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30대 신혼 부부, 조씨와 유씨. 맞벌이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의 점심을 밖에서 해결한다. 잦은 야근으로 저녁 역시 집에서 먹는 경우가 별로 없다. 주말에도 자주 외식을 한다. 설거지를 극도로 싫어하는 남편 조씨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다. 집에선 가끔 술을 마시는 정도. 식료품 구입비보다 주류 구입비가 더 많은 때도 있다. 하지만 부인 유씨는 잦은 외식으로 조미료 섭취가 늘어나면서 건강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침만이라고 집에서 챙겨먹자고 주장했다. 이에 남편 조씨는 일주일에 한 번 집안일 해주는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조건으로 응했다. 덕분에 2-3주에 한 번씩은 대형 할인 마트에서 장을 본다.


보통 장보기는 두부, 계란 코너에서 시작해 고도리 방향으로 돈다. 두부는 마파두부 양념과 함께 산다. 세상에서 달걀 후라이를 가장 좋아하는 신랑 조씨 때문에 계란은 꼬박 꼬박 구입한다. 다음은 야채와 과일코너. 가끔 아침 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호박을 사거나, 그나마 신랑 조씨가 먹는 야채 오이, 연근 등을 선택한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내 유씨는 포도, 키위, 오렌지를 구입한다. 이 때 식이섬유 섭취에 관심이 없는 신랑 조씨는 육류 코너의 붉은 살코기를 구경한다. 하지만 아내 유씨는 육류 코너를 지나, 생선 코너의 연어를 장 바구니에 넣는다. 스낵코너에서는 술안주로 마른 김이나 다시마, 쥐포 등을 사고, 곧바로 술 매대로 향한다. 보통 와인 한 병에 수입 맥주 6캔을 산다. 쾌변을 중시하는 부부답게 우유, 두유, 쾌변 요구르트 등 유제품은 꽤 많이 산다. 보통 한 번 장볼 때 드는 비용은 약 9-10만 원 선. 한 번 장을 보면 2주 가까이 먹는다.


저널리스트이자 사진가인 피터 멘젤의 <헝그리 플래닛-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를 읽고난 뒤, '나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 확인해봤다.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식탁위의 반조리식품은 우리 부부가 화학조미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말해줬다. 또한 술, 군것질, 안주 등이 일주일간 먹는 음식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결혼 전에 비해 건강 상태가 나빠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비만 부부가 될 흔적도 엿보인다. 연근, 계란후라이, 생선 구이 등을 제외한 반찬 등을 시댁과 처가에서 얻어먹는다는 사실에서,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우리 사회 젊은 부부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종종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건, 곧 사회가 젊은 노동자들을 빡빡하게 굴리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처럼 한 가족의 식탁엔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때문에 피터 멘젤은 식탁 위 음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은 각 국의 평범한 가족의 식탁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식탁위의 일상적인 음식은 현재 지구상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사는 두도씨 가족은 일주일치 식품으로 트렁크 가득 장을 보고, 바쁜 일상에서도 식사 시간의 즐거움을 지키려고 애쓴다. 내전으로 도시 전체가 굶주리던 시절을 너무나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에 사는 두도씨 식탁 위에는 동유럽 내전의 아픔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차드 난민촌에 사는 아부바카르씨 가족은 세 끼 모두 배급받은 곡식으로 아이쉬를 먹는다. 아이쉬는 걸쭉한 죽을 꾸덕꾸덕하게 응고시킨 것이다. 식료품가게는 워낙 비싸 번 돈으로 음식을 사먹긴 어렵다. 브레이드징 난민촌의 식탁에선 절대 빈곤의 이야기가 곧 현실이다. 반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레비스 씨 가족은 한 달에 패스트푸드 음식 구입에만 65,000원 가까이 지출한다. 당연히 가족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고도 비만이다. 차드와 미국의 식탁은 전지구적인 양극화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영국에 사는 베인톤씨 가족은 일주일 양식의 대부분을 반조리 냉동 피자나 주스 박스로 채운다. 반조리 식품의 확산은 ‘빠르고 편하게’를 외치는 사회의 단면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식사를 입이 행복한 시간에서 단순히 배 채우는 시간으로 전락시켰다. 베이징에 사는 둥씨 가족은 까르푸에서 장을 보고 맥도날드를 즐겨 먹는다. 중국 전통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모습은 식탁 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급 카드를 통해 음식을 분배 받는 쿠바의 코스타씨 가족. 하지만 해외 친척이 보내주는 돈으로 국영 마켓에서 비싼 식료품을 추가로 사야만 한다. 쿠바의 사회주의 역시 유토피아를 건설하진 못했다. 바다표범을 직접 사냥해 단백질을 보충하는 그린란드의 매드센 가족의 식탁은 아직까지 문명이 오염시키지 않은 자연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나친 식사로 배가 부르기 전에 젓가락을 놓는다는 의미의 ‘하라 하치 부’를 강조하는 오키나와 노인들의 식탁에서 장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식탁 위에는 국제 정세와 사회 변화, 환경 문제 그리고 사회 문제에서 개인의 건강 문제까지 인류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다.


