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나도 이제 토론식 수업을 시작하겠어. 자. 방금 읽은 부분의 핵심내용을 한 번 요약해보자. 오늘이 17일이니까, 17번아~ 이 문단 핵심 내용을 요약해봐라.”
순간 17번 학생의 표정이 굳어진다. 마치 자신의 20초 뒤 미래를 알아챈 듯하다.
“저기... 그러니까...... 음.............”
“야 뭘 몰라. 방금 읽은 부분이 어떤 내용인지 말해보라는데.”
페르마의 정리를 바라보고 있는듯한 표정으로 서있던 17번 학생은 순간 자신의 미약한 독해능력을 알아채고 자포자기 심정으로 대답 대신 침묵을 택한다.
“................”
숙제를 안 해온 것도 아닌데, 17번 학생은 오늘이 17일이란 이유 때문에, 읽은 책이라고는 취학 전에 읽었던 동화책이 전부였다는 사실 때문에 사랑의 매를 맞는다. 매를 맞고 난 후, 17번 학생의 얼굴엔 세계 3차 세계 대전 끝에 찾아온 20년 만의 지구 평화가 번져나간다. 자신의 차례는 적어도 끝이 났다는 의미일게다.
“이것도 모르냐. 이러니 내가 어떻게 토론식 수업을 하겠냐. 그럼 27번 일어나서 답해봐라.”
순간 17번 학생을 제외한 모든 학생의 얼굴에 3차 세계 대전의 어두운 먹구름이 들이닥치기 시작했다.
#2
“오늘은 양성평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요. 일단 누가 한 번 이야기해볼래.”
“제가 먼저 얘기할게요. 전 여성에 대해 동료들이 보호해주고 배려해주는건 고맙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너희들은 약하기 때문에 무조건 행정이나 서류업무만 하라고 얘기하는건 일종의 차별이라고 생각해요.”
“맞아요. 모든 여자들이 정리에 능하고, 서류업무를 꼼꼼히 하는건 아니에요.”
“아니죠. 이건 사실에 기반을 하는거잖아요. 여성들이 남성보다 체력적으로 불리하다는 사실. 그런데 억지로 여성들이 보병이나 포병에 배치를 받는다면 오히려 남성 동료들에게 위협을 줄 수 있어요.”
토론을 시작한지 10분 채 지나지 않았지만 교실은 이내 후끈 달아오른다. 오직 구석에 박혀있는 일군의 무리들만이 ‘침묵은 금이다’ 라는 명제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첫 번째 장면은 10여 년전, 소위 강남 8학군에 위치한 고등학교 국어 수업의 모습이다. 고등학교 교육을 어느 정도 이수 받은 학생들이 모여 봉숭아 학당에서나 볼 수 있는 코메디 수업을 연출했다. 반면 두 번째 장면은 미 8군 내 한 소대에서 있었던 양성평등 교육의 한 장면들이다. ‘111 빼기 11’ 이라는 뺄셈도 공책에 써야지만 가까스로 풀던, 낮은 학력의 미군들이 모여 국내 엘리트 학교에서나 볼 수 있는 토론을 했다. 소위 명문대를 나왔다는 카투사들은 한 쪽에 모여 짧은 영어 때문에 자신은 얘기를 못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두 장면을 모두 직접 목격한 내게, 이 사실은 나름의 충격이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무엇이 이런 차이를 가져온 것일까? 2년 뒤, 대학에서 공부를 조금 해본 후에야 깨달았다. 우리나라 교육은 학생들에게 ‘공부’ 를 가르쳐준적이 없다는 사실을.
공부를 하는 목적은 나의 인생을 더욱 풍족하고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에 가거나 취업을 위해 하는 공부는 진정한 의미의 공부가 아니다. 공부를 위해선 세 가지 단계가 필요하다. 첫 번째 단계는 ‘호기심’ 이다. ‘우리는 왜 살까? 행복이란 무엇일까? 지구를 구성하고 있는 성분은 무엇일까?’와 같은 호기심이 촉발되어야만 그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책을 읽게 된다. 때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의문점을 해소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얻어진 정보는 우리의 시신경을 따라 뇌에 저장된다. 문제는 지식이 창고에 쌓이는 재고품처럼 차곡차곡 쌓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 가끔 이 저장물은 뇌에 강한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하고 창고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두 번째 단계인 ‘사고’ 가 발생한다. 지식은 우리의 뇌를 자극하고 더 깊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때로 우리는 책의 지식에 의심을 품기도 하고, 그 지식을 통해 새로운 나만의 생각을 갖게 된다. 이것이 사고의 과정이다. 하지만 기존의 지식에 새로운 나의 생각이 더해져 어지러워진 창고를 정리해야 한다. 물건을 다시 차곡차곡 쌓아야 한다는 의미. 이 과정이 마지막 단계인 ‘글쓰기’ 다. 글을 쓰기 위해서는 사고를 정리해야 한다. 다른 사람과 자신의 사고를 공유하기 위해선 누가 읽더라도 쉽게 이해될 수 있는 글이 필요하다. 결국 좋은 글을 쓰는 과정에서 우린 자신의 사고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게 되고 스스로도 그 정보를 안정적으로 창고에 보유할 수 있게 된다. 이게 바로 공부의 과정이다.
이런 점에서 우린 공부를 해본적이 없다. 수동적으로, 맞지 않기 위해 공부를 했거나 좋은 성적으로 대학에 가기 위해 공부를 했던 학생들에게 자신의 생각이 있을리 없다. 그러다보니 생각을 표현할 일도 없다. 자연스레 첫 번째 장면의 광경이 전국의 모든 학교에서 연출된다. 반면 우리가 무식하다고 구박하던 미군들은 달랐다. 설령 지식의 무게나 뇌의 용량(?)은 카투사보다 부족할망정, 자신의 생각을 갖고 표현하는 방식엔 훨씬 익숙했다. 그들은 적어도 생각하고 표현하는 방식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어떻게 두 그룹이 이처럼 달라질 수 있었을까. 난 교육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미숙의 <호모쿵푸스>는 우리가 왜 공부를 해야 하며, 어떻게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일종의 참고서다. (이런 것이 진정 참고서다. 동아전과나 디딤돌 핵심정리 문제집이 참고서가 아니다.) 특히 공부에 대한 약간의 호기심을 지니고 있는 사람에게는 최고의 참고서라 할 수 있다. 어린 자녀가 있는 부모들에게도 <호모쿵푸스>를 권한다. 부모가 할 수 있는 교육은 바로 자녀가 진정한 ‘공부’ 를 경험하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 때문에. 하나 더. 이제 막 수능을 마친 학생들에게도 이 책을 권한다. “지금껏 진정한 공부를 못한 건 자네들 탓이 아니라네. 하지만 대학에 온 지금, 진정한 공부의 세계에 한 번 빠져보지 않겠는가?” 언젠가 고미숙씨가 생각하는 공부의 낙원이 오길 진정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