인 차별 정책을 떠올리게 한다. 디스트릭트9에서 쓰레기를 뒤지며 빈곤하게 살아가는 외계인의 모습은 필리핀 쓰레기 섬에 사는 빈민층을 연상시킨다. 외계인을 강제 이주 시키는 모습과 그 정책에 폭력적으로 반발하는 외계인의 모습은 팔레스타인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의 냉혹한 정책과 팔레스타인들의 폭력적인 테러 장면과 오버랩된다. <디스트릭트9>은 남아공이라는 고거의 차별적 공간에서 SF라는 미래의 이야기를 통해 오늘날의 문제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의 비판 칼날이 핵심적으로 조준하고 있는 곳은 MNU로 대변되는 다국적기업과 군산복합체이자, 자본주의의 냉혹함이다. 더 많은 수익 앞에서 장인과 사위라는 개인적인 관계는 철저하게 무시된다. 주인공을 한 순간에 파렴치범으로 만드는 언론은 기업의 이익을 위해 복종하는 충실한 종이다. 이익 앞에서 진실과 생명은 한낱 먼지와 다를 바 없다. 외계인을 살해하며, '이렇게 쉽게 돈 벌 수 있으니 얼마나 좋아. 너희의 죽음은 곧 나의 기쁨이다'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라고 외치는 용병 대장의 모습은 이러한 현실을 명확히 대변해준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커다란 두 축을 중심으로 진보하는 현대 사회. 하지만 실상은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내세워 더욱 노골적이고 악랄해진 음모를 위장한다. 시스템은 더욱 복잡해진다. 그 속에 사는 개인의 삶은 더욱 윤택해지는 듯 보이지만, 민주주의 사회의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자본주의 사회의 소비자로서의 권리는 늘어나는 정치/자본 권력 앞에 작아지고 있다. 19,20세기는 폭력이 지배했다면, 21세기는 교묘한 시스템이 지배한다. <디스트릭트9>은 민주주의를 내세우면서 차별을 일상화하고, 자본주의를 통해 효율 앞에 생명과 자연의 가치가 묵사발되는 모습을 매우 직접적인 은유를 통해 보여준다.
특히 예상치못한 변이 과정을 통해 주인공이 외계 무기를 사용할 수 있는 세포를 얻게 되자, 다국적기업은 주저 없이 살아있는 그의 장기를 적출하고 세포를 추출하고자 한다. 이는 박형서의 단편중 '두유 전쟁'' 이라는 기가 막히게 웃긴 소설을 연상시킨다. 갑자기 주인공의 머리에서 유전이 발견 되면서, 주인공을 차지하기 위해 세계가 전쟁을 벌인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엄청난 양의 기름을 지닌 천혜의 자원일뿐, 더 이상 개인적인 자아를 갖고 있는 인간이 아니다. 소설은 주인공을 소유하기 위해 세계 각국이 보여주는 비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자본주의의 탐욕을 조롱한다. <디스트릭트9>역시 비슷한 처지의 주인공을 통해 회사의 이익 앞에서 개인의 생명이 얼마나 보잘 것 없어지는지 보여준다. 하지만 한 발 더 물러서서 소설과 영화를 바라보면, 머리에서 기름이 나는 주인공이나 외계 무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주인공이 겪는 비극은 현대인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의 눈에 비친 인간 역시 노동력을 제공해주는 기계일 뿐이다. 회사는 그의 기능을 최대한 뽑아내면 된다. 그의 노동력이 바닥나면 미련 없이 제거한다. 해고가 개인의 생존권을 위협한다해도 상관없다. 회사는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다. 회사는 그저 자본주의의 룰을 따랐을 뿐이다. 자본주의는 효율성 뒤에 냉혹한 얼굴을 숨기고 있다. 때문에 최근엔 '인간의 얼굴을 한 자본주의'를 주장하는 움직임도 늘어나고 있다.