에필로그를 보니 이 책은 일본 NHK-TV 다큐멘터리 취재 차 이스탄불로 날아가며 시작됐다고 한다. 실제로 책을 읽는 내내 책의 내용을 TV 프로그램으로 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작비가 문제겠지만) 예전에 프리미어리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방송은 모두에게 익숙한 축구 이야기를 시작으로 프리미어리그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의 바람과 그에 저항하는 축구팬들의 열정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전 세계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그 전까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던 말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너무나 큰 이야기였고,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때문에 당시 방송은 프리미어리그라는 구체적 공간의 변화를 통해 커다란 이야기를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사람의 뇌는 작은 것에 쉽게 반응을 보인다. 때문에 세계적인 양극화라는 큰 단어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편, 차드 주민의 빈곤과 미국인들의 비만이 갖는 의미는 쉽게 이해한다. 인도의 빈곤을 만날 듣는 것보다, <슬럼독밀리어네어>에 비친 주인공의 열악한 삶이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헝그리플래닛>은 전 세계의 식탁 사진을 통해 매우 방대하고 심도 있는 이야기를 암시해준다. 자연스레 우리의 사고는 전 세계의 식탁에서 전 지구적 사회 문제까지 확장된다. <헝그리플래닛>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씨 부부의 식탁 역시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시킨다. 조씨의 경우 건강을 위해 식이섬유 섭취를 늘여야 했고, 신부 유씨 역시 조미료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집안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또한 결혼한 자식들 밑반찬 해주느라 고생하는 부모님들을 생각해, 힘들더라도 직접 반찬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그말인즉슨, 회사일 못지 않게 집안일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고, 이는 다시 신랑 조씨의 설거지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밑반찬 만드는 데 큰 힘을 보태지 않을 거라면, 신랑 조씨는 설거지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 그게 싫다면 신랑 조씨는 좋아하는 달걀 조림을 직접 해먹어야 할 것이다. 음식은 결국 인간의 가장 밀접한 생활이다. 때문에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란 단순한 질문은 모든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 <헝그리 플래닛>이 전한 식탁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물론 세계 양극화건, 조씨네 설거지 문제건, 이야기를 확장시켜나갈 주인공은 바로 독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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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여름, 축섬(Chuuk Island)에 다녀왔다. 가기 전, 아무도 축에 대해 알지 못했다. '뭐 뚝섬 간다고?' '쿡섬?' 이름부터 생소한 축섬은 미크로네시아 연방에 소속된, 연방에서 가장 큰 섬이다. 축은 원주민 언어로 '산' 이란 의미다. 산이 많아 축섬이란 이름이 붙여졌는데, 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인들이 축섬을 ‘트럭’이라고 잘못 부르게 되면서 트럭섬으로 외부에 더 많이 알려져있다. 축으로 가는 항공편은 단 하나다. 괌에서 컨티넨탈 에어라인을 타고 1시간 정도 가면, 축 공항에 도착하게 된다. 공항엔 축 원주민들이 많이 모여있다. ‘다들 괌에서 오는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구나’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들은 그냥, 심심해서, 사람 구경하러 공항에 나와 있는 것이다. 왜일까? 축에는 오락 거리가 부족하다. 축에는 TV나 인터넷이 없다. 전기도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다. 일도 없는데 오락 거리도 없다. 하여 이들은 공항을 어슬렁거리며, 축을 찾은 외국인들에게 호기심을 보이는 것이다. 축섬 원주민들의 생활은 우리가 사고하는 패러다임 밖에 존재한다. 우리의 상식은 축섬에서 통하지 않는다.


