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삼성 관련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 같냐는 질문에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우려를 표현했습니다. “삶에 관성이란 것이 있잖아요. 병폐와 비리를 조금씩 감추고 힘 센 사람일수록 봐주고 하던 삶의 관성을 생각할 때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염려가 많습니다.”


그 순간 신부님의 삶의 관성이란 말이 제 가슴을 둔탁하게 때리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말입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삶의 역사가 축적된 방식대로 어떤 행동이 이뤄진다니요? 그 때 나타난 삶의 관성은 내가 살아온 길이고 방식일 것입니다. 실제로 나이 든 선배들의 행동 중에는 의식하지 못한, 삶의 관성이 만들어낸 행동이 대부분이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삶의 관성이란 말은 사회 초년병인 제가 가볍게 듣고 넘기기에는 크고 무거운 말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2년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벌써 제 삶에 조금씩 삶의 관성이 형성되어 감을 느낍니다. 부모님과 대화하면서도 불필요한 말, 논리에 어긋난 말들이 거슬리기 시작하고, 아내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조급증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입사 전 순수하고 열정적인 생각들이 점차 뜨내기의 순진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비정규직과 88만원세대의 울부짖음이 일의 일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마 2년간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응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그 와중에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저명한 칼럼니스트 정혜신씨가 이웃사촌 전용성씨의 그림을 보고 생각한 것들을 정리한 책,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마음 미술관>. 정혜신씨는 심리 상담의 경험에서 비롯된 방대한 지식과 인문학적 사고를 더해 만들어진 커다란 생각들을 일상의 용어로 쉽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가볍게 보면 한 칼럼니스트의 일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의 진중함은 그 어떤 철학책보다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전 처음으로 책에 포스트잇 플러그를 붙여보았습니다. 가끔 삶의 질주에서 벗어나 읽고 싶은 글 옆에 말이죠.


나를 응시할 기회가 없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가 만든 삶의 관성을 얻을 뻔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혜신씨의 책은 생각 없이 폭주하던 제 삶을 잠시 멈춰 세워준 정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잠시 나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


언젠가 공항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대의 비행기를 본 기자들이 어떤 게 ‘진짜’ 에어포스 원이냐고 물었습니다. 관계자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에어포스 원은 대통령이 타고 있을 때만 에어포스 원이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깜빡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삶의 스펙이 화려해도 그 속에서 나를 놓치면 그건 대통령이 타지 않은, (에어포스 원이 아닌) 각종 첨단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그저 커다란 비행기일 따름입니다. 무늬만 에어포스 원입니다. (진짜 에어포스 원 中)

‘한편’이라는 부사가 소설이나 영상문법에서 세련되게 쓰이는 경우는 드뭅니다…….(중략) 개연성이나 맥락이 휘발되면서 어느 정도의 수준 하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상에서 ‘한편......’이라는 말은 심리적으로 사람을 거침없게 만듭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전에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의 논리적 연결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한편…….中)

변화가 단골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격랑의 시기에 저는 ‘내 세상’을 선물처럼 먼저 속주머니 깊숙이 챙겨 넣습니다. (내 세상 中)



나란 존재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존재 덕분에 규정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를 성찰하기 위해선 내 주변의 것들에 대한 관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 미술관>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외에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정혜신씨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 생각은 ‘실존주의’, ‘해체주의’ 철학 같은 지식이 아닙니다. 단지 제 생각의 연못에 던져진 작은 돌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정혜신씨의 생각을 통해 나도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둘러싼 사람과 세상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재능을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지요. 언어, 수리, 음악, 미술, 체육, 인간 친화, 자연 친화, 자기 성찰. 놀라운 것은 ‘자기 성찰’을 재능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하긴 자기 성찰은 다른 재능들이 정상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 그렇게 본다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파워를 갖춘 강력한 재능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름다움의 힘 中)

저도 꼭 자기성찰이란 강력한 재능을 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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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 미국 복음주의를 모방한 한국 기독교 보수주의, 그 역사와 정치적 욕망
김진호.최형묵.백찬홍 지음 / 평사리 / 2007년 6월
평점 :
품절


