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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이치도 (순정)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3월
평점 :
<도망자 이치도>에 실린 해설에서, 문학평론가 신수정씨는 작가를 크게 두 부류로 나눈다. 늘 새롭고 낯선 이야기로 호기심을 만족시켜주는 선원형 작가와 누구나 아는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게 만드는 농부형 작가. 난 여기서 신수정씨가 택한 메타포가 참 좋았다. 선원과 농부라. '선원이 머나먼 세상을 편력하고 돌아와 이국의 낯선 풍물을 호들갑스럽게 전해주는 자라면 농부는 무엇보다도 시시콜콜한 고향의 일상사를 구수한 입담으로 풀어놓는 자이다.'(P.269) 선원형에 속하는 작가로 김탁환이나 김영하를 꼽을 수 있다면, 후자의 대표적 작가로 단연 성석제를 들 수 있다. 평범한 이야기도 그의 입으로 들어가면 팔도강산을 유랑하며 원조랩을 선보인 서수남과 하청일의 신나는 노랫가락으로 변한다. 성석제가 지닌 힘은 여기에 있다. 이런 점에서 그를 농부형 작가로 꼽은 신수정씨의 평론에 절대적으로 동의한다.
<도망자 이치도>도 전형적인 성석제 스타일의 이야기다. 작가 스스로도 '사소한 일들' 이란 챕터를 만들어 놓고 정말 사소한 이야기를 사소하지 않게 이야기한다. 사실 그는 '소설가 다운' 단어를 선택하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 때문에 소설가 답지 못한 언어 능력의 소유자인 난 처음 <조동관약전>을 읽고 그닥 웃지 못했다. 그가 뽑아내는 언어의 변화무쌍한 그 면발을 따라가지 못했던 것이다. 내러티브 중심의 이야기구조에 익숙했던 나였기에 <조동관약전>을 읽으며, 한낫 한량에 불과한 인물의 이야기를 어쩌자고 이렇게 긴 썰로 풀어놓은 것일까 의아아 했었다. 습관 때문이었을게다. 영문학을 전공한, 즉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쓰여진 소설을 먼저 접한 나로써는 내러티브 중심으로 소설을 파악하는데 익숙했다. 물론 교수님들은 셰익스피어나 오스틴의 소설을 보며 '여기서 언어유희는 이렇게 이뤄지고 있으며, 이 문단은 패러디를 통한 언어적 웃음을 유발한다'식의 설명하긴 했다. 하지만 공감하지는 못했다. 아, 물론 박민규 소설은 예외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팬클럽>을 통해 이야기가 아닌 문체만으로도 오장육부가 뒤틀리게 웃을 수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 그럼에도 성석제의 소설은 좀 더 토속적인 인상이 강했으며, 국어시간에 배운 김동리, 채만식류의 정통 소설과 가깝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아마 이런 점이 내 웃음을 차단했던 것 같다.
<도망자 이치도>를 통해 성석제의 진면모를 알게 되었다. <도망자 이치도>는 '성석제 소설은 웃기다고 하는데 난 잘 모르겠어'란 믿음을 되새기며 웃기를 거부하는 내 웃음보를 반강제적으로 터뜨리고 말았다. 정확히 이 부분에서 웃음을 거부한 독자의 마음이 열렸다. "담장 밖으로 가자니, 거기서 길까지 깊이를 알 수 없는 미나리꽝 논 둑 백여 미터를 걸어나가야 했다. 게다가 학교 안으로 다시 들어올 때 수위가 "야 담치기 재미있지. 열심히 하면 높이뛰기 선수도 될 수 있어. 소년체전에 나오는 높이뛰기 선수가 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거다. 빨리 가서 또 해라. 응?"하고 순순히 보내줄 리가 없었다. 똥통의 너비는 사오 미터에 불과하니 운이 좋아 두세 걸으만 잘 골리 딛는다면 무사할 수 있었다." 이후부터 '아 이 소설 무지 웃기네'란 무의식이 싹텄고, 사소한 부분도 그냥 웃지 않고 지나칠 수 없었다. 사실 <도망자 이치도>는 불우한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성석제가 얘기하는 사소한 일을 겪고(정말 사소하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사실적인 일들이기에)도둑이 된다는 이야기가 전부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이야기를 성석제는 순전히 문체만으로 광채가 나는 소설 명작으로 바꿔놓았다.
<도망자 이치도>를 보며 또 하나의 문체를 만났다는 사실에 참 반가웠다. 김훈도 특유의 문체가 있다. 그의 문체는 사군자를 벗삼아 우주의 신비한 운행 원리를 탐구하는 조선시대의 유학자를 연상시킨다. 고상하면서도 담백하고 날카롭다. 박민규도 문체가 있다. 박민규의 문체에선 쉬는 시간에 아이들을 폭소의 도가니에 빠트리는 장난꾸러기 중학생이 떠오른다. 재치있으면서도 솔직하다. 김영하도 있다. 그의 문체는 대학에서 실존주의의 부조리에 대해 돈오한 젊은 부르주아 청년을 연상시킨다. 냉소적이면서도 집요한게 웃기다. 그렇다면 성석제는? 중학교 다닐 때 이야기 꽤나 한 청년이 커서도 크게 철은 들지 않아 여전히 장난을 좋아하는 시골 농부가 떠오른다. 이렇게 한 작가의 문체에 사로잡히고 그 작가의 팬이 된다는 것은, 한국 소설을 읽는 가장 큰 매력이 아닌가 한다. <도망자 이치도>는 그렇게 내게 성석제의 참 맛을 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