축섬에 도착한 첫 아침. 일어나 커텐을 열자, 강한 햇살과 햇살을 머금은 새파란 바다가 눈에 들어왔다. 축섬의 강렬한 첫 인사였다. 이국적인 풍경을 카메라에 담고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촬영을 준비하는 데, 마침 멀리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판자촌같이 허름한 집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 축섬의 원주민 하나가 마당의 긴 야자나무 사이에 해먹을 메어놓고 그곳에 누워 한가로이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참 평화롭군’이라고 생각하고 섬 주변 촬영에 나섰다. 두 시간쯤 촬영하고 그곳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판자집 주변의 풍경은 두 시간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다. 축의 시간은 멈춰버린 것일까. 무성한 야자나무 잎, 집 주변에서 놀고 있던 꼬마 아이 둘, 마당에 누워 잠을 자는 누렁이, 그리고 해먹에 누워 노래를 부르던 사내까지. 그랬다. 월요일 오전 10시부터 12시사이, 서울의 직장인들이 가장 바쁘게 움직이던 시간에, 축의 한 사내는 해먹에 누워 두 시간 동안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아무 것도 안 하고, 노래만 했다. 그것도 누워서!!) 해먹에 누워 노래를 부르는 축의 사내에게 시간은 의미가 없었다. 축 섬 주민들은 언제나 느긋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일할 필요가 없었다. 해먹에 누워있다 보면 야자 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진다. 떨어진 열매 속엔 풍부한 탄수화물이 들어있다. (빵과 비슷한 맛이다) 빵으로 허기를 채운다가 가끔 다른 음식이 먹고 싶으면, 바다에 들어가 고기나 게를 잡는다.


축 섬의 주민들은 여유롭다. 축 섬에는 한국해양연구원 부설 연구소가 있다. 그곳에서 축섬 주민이 10명 정도가 일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누군가가 시키지 않으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창문 한 곳을 가리키며 ‘창문을 닦으라’라고 지시하면, 한 나절 동안 같은 창문만을 닦는다. 그들은 노동이란 개념을 쉽게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한 번에 3가지 이상의 일을 시키면 안 된다. 축섬 주민들은 갑작스럽게 많은 일을 시키면 너무 당황해 눈물을 보이기 때문이다. 반드시 한 번에 한 가지만 시켜야 한다. 일을 부려먹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에게 호의적이다. 사교적이고 항상 밝다. 연구소 직원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동' 이란 개념이 머릿속에 없듯, '경쟁'이란 단어도 없다. 모두가 형제고 친구다. 간혹 길거리에서 외국인을 만날 때면, 이들은 오래 전 친구를 만난 것처럼 손을 흔들며 반가워한다.


하지만 최근 들어 축도 변화하고 있다. 모르몬교 선교인단이 들어와 건물을 세우고 외국의 지원을 받아 도로를 설치하고 있다. 작은 식료품 가게나 시장들도 들어서고 있다. 다시 말해 축에도 자본주의의 바람이 조금씩 불어오고 있다. 이제는 축섬 친구들도 해먹에 누워 마냥 노래만 부를 수는 없다. 실제로 일을 하고 돈을 벌고 싶어 하는 축섬 친구들이 늘어나고 있다. 해양연구원에서 일하는 축 친구들을 부러워하는 주민들이 상당히 많다고 한다. 교육 시설도 늘어나고 있다. 전 세계 스킨스쿠버 마니아들이 몰리면서 커다란 리조트도 생겼다. 이제 축 주민들도 일을 통해 새로운 행복을 찾고자 한다. 하지만 아직 일거리가 부족한 상태다. 실업과 문맹이 사회의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축 섬이 다른 ‘보통’의 나라처럼 되기엔, 아직 나아가야 할 길이 멀다. 하지만 외국의 차관을 받아 한 번에 급격한 변화를 축에 가져다줘서는 안 된다.


후루타 야스시의 <앨버트로스의 똥으로 만든 나라>는 미크로네시아 연방 인근에 위치한 작은 섬나라 나우루에 관한 이야기다. 나우루는 축과 달리 앨버트로스의 똥이 인광석으로 변하면서 부유한 국가가 됐다. 외국과의 교류도 많아졌고, 다양한 편의시설이 생겨났다. 하지만 그들의 생활 방식은 축 주민들과 다를 바 없었다. 해먹 위에서 두 세 시간 노래 불렀고, 심심하면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았다. 축 섬의 주민들은 자연의 환경에서 자연의 생활을 이어갔다면, 나우루의 주민들은 문명의 환경에서 자연의 생활을 이어간 셈이다. 하지만 나우루의 주변 환경과 생활 방식의 간극에서 나우루의 비극이 시작됐다. 외국의 자본이 급격히 유입됐고, 자원을 통해 번 돈은 흥청망청 소비됐다. 자원이 고갈되면서, 나우루는 점점 가난해져갔다. 하지만 생활 습관은 바뀌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일하지 않으며 돈을 펑펑 써댔다. 결국 나우루는 엄청난 해외 부채를 지게 됐다. 그 사이 정치적 부패와 혼란은 이어졌다. 환경이 아무리 급격히 변해도 생활 습관은 한 번에 바뀔 수 없다. 때문에 앨버트로스의 똥이 가져다 준 급격한 변화가 나우루의 비극을 가져오게 됐다.