얼마 전 종교인의 과세에 대한 방송을 본 적이 있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는 사실이지만 현재 종교인은 납세의 의무를 지키지 않는다. 그들의 특권이 법에 명시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50년 전부터 면세의 전통이 이어지면서 어느 새 관습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이에 대한 시민단체들의 비판이 제기되었고, 이에 가톨릭과 조계종, 그리고 일부 목사가 세금을 납부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많은 대형 교회의 목사들은 세금을 납부하지 않고 있다. 일례로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의 수장인 순복음 교회, 조용기 목사는 한 달에 1억에 가까운 십일조를 내고 있지만 세금은 납부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의 회계는 그 누구에게도 감시받지 않는다. 얼마 전 재경부는 자선단체들의 거짓 영수증 발급을 막기 위해 자선단체 법인화를 시도했다. 다시 말해 이들 단체를 법인화하여 내부 회계의 투명성을 꾀하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재경부는 어이없게도 자선 단체의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단체를 이번 법인화 대상에서 제외 시켰다. 몇 년 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부정 세습이 문제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공식적으로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아마 대선을 앞두고 수많은 종교인들의 표를 날리고 싶지 않은 정부의 속내가 있었을 것이다.

이처럼 교회는 우리 사회에서 음으로 양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세금을 내지 않아도 회계의 투명성에 의심이 제기되도, 아무도 이들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정부도, 국회도, 언론도. 결국 한국의 대형교회는 견제 받지 않는 권력으로 성장해나간다. 부패하는 숙명을 타고난 것이 권력이라는 미국 역사학자, 버나드 베일린의 말을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대형 교회가 보여주는 모습은 분명 정상은 아니란 생각을 할 수 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이런 교회가 보여주는 성격이다. 약자의 편에서, 소외된 사람의 편에 서야할 교회가 언젠가부터 강자의, 기득권층의 이익을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비판받지 않는 기득권의 표상으로 자리 잡은 교회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이에 대해 이런 저런 생각을 할 즈음, 선배를 통해 한 권의 책을 추천 받았다. 교회 내부에서 교회를 혹독하게 비판한 책,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

기독교의 보수성, 그 기원을 찾아 나선 <무례한자들의 크리스마스>들은 집요하게 달려간다. 세 명의 저자 중 첫 번째 저자는 기독교의 과거 행적으로 통해 그들의 보수성을 추적한다. 그리고 저자는 그 시작으로 1907년 평양에서 있었던 대부흥운동을 지적한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대부흥운동을 통해 종교에 경도되었으며, 동시에 혼란스럽던 당시의 한국 사회 상황을 외면하게 된다. 이후 교회는 종교의 비세속성을 강조하며 사회 개혁에 둔감하게 된다.(타계적 복음화; 영혼의 구원이 저 세상에 있음을 강조하여 현실의 문제를 등한시하게 만듦.) 이러한 이들의 전통은 70년대 독재 체제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국가조찬기도회’(대통령을 위해 아침 기도를 드려주는 것, 기도회는 박종철 치사사건이 일어난 기간에도 계속 됨)로 대표되는 70년대 교회는 당시 독재정권을 찬양하며 박정권의 반공, 성장제일주의 이데올로기를 절대적으로 지지하게 된다. 결국 한국 교회의 보수성은 김대중 정권에 들어서 급격하게 나타난 현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두 번째 저자는 기독교가 한국에 유입되는 과정을 통해 교회의 보수성을 찾아나선다. 한국 교회의 산파역할을 했던 미국의 북장로교파. 이들은 미국내에서도 매우 보수적인 종파였다. 60,70년대 자유주의 분위기를 혐오하며 엄격한 교리를 강조했던 제리폴웰, 로버트슨 목사 등이 주축이 됐던 북장로교파는 이후 한국 교회의 선구자들을 키워낸다. 한국 교회의 친미, 반공보수는 결국 이들의 출생 때부터 결정된 것이다.

