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김인국 신부를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앞으로 삼성 관련 수사가 어떻게 진행될 것 같냐는 질문에 신부님은 다음과 같은 말로 우려를 표현했습니다. “삶에 관성이란 것이 있잖아요. 병폐와 비리를 조금씩 감추고 힘 센 사람일수록 봐주고 하던 삶의 관성을 생각할 때 수사가 제대로 이루어질까 하는 염려가 많습니다.”


그 순간 신부님의 삶의 관성이란 말이 제 가슴을 둔탁하게 때리더군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참 무서운 말입니다.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 삶의 역사가 축적된 방식대로 어떤 행동이 이뤄진다니요? 그 때 나타난 삶의 관성은 내가 살아온 길이고 방식일 것입니다. 실제로 나이 든 선배들의 행동 중에는 의식하지 못한, 삶의 관성이 만들어낸 행동이 대부분이지 않을까요? 이런 점에서 삶의 관성이란 말은 사회 초년병인 제가 가볍게 듣고 넘기기에는 크고 무거운 말이었습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이제 2년이 되어 갑니다. 하지만 벌써 제 삶에 조금씩 삶의 관성이 형성되어 감을 느낍니다. 부모님과 대화하면서도 불필요한 말, 논리에 어긋난 말들이 거슬리기 시작하고, 아내가 제 말을 이해하지 못했을 경우 조급증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입사 전 순수하고 열정적인 생각들이 점차 뜨내기의 순진함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비정규직과 88만원세대의 울부짖음이 일의 일부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아마 2년간 잠시 멈춰 서서 나 자신을 응시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혼자 생각해 봅니다.


그 와중에 좋은 책을 만났습니다. 정신과 전문의이자 저명한 칼럼니스트 정혜신씨가 이웃사촌 전용성씨의 그림을 보고 생각한 것들을 정리한 책, <정혜신의 그림에세이, 마음 미술관>. 정혜신씨는 심리 상담의 경험에서 비롯된 방대한 지식과 인문학적 사고를 더해 만들어진 커다란 생각들을 일상의 용어로 쉽게 풀어쓰고 있습니다. 가볍게 보면 한 칼럼니스트의 일기처럼 여겨질 수도 있지만,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의 진중함은 그 어떤 철학책보다 무겁게 다가옵니다. 그래서 전 처음으로 책에 포스트잇 플러그를 붙여보았습니다. 가끔 삶의 질주에서 벗어나 읽고 싶은 글 옆에 말이죠.


나를 응시할 기회가 없어서, 저도 모르는 사이에 사회가 만든 삶의 관성을 얻을 뻔 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정혜신씨의 책은 생각 없이 폭주하던 제 삶을 잠시 멈춰 세워준 정류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잠시 나에 대해 생각해보라고 여러 번 이야기 합니다.


언젠가 공항에 나란히 서 있는 두 대의 비행기를 본 기자들이 어떤 게 ‘진짜’ 에어포스 원이냐고 물었습니다. 관계자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에어포스 원은 대통령이 타고 있을 때만 에어포스 원이다”

그렇게 당연한 사실을 깜빡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무리 삶의 스펙이 화려해도 그 속에서 나를 놓치면 그건 대통령이 타지 않은, (에어포스 원이 아닌) 각종 첨단시설이 완벽하게 갖춰진 그저 커다란 비행기일 따름입니다. 무늬만 에어포스 원입니다. (진짜 에어포스 원 中)

‘한편’이라는 부사가 소설이나 영상문법에서 세련되게 쓰이는 경우는 드뭅니다…….(중략) 개연성이나 맥락이 휘발되면서 어느 정도의 수준 하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상에서 ‘한편......’이라는 말은 심리적으로 사람을 거침없게 만듭니다. 일관성이 없는 것과는 조금 다른 차원에서, 이전에 내가 한 말이나 행동의 논리적 연결에 대한 강박으로부터 자유롭게 합니다. (한편…….中)

변화가 단골 화두로 떠오를 수밖에 없는 격랑의 시기에 저는 ‘내 세상’을 선물처럼 먼저 속주머니 깊숙이 챙겨 넣습니다. (내 세상 中)



나란 존재는 나를 둘러싼 수많은 존재 덕분에 규정될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를 성찰하기 위해선 내 주변의 것들에 대한 관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마음 미술관>에는 나 자신에 대한 이야기 외에 나를 보여줄 수 있는 많은 것들에 대한 정혜신씨의 생각이 담겨있습니다. 그 생각은 ‘실존주의’, ‘해체주의’ 철학 같은 지식이 아닙니다. 단지 제 생각의 연못에 던져진 작은 돌과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정혜신씨의 생각을 통해 나도 내 자신을 돌아보고 나를 둘러싼 사람과 세상에 대해 생각을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인간의 재능을 여덟 가지로 분류한다지요. 언어, 수리, 음악, 미술, 체육, 인간 친화, 자연 친화, 자기 성찰. 놀라운 것은 ‘자기 성찰’을 재능으로 본다는 사실입니다. 하긴 자기 성찰은 다른 재능들이 정상 작동하도록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것이기도 하니, 그렇게 본다면 자기 성찰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파워를 갖춘 강력한 재능임에 틀림없습니다. (아름다움의 힘 中)

저도 꼭 자기성찰이란 강력한 재능을 얻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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