축 섬에는 축 원주민과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 사는 한국인이 한 분 계신다. 10년 넘게 살면서 그 분의 생활 습관은 이미 축 원주민이 된 지 오래. 얼굴과 행동도 축 주민처럼 평화롭고 느릿느릿하다. 현재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는 데, 세 자녀 모두 한국말을 못 한다. 그래서 물었다. '애들 데리고 한국에서 몇 년간 살 생각은 없으세요? 그래도 한국말을 배우면 좋잖아요?' 그러자 그 분은 이렇게 답했다. ‘나도 데리고 가고 싶죠. 근데 한국은 초등학생들도 시험보고 엄청 치열하다면서요. 여기서 살던 얘들이 거기 가면 적응이나 할 수 있겠어요. 환경이 너무 급격하게 변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엄두가 안 나더라고.’ 축 섬의 느긋한 생활 습관이 한 순간에 치열한 도시 생활 습관으로 변할 수는 없다. 때문에 축 섬도 서서히 변해야 한다. 한 순간에 서울의 경쟁을 도입한다면, 축 주민의 생활은 황폐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해양연구원 부속 연구소에서 흑진주를 양식중인 한 연구원은 '자원이라고는 없는 축도 흑진주를 통해 부유해졌으면 좋겠다' 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 분의 바람대로 축 주민들도 적당한 소득을 통해 어느 정도 일도 하면서, 축 특유의 여유로움은 완전히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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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사무소 김앤장 - 신자유주의를 성공 사업으로 만든 변호사 집단의 이야기 우리시대의 논리 10
임종인.장화식 지음 / 후마니타스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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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하나. 삼성의 이건희 회장은 아들 이재용에게 경영권을 승계하기 위해 에버랜드 전환사채를 이용, 탈법적 상속을 시도한다. 이후 에버랜드 전환사채 사건은 시민단체들의 고발을 통해 검찰 수사 및 재판까지 이뤄진다. 결과는 '전 현직 사장의 배임혐의일 뿐, 그룹의 조직적 공모는 없다' 였다. 하지만 끊임없이 재판 과정에서 삼성의 증거 및 증언의 조작이 있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 사건 둘. 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는 자산가치가 약 62조원의 외환은행을 약 1조원의 헐값에 매입하게 된다. 당시 은행 관련 법에는 사모 펀드가 은행을 구입할 수 없다는 조항이 있었다. 때문에 론스타가 외환은행을 헐값에 매입하는 과정에서 정부 인사들의 불법적인 행위가 있었다는 의혹이 나오게 된다. 두 사건은 거대 자본이 한 국가의 시스템을 흔들고자 했던 불법적 행위와 관련되어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에 한국 최대 법률 사무소 김앤장이 깊숙이 개입되어 있다는 의혹이 제기된다는 공통점도 있다.


김앤장. 한국 최대 법률사무소라는 사실 외에 언론에 공개된 점이 거의 없는, 베일에 싸여있는 조직이다. 건물에는 간판도 없다. 하지만 추정 매출액은 4천억원에 달하는 거대 법률회사다. 이 회사 대표 변호사의 한 해 수입(약 600억)이 2005년 이건희 회장보다 많아 화제가 된 적도 있다. 하지만 이게 전부다. 전직 경제 관료들이 퇴직 후 많이 몰려있다는 점과, IMF이후 외국 자본과 함께 급성장했다는 사실 외에 알려진 것이 없다. 이처럼 법률로 완전히 무장한 김앤장을 한 시민운동가와 국회의원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법률 사무소 김앤장>이다.


