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밑의 경제학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지음, 유주현 옮김 / 이콘 / 2007년 5월
평점 :
절판


기획. 모든 일의 시작이자 절반이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작업이다. 보통 영화에서 기획을 담당하는 파트가 제작이다. 구체적인 세부내용을 잡는 일이 아닌, 작품의 큰 방향을 잡는 작업이다. 동시에 아이디어의 결합이 일어나는 순간이다. 기획력이 좋다면 일단 신선도에서 절반을 잡고 들어간다고 할 수 있다. 기획의 예를 살펴본다면, 얼마 전 6.10항쟁을 들 수 있겠다. 당시 많은 방송들이 6.10항쟁 20주년 기념 방송 제작에 열을 올렸다. 이 때 주목을 끈 것이 한겨레21의 기사였다. 한겨레21은 '현 대선주자들이 1987년 6.10일 무엇을 하고 있었나' 라는 특집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의 상황을 잘 전해줄 수 있는 사건에다가 대선 주자들의 당시 현황을 흥미롭게 배열했던 것이다. 현 대선 국면과 6.10항쟁 20주년이라는 사건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그야말로 튀는 기획이었다.


기획의 관점에서 본다면, <식탁 밑의 경제학>은 식탁 밑이라는 음식 문화를 통해 경제학을 바라본다는 흥미로운 기획에서 시작한다. 즉 기획력에서 절반을 먹고 들어가는, 경제학에 관심있는 사람과 음식에 관심있는 사람을 모두 끌어들이는 책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난 이러한 간접적인 설명을 좋아한다. 예전 KBS 다큐 중에도 프리미어리그를 통해 영국의 축구문화와 축구시장을 잠식해가는 신자유주의의 시대 상황을 절묘하게 풀어내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 작품이 좋았던 것도 'FTA는 나쁘고 신자유주의는 우리의 삶을 앗아간다' 고 직접적으로 이야기하는 시사프로그램보다 더 강력하고 잔잔한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기획력이 어렵지만 흥미로운 방식이라 생각한다. 이런 이유로 자연스레 제목만 보고 <식탁밑의 경제학>을 읽기 시작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읽고 있는 책이었다. 저자는 일본 경제 관료를 지낸 학자. 이론과 경험이 잘 갖춰진 사람이었다. 자신이 프랑스에서 지낸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다는 점 역시 날 끌리게 했다.


그리고 다시금 확인했다. 기획력이 모든 것을 담보해주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우선 내가 이 책의 제목에서 '식탁' 이 아닌 '경제학' 에 방점을 찍었다는 사실을 밝혀두고자 한다. 왜냐하면 이 때 부터 책과 나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난 사실 식탁이나 세계의 음식문화에 별 관심이 없다. <식탁밑의 경제학>은 경제학 이야기보다는 음식 이야기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이런 이유로 이 책에 대한 혹평은 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편견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식탁밑의 경제학>에서 경제학과 음식문화의 절묘한 조화를 기대하는 사람은 내 혹평에 귀 기울이길. 이 책에서 음식이야기와 경제이야기는 물과 기름같은 존재다. 한 챕터에서는 음식 이야기를, 다른 챕터에서는 경제사에 대한 얘기를 간략하게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문제는 이 책이 '왜' 란 질문에 설명을 친절하게 답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200쪽이 안 되는 얇은 책에서 뭘 바라는 거냐' 라며 반박 한다면 할 말은 없다. 하지만 난 책의 양과 내용의 깊이가 비례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과 미국은 식의 지배(플랜테이션)를 통해 세계 지배에 성공했지만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이를 성공하지 못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여기서 자연스레 의문이 든다. 왜? 왜 영국과 미국만이 이를 이뤄냈을까? 저자는 또 '프랑스와 중국이 다양한 음식문화권의 교차지역이기에 풍부한 음식문화가 생겨났다' 고 이야기한다.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이 단순한 주장은 새로운 궁금증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미국은? 미국은 왜 안 그렇지? 동양 음식이 서양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것과 경제력은 어떤 상관관계를 지닌 것인가? 빼어난 음식문화를 자랑하던 아시아(중국)는 어떻게 서양의 음식에 지배당하게 되는가? 책은 답해 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식탁밑의 경제학>은 '간략한 서양사 내용 조금 + 프랑스, 중국, 일본의 음식문화 약간 많이 + 경제학 내용 아주 조금 들어있는 책' 이다.


물론 이 책은 경제학자가 쓴 가볍고 흥미로운 '음식 서적' 이다. 음식에 집중한다면 그렇게 비판받을만한 졸저도 아니다. 실제로 나 역시 '중국에서는 서양과 달리 일찍부터 음식을 통해 몸을 치료하는 의식동원적 사고방식이 있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내 눈을 사로잡은 책의 신선한 기획이 기대를 너무 부풀렸다는 사실 때문에 실망이 더 클 수도 있을게다. 그럼에도 이 책은 기획의 실패를 잘 보여주고 있다. 사실 신선한 기획의 영화를 망쳐놓는 감독을 우린 여러 번 봐왔다. 이런 점에서 신선한 기획과 실망스런 콘텐트의 실망스런 조합이 주는 불편함에 익숙하다. 하지만 그 익숙함이 그 불편한 기분을 해소해주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없는 시간 쪼개서 봤더니... 어쨌든 이제 책 좀 신중하게 가려서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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