교회 내부의 비판이었던만큼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가 전하는 메시지는 효과적이다. 또한 비판받지 않는 기득권층을 흔들 수 있는 좋은 시도였다. 한국 대형교회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던만큼이나,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가 후벼파는 강력한 비판에 카타르시스를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들의 강력한 목소리가 안타깝기도 했다. 한국 대형 교회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좀 더 냉정하고 차분해야 한다. 목소리와 주장으로 이들을 비판하기 보다는 데이터와 사실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문제점을 지적해야 한다. 노엄촘스키의 건조한 ‘팩트 나열 비판 방식’ 이 적절하다는 의미다. 현재 구체적인 자료 없이 대형 교회들을 비판하는 시민단체들처럼,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에도 사례와 증거가 주장에 비해 부족하다. 순복음교회와 금란교회가 구체적으로 범한 과오를 나열하지 않은 채 정황과 분석으로 이들을 비판한다면, 기독교도 입장에서 이들의 주장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게 되겠는가? (물론 철저하게 폐쇄적인 대형 교회의 성격을 고려할 때 사실과 데이터를 구한다는게 쉽지 않을 것이다.) 저자가 세 명이다 보니 같은 말이 중언부언 반복된다는 점도 아쉬웠다. (책에 오타도 많고 비문도 눈에 띄었다. 시민단체의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을 바라보는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이들의 시도는 계속되어야 한다. 장외에서 대형 교회를 비판하지 않는 한, 교회는 영원한 성역으로 남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타깝지만 아직 경기장 안에서 이들을 강하게 비판할 수 있는 존재는 없다. 이들의 게릴라식 공격이 현재로서는 유일한 방법이다. 하지만 이들의 시도가 더 반가운 것은 교회 내부의 비판이라는 점. 다시 말해 아직까지는 한국 교회가 흐르지 않는 물로 전락하지는 않았다는 의미다. 비판받지 않는 기득권층에 대한 나의 우려가 <무례한 자들의 크리스마스>를 통해 조금은 줄어든 것 같아서 그래도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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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0 1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대형교회는 성역이 아니라 치욕일 분입니다.
 

 

 #1

“나도 이제 토론식 수업을 시작하겠어. 자. 방금 읽은 부분의 핵심내용을 한 번 요약해보자. 오늘이 17일이니까, 17번아~ 이 문단 핵심 내용을 요약해봐라.”

순간 17번 학생의 표정이 굳어진다. 마치 자신의 20초 뒤 미래를 알아챈 듯하다.

“저기... 그러니까...... 음.............”

“야 뭘 몰라. 방금 읽은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말해보라는데.”

페르마의 정리를 바라보고 있는듯한 표정으로 서있던 17번 학생은 순간 자신의 미약한 독해능력을 알아채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한다.

“................”

숙제를 안 해온 것도 아닌데, 17번 학생은 오늘이 17일이란 이유 때문에, 읽은 책이라고는 취학 전에 읽었던 동화책이 전부였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매를 맞는다. 매를 맞고 난 후, 17번 학생의 얼굴엔 세계 3차 세계 대전 끝에 찾아온 20년 만의 지구 평화가 번져나간다. 자신의 차례는 적어도 끝이 났다는 의미일게다.

“이것도 모르냐. 이러니 내가 어떻게 토론식 수업을 하겠냐. 그럼 27번 일어나서 답해봐라.”

순간 17번 학생을 제외한 모든 학생의 얼굴에 3차 세계 대전의 어두운 먹구름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2

“오늘은 양성평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일단 누가 한 번 이야기해볼래.”

“제가 먼저 얘기할게요. 전 여성에 대해 동료들이 보호해주고 배려해주는건 고맙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너희들은 약하기 때문에 무조건 행정이나 서류업무만 하라고 얘기하는건 일종의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모든 여자들이 정리에 능하고, 서류업무를 꼼꼼히 하는건 아니에요.”

“아니죠. 이건 사실에 기반을 하는거잖아요. 여성들이 남성보다 체력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 그런데 억지로 여성들이 보병이나 포병에 배치를 받는다면 오히려 남성 동료들에게 위협을 줄 수 있어요.”