물론 한계는 많다. 알다시피 김앤장은 한국 최고의 법률 전문가가 모인 집단이다. 어설프게 파헤치려고 했다간 거액의 소송을 당하기 십상이다. 실제로 뉴스메이커는 '김앤장은 론스타 게이트의 숨은 몸통?' 이란 기사를 썼다 10억원대의 소송을 당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뉴스메이커의 정정 보도로 이 사건은 일단락 됐지만 김앤장이 쉽게 파헤칠 수 없는 조직임을 명확히 알려준 일이었다. 때문에 책에 나오는 구체적인 정보는 KBS와 한겨레 등이 취재한 내용, 론스타 사건을 집요하게 파헤친 저자의 활동, 그리고 국회의 정보 청구 등을 통해 얻어졌다. 다시 말해 시중에 돌아다니는 김앤장의 정보를 모조리 끌어다 쓴 책이다. 특별히 김앤장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들의 구체적 증거가 추가되진 못했다. 그 부분이 이 책의 한계이자 우리 사회의 한계다.


김앤장은 법률전문가 집단답게 대놓고 불법적인 역할을 하진 않는다. 아니, 합법과 불법의 경계를 교묘히 넘나든다. '뭔가 나쁜 놈 같긴 한데, 구체적인 증거는 없는/ 나쁜 놈이긴 한데 정확히 뭐가 나쁜 놈인지 모르겠는' 식이다. 책에 담긴 김앤장의 불법적인 행위도 대부분 의혹제기의 수준이다. 김용철 변호사로 인해 어느 정도 공개된 삼성과 달리 아직 김앤장의 내부는 철저히 밀폐되어있고, 이런 이유로 아직 김앤장의 문제점을 시원하게 규정하긴 어렵다. 하지만 지금까지 제기된 김앤장의 의혹을 정리하는 임종인 의원은 이렇게 말한다. '실력도 있는데 문제는 실력을 넘어서는 권한 들을 이용해 되지 않는 일도 되게 만든다는 점이다.' 실력을 넘어서는 권한은 무엇이고 되지 않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실력을 넘어서는 권한이란 김앤장이 전직 고위 관료들을 이용해 인맥을 이용한 불법 로비를 시행한다는 의혹이다. 물론 정확한 증거가 포착되진 않았다. (돈을 받지 않는 한, 즉 인맥을 이용한 로비는 누군가의 폭로 없이 드러나기 힘들다.) 하지만 정황은 포착된다. 예를 들어 공정거래위원회의 한 상임위원은 마이크로소프트 사에 과징금을 부과한 적이 있다. 이 때가 2006년 2월이다. 하지만 이 상임위원은 7개월 후 김앤장으로 자리를 옮긴다. 참고로 김앤장은 마이크로소프트사의 과징금 불복 소송을 담당했다. 국세청 직원들도 최근 잇달아 영입하고 있다. 과세소송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황재성, 이주석 전 서울지방국세청장은 김앤장으로부터 각각 6억 9천만원, 4억 천만 원을 받았다. 고문 자격으로 받은 급여인데, 아무도 이들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른다. 이런 식이다. 정확하게 로비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련 사건을 담당하던 고위직 공무원을 영입하고 이후 관련 사건을 해결한다. 두 사안(고위직 관료 영입과 문제해결)의 명확한 인과관계가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의혹이 충분히 제기될 수 있는 상황이라 볼 수 있다.


되지 않는 일을 되게 만드는 것은 더 파헤치기 어려운 부분이다. 론스타 사건을 보자. 위에서 밝혔듯, 론스타는 사모펀드이기에 국내 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없다. 이에 김앤장은 관련 조항을 결정하는 재경부와 금감위에 '은행법 8조 2항의 부실기관 정리 등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예외를 인정하는 조항' 을 이용, 론스타의 자격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외환은행은 예외 조항을 적용 받을 만큼 부실하진 않았다. 재경부와 금감위는 비공식적으로 김앤장에게 이런 내용의 자문을 받아 론스타의 매입 자격을 제공해줬다. 당시 김앤장에는 이헌재 전 재경부 장관이 고문으로 재직 중 이었다. 마찬가지로 재경부와 금감위는 김앤장의 조언을 그대로 따랐다. 되지 않는 일을 되게 만들었다는 명확한 증거는 없다. 하지만 정황은 충분하다.