주인공 비커스 베르바는 <디스트릭트9>이 그린 암울한 현대 사회에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사는 현대인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결코 악하지 않다. 가족을 사랑하고, 동료들과 잘 지내는 필부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 퇴거 정책을 주도하면서 아무런 비판 의식 없이 외계인을 폭력적으로 다룬다. 2차 대전 당시 어떠한 죄책감 없이 유태인을 학살했던 아이히만에게서 발견된 악의 평범함이 떠오른다. 카메라를 바라보고 친절하게 악을 설명하는 비커스의 모습은 차별과 폭력의 구조 아래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현대인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분명 권력은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통해 차별과 효율성을 앞세운 폭력을 일상화했다. 우리는 교과서에서 차별과 폭력의 문제점을 배운다. 하지만 그 누구도 현대 사회 시스템의 문제점을 고발하지 않는다. 지나치게 일상화됐기 때문일까. 부르디외는 자본주의 속 경쟁이 지나치게 치열해지면서, 현대인은 먹고 사는 문제에 더욱 집착하게 되고, 이는 곧 시스템의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으로 발현됐다고 주장했다. 보드리야르는 시스템이 더욱 정교해지면서 악의 모습이 예전처럼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간에 분명한 건, 고민 없이 사는 현대인은 주인공 비커스처럼 <디스트릭트9>이 그린 현대사회의 폐부를 결코 바라볼 수 없다는 사실이다. 자신이 현대 사회의 차별과 폭력의 중심에 놓이기 전에는 말이다.
<디스트릭트9>은 SF의 형식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리얼하게 비판한다. 하지만 외계 우주선이 도시 상공에 떠오른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허구적이기 때문에 <디스트릭트9>이 제기하고자 하는 사실적인 문제 자체를 픽션으로 전락시킬 위험이 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디스트릭트9>은 <블레어 위치>나 <클로버필드>가 보여줬던 모큐멘터리 형식을 취한다. 뉴스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외계인의 등장을 전하며, 외계인에 대한 차별과 폭력을 현실의 차별과 폭력으로 재현한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정신없는 화면은 <클로버필드>가 보여준 현기증을 유발한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은 모큐멘터리 형식을 극한으로 밀어붙였던 <클로버필드>와 달리 현명하게 모큐멘터리와 전형적인 영화의 형식을 넘나든다. 형식의 엄격함을 포기하면서 영화의 오락성을 강조했다고 할 수 있는데, 실제로 중반부는 잠시 모큐멘터리의 형식을 버린다. 하지만 두 형식의 넘나듦이 영화의 몰입도를 방해하는 수준은 아니다. 모큐멘터리 형식을 초반에 내세워 관객들에게 ‘이건 현실입니다’라고 주입시켰기 때문에, 중반부의 영화 형식을 보면서도 관객은 ‘이건 현실입니다’라는 주문에 빠진 채 집중한다. 게다가 중반부의 촬영 방식도 <라이언일병구하기>처럼 카메라에 피가 튀는 등의 사실적인 방식을 버리는 건 아니다.
드라마나 영화만큼 사회의 문제점을 명확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 예술 장르는 드물다. 물론 사회의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할 수 있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드라마나 영화는 높은 몰입도를 바탕으로 관객이 사회의 문제점을 느낄 수 있게 만든다. 차별과 폭력의 문제는 결코 머리로 받아들여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오히려 차별과 폭력의 문제를 같이 느낄 수 있어야 해결의 실마리가 풀린다. 사실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는 영화는 지나치게 교훈적인, 가끔은 관객을 계몽시키려는 작품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다. 하지만 <디스트릭트9>은 충분한 오락성에 적절한 비유로 그러한 불편함을 말끔히 씻었다. 재미와 의미라는 두 마리 토끼를 완벽하게 잡았다고나 할까. 그런 점에서 <디스트릭트9>은 내가 최근에 본 어떤 다큐멘터리보다 더 효과적이면서도 정확하게 사회의 문제점을 꼬집은 최고의 오락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