토론을 시작한지 10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교실은 이내 후끈 달아오른다. 오직 구석에 박혀있는 일군의 무리들만이 ‘침묵은 금이다’ 라는 명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첫 번째 장면은 10여 년전, 소위 강남 8학군에 위치한 고등학교 국어 수업의 모습이다. 고등학교 교육을 어느 정도 이수 받은 학생들이 모여 봉숭아 학당에서나 볼 수 있는 코메디 수업을 연출했다. 반면 두 번째 장면은 미 8군 내 한 소대에서 있었던 양성평등 교육의 한 장면들이다. ‘111 빼기 11’ 이라는 뺄셈도 공책에 써야지만 가까스로 풀던, 낮은 학력의 미군들이 모여 국내 엘리트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토론을 했다. 소위 명문대를 나왔다는 카투사들은 한 쪽에 모여 짧은 영어 때문에 자신은 얘기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장면을 모두 직접 목격한 내게, 이 사실은 나름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2년 뒤, 대학에서 공부를 조금 해본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나라 교육은 학생들에게 ‘공부’ 를 가르쳐준적이 없다는 사실을.


공부를 하는 목적은 나의 인생을 더욱 풍족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위해 하는 공부는 진정한 의미의 공부가 아니다. 공부를 위해선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첫 번째 단계는 ‘호기심’ 이다. ‘우리는 왜 살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무엇일까?’와 같은 호기심이 촉발되어야만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게 된다. 때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정보는 우리의 시신경을 따라 뇌에 저장된다. 문제는 지식이 창고에 쌓이는 재고품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 가끔 이 저장물은 뇌에 강한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창고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단계인 ‘사고’ 가 발생한다. 지식은 우리의 뇌를 자극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때로 우리는 책의 지식에 의심을 품기도 하고, 그 지식을 통해 새로운 나만의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사고의 과정이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에 새로운 나의 생각이 더해져 어지러워진 창고를 정리해야 한다. 물건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는 의미. 이 과정이 마지막 단계인 ‘글쓰기’ 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고를 정리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사고를 공유하기 위해선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 결국 좋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우린 자신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되고 스스로도 그 정보를 안정적으로 창고에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공부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우린 공부를 해본적이 없다. 수동적으로, 맞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거나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했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있을리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을 표현할 일도 없다. 자연스레 첫 번째 장면의 광경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연출된다. 반면 우리가 무식하다고 구박하던 미군들은 달랐다. 설령 지식의 무게나 뇌의 용량(?)은 카투사보다 부족할망정, 자신의 생각을 갖고 표현하는 방식엔 훨씬 익숙했다. 그들은 적어도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어떻게 두 그룹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미숙의 <호모쿵푸스>는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 하며,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참고서다. (이런 것이 진정 참고서다. 동아전과나 디딤돌 핵심정리 문제집이 참고서가 아니다.) 특히 공부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참고서라 할 수 있다.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도 <호모쿵푸스>를 권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교육은 바로 자녀가 진정한 ‘공부’ 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 때문에. 하나 더. 이제 막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지금껏 진정한 공부를 못한 건 자네들 탓이 아니라네. 하지만 대학에 온 지금, 진정한 공부의 세계에 한 번 빠져보지 않겠는가?” 언젠가 고미숙씨가 생각하는 공부의 낙원이 오길 진정으로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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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밑의 경제학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지음, 유주현 옮김 / 이콘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기획. 모든 일의 시작이자 절반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보통 영화에서 기획을 담당하는 파트가 제작이다. 구체적인 세부내용을 잡는 일이 아닌, 작품의 큰 방향을 잡는 작업이다. 동시에 아이디어의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기획력이 좋다면 일단 신선도에서 절반을 잡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기획의 예를 살펴본다면, 얼마 전 6.10항쟁을 들 수 있겠다. 당시 많은 방송들이 6.10항쟁 20주년 기념 방송 제작에 열을 올렸다. 이 때 주목을 끈 것이 한겨레21의 기사였다. 한겨레21은 '현 대선주자들이 1987년 6.10일 무엇을 하고 있었나' 라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줄 수 있는 사건에다가 대선 주자들의 당시 현황을 흥미롭게 배열했던 것이다. 현 대선 국면과 6.10항쟁 20주년이라는 사건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그야말로 튀는 기획이었다.