<질병판매학>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사회는 자본이 모든 것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시대다. 약을 팔기 위해 병을 만들어내고, 기업의 비리를 감추기 위해 판사와 검사를 통제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것은 자본의 힘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권력은 자본으로 넘어갔다' 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그러한 자본 위에 법률가가 있다는 사실이다. 자본이 시스템 위를 휘젓고 다닐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는 존재가 바로 일부 법률 전문가들이다. 전 삼성 법무팀장 김용철 변호사는 재직 중에 김앤장의 힘이 삼성 법무 팀을 훨씬 능가함을 여러 번 느꼈다고 한다. 때론 본인들의 치부를 김앤장에게 너무 많이 공개해 이들에게 끌려 다닌다는 인상도 받았다고 한다. 실제로 한 대기업의 법무팀장은 김앤장과의 불화로 자리를 잃기도 했다. 김변호사의 말을 빌리자면 '삼성 위의 김앤장' 인 것이다. 불법을 교묘하게 합법화 한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돈이 된다고 모두 수임을 맡아도 되는 것은 아니다. 변호사법에는 변호사의 사회적 책임, 즉 공적 의무에 대해 적어놓고 있다. 이 의무에 따라 김앤장은 스스로 제기된 다양한 의혹을 밝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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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골다공증을 소개한 기사를 보고 경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기억에 따르면, 골다공증은 뼈 안이 텅텅 비어 살짝 쳐도 뼈가 부러지게 되는 무서운 증상이었다. 에이즈만큼이나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든 여성에게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란 설명도 덧붙여졌다. 혹 우리 엄마가 골다공증에는 걸리지 않을까 며칠 간을 전전긍긍 하기도 했다. 내 뼈가 수수깡으로 변하다 가운데가 텅 빈 과자로 다시 변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다행이 지금까지도 우리 엄마의 뼈 밀도는 높은 편이며 아직까지 단 한번도 골절상을 입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게 여전히 골다공증은 에이즈만큼이나 무서운 병이며, 엄마에게 칼슘 섭취를 많이 하라고 강박적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서운 법이다. 나이 든 여성의 골 밀도가 줄어드는 것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다. 무지했던 나는 당시 신문을 통해 판매되던 질병을 고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적어도 <질병판매학>에 따르면 그렇다. 두 명의 의학 저널리스트가 공저한 <질병 판매학>은 전 세계의 제약회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질병을 판매했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책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골다공증도 결국 제약회사가 골다공증 예방약을 판매하기 위해 과장한 증상이라는 것이다. 책은 질병 산업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을 방대한 취재 내용과 사례를 들어 차분하게 설명한다. 질병 산업을 이끄는 한 축에는 제약회사가, 다른 축에는 의사와 정부 산하 기관이 있다. 제약회사는 의사의 전문적 지식과 정부의 공익 캠페인을 적절히 이용해 새로운 질병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엄청난 약의 판매 수익을 거둔다.


책에 소개된 병은 총 10가지. 하지만 기본적인 패턴은 비슷하다. 우선 두려움을 마케팅 하는 것이다. (어린 꼬마였던 내가 며칠 간 악몽을 꾸었듯이 말이다.) 일단 새로운 병을 만들어야 한다. 이 경우 골다공증처럼 자연스런 노화나 징후를 질병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이 하나 있다.(폐경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폐경을 병으로 몰아가 엄청난 양의 호르몬 제를 판매했다.) 또 다른 방법은 질병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를 늘리기 위해 고혈압의 기준을 점점 낮춘다. 기준을 낮출 때마다 새로운 고혈압 환자가 탄생한다. (미국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혈압이 120-80인 사람도 고혈압 전 단계로 간주 된다. 새롭게 낮아진 고혈압 가이드라인의 결과, 고혈압 추정 환자는 5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골다공증도 마찬가지여서 미국에선 30세 여성의 골 밀도를 정상의 기준으로 설정해놓았다. 자연히 30세가 넘는 사람은 전부 잠재적인 골다공증 환자다.) 질병을 만들거나, 병의 기준을 낮추는 역할은 의사들이 맡는다. 의사들은 학회나 세미나를 통해 혈압과 콜레스테롤의 정상 수치를 낮게 만든다. 물론 의사들을 움직이는 주체는 제약회사다. 의사들은 제약업계로부터 다양한 연구지원비와 세미나 비용을 지원받는다. 콜레스테롤의 정상 수치를 낮췄던 국립 보건원의 연구원이 제약회사로부터 43만 달러와 2백만 달러에 달하는 주식을 받았다는 사실이 미국 국회 청문회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약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미국식품의약국의 업무 중 50% 이상이 제약업계의 지원을 통해 이뤄진다.