기획의 관점에서 본다면, <식탁 밑의 경제학>은 식탁 밑이라는 음식 문화를 통해 경제학을 바라본다는 흥미로운 기획에서 시작한다. 즉 기획력에서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 경제학에 관심있는 사람과 음식에 관심있는 사람을 모두 끌어들이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난 이러한 간접적인 설명을 좋아한다. 예전 KBS 다큐 중에도 프리미어리그를 통해 영국의 축구문화와 축구시장을 잠식해가는 신자유주의의 시대 상황을 절묘하게 풀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작품이 좋았던 것도 'FTA는 나쁘고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삶을 앗아간다' 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시사프로그램보다 더 강력하고 잔잔한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기획력이 어렵지만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레 제목만 보고 <식탁밑의 경제학>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일본 경제 관료를 지낸 학자. 이론과 경험이 잘 갖춰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프랑스에서 지낸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 역시 날 끌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금 확인했다. 기획력이 모든 것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우선 내가 이 책의 제목에서 '식탁' 이 아닌 '경제학' 에 방점을 찍었다는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때 부터 책과 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난 사실 식탁이나 세계의 음식문화에 별 관심이 없다. <식탁밑의 경제학>은 경제학 이야기보다는 음식 이야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이유로 이 책에 대한 혹평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식탁밑의 경제학>에서 경제학과 음식문화의 절묘한 조화를 기대하는 사람은 내 혹평에 귀 기울이길. 이 책에서 음식이야기와 경제이야기는 물과 기름같은 존재다. 한 챕터에서는 음식 이야기를, 다른 챕터에서는 경제사에 대한 얘기를 간략하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책이 '왜' 란 질문에 설명을 친절하게 답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00쪽이 안 되는 얇은 책에서 뭘 바라는 거냐' 라며 반박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난 책의 양과 내용의 깊이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은 식의 지배(플랜테이션)를 통해 세계 지배에 성공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여기서 자연스레 의문이 든다. 왜? 왜 영국과 미국만이 이를 이뤄냈을까? 저자는 또 '프랑스와 중국이 다양한 음식문화권의 교차지역이기에 풍부한 음식문화가 생겨났다' 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 단순한 주장은 새로운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국은 왜 안 그렇지? 동양 음식이 서양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 경제력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닌 것인가? 빼어난 음식문화를 자랑하던 아시아(중국)는 어떻게 서양의 음식에 지배당하게 되는가? 책은 답해 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식탁밑의 경제학>은 '간략한 서양사 내용 조금 + 프랑스, 중국, 일본의 음식문화 약간 많이 + 경제학 내용 아주 조금 들어있는 책' 이다.


물론 이 책은 경제학자가 쓴 가볍고 흥미로운 '음식 서적' 이다. 음식에 집중한다면 그렇게 비판받을만한 졸저도 아니다. 실제로 나 역시 '중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일찍부터 음식을 통해 몸을 치료하는 의식동원적 사고방식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의 신선한 기획이 기대를 너무 부풀렸다는 사실 때문에 실망이 더 클 수도 있을게다. 그럼에도 이 책은 기획의 실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신선한 기획의 영화를 망쳐놓는 감독을 우린 여러 번 봐왔다. 이런 점에서 신선한 기획과 실망스런 콘텐트의 실망스런 조합이 주는 불편함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그 불편한 기분을 해소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봤더니... 어쨌든 이제 책 좀 신중하게 가려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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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이치도 (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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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이치도>에 실린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수정씨는 작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늘 새롭고 낯선 이야기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선원형 작가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농부형 작가. 난 여기서 신수정씨가 택한 메타포가 참 좋았다. 선원과 농부라. '선원이 머나먼 세상을 편력하고 돌아와 이국의 낯선 풍물을 호들갑스럽게 전해주는 자라면 농부는 무엇보다도 시시콜콜한 고향의 일상사를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놓는 자이다.'(P.269) 선원형에 속하는 작가로 김탁환이나 김영하를 꼽을 수 있다면, 후자의 대표적 작가로 단연 성석제를 들 수 있다. 평범한 이야기도 그의 입으로 들어가면 팔도강산을 유랑하며 원조랩을 선보인 서수남과 하청일의 신나는 노랫가락으로 변한다. 성석제가 지닌 힘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농부형 작가로 꼽은 신수정씨의 평론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도망자 이치도>도 전형적인 성석제 스타일의 이야기다. 작가 스스로도 '사소한 일들' 이란 챕터를 만들어 놓고 정말 사소한 이야기를 사소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사실 그는 '소설가 다운' 단어를 선택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때문에 소설가 답지 못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인 난 처음 <조동관약전>을 읽고 그닥 웃지 못했다. 그가 뽑아내는 언어의 변화무쌍한 그 면발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내러티브 중심의 이야기구조에 익숙했던 나였기에 <조동관약전>을 읽으며, 한낫 한량에 불과한 인물의 이야기를 어쩌자고 이렇게 긴 썰로 풀어놓은 것일까 의아아 했었다. 습관 때문이었을게다. 영문학을 전공한, 즉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쓰여진 소설을 먼저 접한 나로써는 내러티브 중심으로 소설을 파악하는데 익숙했다. 물론 교수님들은 셰익스피어나 오스틴의 소설을 보며 '여기서 언어유희는 이렇게 이뤄지고 있으며, 이 문단은 패러디를 통한 언어적 웃음을 유발한다'식의 설명하긴 했다. 하지만 공감하지는 못했다. 아, 물론 박민규 소설은 예외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팬클럽>을 통해 이야기가 아닌 문체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리게 웃을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 그럼에도 성석제의 소설은 좀 더 토속적인 인상이 강했으며, 국어시간에 배운 김동리, 채만식류의 정통 소설과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아마 이런 점이 내 웃음을 차단했던 것 같다.


<도망자 이치도>를 통해 성석제의 진면모를 알게 되었다. <도망자 이치도>는 '성석제 소설은 웃기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란 믿음을 되새기며 웃기를 거부하는 내 웃음보를 반강제적으로 터뜨리고 말았다. 정확히 이 부분에서 웃음을 거부한 독자의 마음이 열렸다. "담장 밖으로 가자니, 거기서 길까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미나리꽝 논 둑 백여 미터를 걸어나가야 했다. 게다가 학교 안으로 다시 들어올 때 수위가 "야 담치기 재미있지. 열심히 하면 높이뛰기 선수도 될 수 있어. 소년체전에 나오는 높이뛰기 선수가 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거다. 빨리 가서 또 해라. 응?"하고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었다. 똥통의 너비는 사오 미터에 불과하니 운이 좋아 두세 걸으만 잘 골리 딛는다면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아 이 소설 무지 웃기네'란 무의식이 싹텄고, 사소한 부분도 그냥 웃지 않고 지나칠 수 없었다. 사실 <도망자 이치도>는 불우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성석제가 얘기하는 사소한 일을 겪고(정말 사소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실적인 일들이기에)도둑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성석제는 순전히 문체만으로 광채가 나는 소설 명작으로 바꿔놓았다.


<도망자 이치도>를 보며 또 하나의 문체를 만났다는 사실에 참 반가웠다. 김훈도 특유의 문체가 있다. 그의 문체는 사군자를 벗삼아 우주의 신비한 운행 원리를 탐구하는 조선시대의 유학자를 연상시킨다. 고상하면서도 담백하고 날카롭다. 박민규도 문체가 있다. 박민규의 문체에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폭소의 도가니에 빠트리는 장난꾸러기 중학생이 떠오른다. 재치있으면서도 솔직하다. 김영하도 있다. 그의 문체는 대학에서 실존주의의 부조리에 대해 돈오한 젊은 부르주아 청년을 연상시킨다. 냉소적이면서도 집요한게 웃기다. 그렇다면 성석제는? 중학교 다닐 때 이야기 꽤나 한 청년이 커서도 크게 철은 들지 않아 여전히 장난을 좋아하는 시골 농부가 떠오른다. 이렇게 한 작가의 문체에 사로잡히고 그 작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한국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한다. <도망자 이치도>는 그렇게 내게 성석제의 참 맛을 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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