더 큰 문제는 제약회사의 약이 효능보다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이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사례로 보자. 이 증후군 역시 의학계에서 질병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이를 치료하기 위한 로트로넥스란 약이 등장했다. 하지만 약의 효능은 미비한 반면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로트로넥스는 회수와 재 승인을 반복하다, 결국 미국식품의약국 자문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조사에서 자문위원회는 로트로넥스의 부작용이 높음을 인정, 관련 교육을 받은 의사만이 처방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제약회사는 효능을 과장하기 위해 통계의 함정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는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5-6%이고 정상인 사람은 3-4%이다. 고혈압 예방 약을 복용할 경우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은 5%에서 4%로 감소할 뿐이다. 하지만 제약회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심장마비 걸릴 확률을 20% 감소시켜 드립니다.')


물론 의약업계를 무조건 매도할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많은 질병이 정복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지나친 이윤 추구다. 비단 제약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기업들이 오직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꼽다 보니 기업이 사회적으로 해야 할 책임은 한 순간에 희석된다. 돈이 된다면 비윤리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위치한 기업의 현 주소다. <질병판매학>에 등장하는 제약회사들은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탐욕스럽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한 면모일 뿐이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제약회사의 지원으로 여행을 가고 연구를 한 후, 제약회사의 입 맛에 맞는 연구결과를 내 놓는다. 제약회사를 감시해야 할 식품의약국도 제약회사의 돈으로 활동을 하며 그들의 불법 로비에 눈을 감아준다. 결국 이윤을 향해 폭주하는 미친 말을 통제해야 할 사람들이 그 말에 매달려 함께 같은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와 식품의약국 직원들의 항변에 누구도 강하게 반발하지 못한다. '넌 돈 싫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내가 더 큰 돈을 쫓아 간다는데 뭐가 문제야?' 아무도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점점 더 희망은 작아진다. 답은 없어 보인다. 결국 모든 것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이뤄질 뿐.


<질병판매학>은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가 살아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책에 나오는 정의로운 의사들. 그들이 있기에 제약회사의 질병 판매와 효능 없는 약 판매가 쉽지만은 않다. 수많은 시민단체도 있다. 그들은 의사들과 함께 제약회사를 감시하고 의사, 공무원과 제약회사간의 유착관계를 폭로한다. 미국의 국회도 청문회를 통해 의로운 의사들과 시민단체들에게 제약업계의 구린 구체적 정보를 제공한다. 그 희망의 결과가 <질병판매학>이다. 책 뒷면에 실린 방대한 주석(비판의 근거) 역시 그 노력의 결과다. 자본주의의 맹목적 질주를 거스르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에 아직 희망은 있다. 이 책을 번역한 홍혜걸 기자의 머리말 중 책 전체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다.

"그들(제약회사)의 지원을 이유로 팩트에 벗어난 기사를 쓴 적은 없지만 후원사의 제품이 기사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돋보이도록 애를 썼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대 제약회사들을 감시하는 시민단체와 두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한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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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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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Wasteland> 중 '4월은 잔인한 달' 이란 유명한 시구가 있다. 어째서 유명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시구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로 가끔 인용했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화창한 봄날, 도서관에서 중간 고사 준비를 하던 때면 종종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더니 정말 우리 신세도 잔인하다' 라고 무식하게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말한 의미는 전혀 달랐다. <황무지>가 시작되기에 앞서, 엘리엇은 고대 무녀(巫女)였던 시빌(Sibyl)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시빌은 신에게 영원한 젊음이 아닌, 영원한 삶을 요구한 댓가로, 늙은 몸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비극을 겪게 됐다. 이 짧은 이야기는 <황무지>의 주제이자 시작이다. 엘리엇의 눈에 비친 당시 현대 사회의 모습은 시빌의 삶과 유사했다. 어떠한 가치있는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몸은 살아있으면서도 정신은 죽어버린 문명. 그것이 바로 엘리엇이 목도한 현실이었다. 젊음을 잃어버린 채 목숨만 연명해가는 시빌의 삶은 곧 현대 사회의 상징이다.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4월. 하지만 4월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잎을 만들고 라일락을 피울 뿐, 이미 우리 문명은 4월이 만들어야 할 가치와 정신을 창조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겉으로는 모든 것을 창조하면서도 실제론 어떠한 가치 있는 정신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4월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더 잔인해 보였던 것이다.


너바나의 리드 보컬 커트 코베인이 바라본 현대문명도 엘리엇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기존의 대중 문화를 경멸했고, 스스로 이에 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저항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그가 가장 혐오해 마지않던 미국의 대중문명은 커트 코베인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파괴하고 저항하고자 했던 문화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코베인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신은 주류 대중 문화를 벗어나 가치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의 행위가 주류 대중 문화의 흐름이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의지에 반하는 자신의 존재를 지운 것이다.


난 김경욱의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를 읽는 내내 이 두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다소 과장된 해석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평범했던 여성이 스타가 되고, 그녀를 광적인 팬이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단순한 미치광이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었다. 내 눈에 장미라는 주인공은 우리 사회 대중 문명의 상징이었다. 순수했던 문명이 점차 자본의 욕망에 휩쓸려 의미있는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처럼, 소설 속 장미도 스타가 되기 위해 점점 더 타락한다. 커트코베인과 엘리엇이 이야기했듯, 정신이 죽어있는 기존의 문명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먼저 뇌사자처럼 목숨만 연명하는 문명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선 무(無)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에서 스토커가 계속 언급하는 폐허의 정신이다. 결국 소설 속 스토커는 장미를 구원하기 위해 장미를 살해한다. 그리고 장미는 죽었지만 주변의 포도송이는 다시 되살아 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장미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황, 즉 포도로 대변되는 타락 이전의 문명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난 해석했다. 참으로 도식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경욱이 소설 전반부에 낸 수수께끼 풀기에 동참해 나름의 답을 얻었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방식이야 어떻든 소설읽기의 즐거움이다.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에서 나타났듯 김경욱의 작품은 매우 어둡고 허무주의적이다. 그의 글을 보고 있자면 마치 2차 대전 직후 허무주의에 빠져 괴로워하던 20세기 지식인이 떠오른다. 차들이 속력을 내서 달리는 대교 위를 지나가는 거북이의 모습(Insert Coin), 레밍스처럼 자살을 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인물들(토니와 사이다)은 실존주의에 빠져들기 직전의 생에 대한 허무감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허무주의는 그가 '누가 커트코베인...'에서 보여줬던 문명에 대한 혐오에서 시작한다. 장애인 소녀를 거침없이 강간하는 인근 상인들(만리장성 너머 붉은 여인숙), 순정이라는 한 여인에 대한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사회의 타락한 문명을 몸으로 체화한 세 주인공 (순정아 사랑해)에서 이 사회에 대한 혐오와 허무가 잘 나타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란 곳이 그저 달콤하게 웃고 사랑하고 행복해하기엔 너무나 부조리하다. 더 깊게 고민하고 사고한다면 자연스레 우리는 깊은 어둠의 심연 속으로 일단은 침착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김경욱 소설의 또 다른 강점은 ,'누가 커트코베인.....'에서도 나타났듯, 소설이 매우 다양하게 읽힌다는 점, 즉 열려있는 이야기란 의미다. 난 직접적인 소설은 싫다. A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B라는 이야기를 매개 삼는 소설은 질색이란 의미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돈밖에 모른다' 는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 '악질적인 일수업자가 순진한 대학생을 파멸로 몰아 넣는 이야기'는 싫다는 말이다. 직접적인 소설들이 지닌 약점은 메시지와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너무 좁다는 의미다. '호수같은 눈망울' 이란 비유가 평범한 표현인 것도 비유 대상(눈망울)과 비유(호수)의 간극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이런 이야기가 늑대인간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김경욱의 소설은 이야기와 메시지의 간극이 매우 넓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나처럼 '누가 커트코베인....' 을 읽고 그 넓은 간극에 나만의 해석을 즐겁게 펼칠 수 있다. 물론 친절한 소설(범인은 누구고 그가 왜 죽였는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는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답답할 수도 있다.


끝으로 이성을 혐오하면서도 스스로 이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끌렸다. 허무주의가 팽배한 분위기 만큼이나 그는 이성과 논리에 호의적이지 않다. 칼처럼 날카로운 이성을 지니고서도 남에게 상처만 주고 스스로는 어떠한 작품도 창조해내지 못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늑대인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반이성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그 누구의 소설보다 계산적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떠한 상황도 허투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상징도 곳곳에 숨어있다. 이성에 대해 적대적이면서도 스스로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읽어야 재미가 배가되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김경욱이 보여준 역설도 난 매력으로 여겨졌다. 니체가 좋고 카뮈가 좋다고 하면서 논리와 이성으로 밥벌이를 하는 나의 모습과도 오버랩된 것도 있다. 물론 최근에 내가 만난 소설가들도 김경욱 만큼이나 좋은 소설가다. 하지만 소설과와 독자도 결국 관계다. 그 관계는 서로의 취향과 사고가 절묘하게 조화되어야 더 끈끈하게 연결되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김경욱은 내가 만난 최고의 소설가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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