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 사는 30대 신혼 부부, 조씨와 유씨. 맞벌이를 하는 이들은 대부분의 점심을 밖에서 해결한다. 잦은 야근으로 저녁 역시 집에서 먹는 경우가 별로 없다. 주말에도 자주 외식을 한다. 설거지를 극도로 싫어하는 남편 조씨의 강력한 요청 때문이다. 집에선 가끔 술을 마시는 정도. 식료품 구입비보다 주류 구입비가 더 많은 때도 있다. 하지만 부인 유씨는 잦은 외식으로 조미료 섭취가 늘어나면서 건강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고, 아침만이라고 집에서 챙겨먹자고 주장했다. 이에 남편 조씨는 일주일에 한 번 집안일 해주는 아주머니를 고용하는 조건으로 응했다. 덕분에 2-3주에 한 번씩은 대형 할인 마트에서 장을 본다.
보통 장보기는 두부, 계란 코너에서 시작해 고도리 방향으로 돈다. 두부는 마파두부 양념과 함께 산다. 세상에서 달걀 후라이를 가장 좋아하는 신랑 조씨 때문에 계란은 꼬박 꼬박 구입한다. 다음은 야채와 과일코너. 가끔 아침 대용으로 먹을 수 있는 호박을 사거나, 그나마 신랑 조씨가 먹는 야채 오이, 연근 등을 선택한다. 과일을 좋아하는 아내 유씨는 포도, 키위, 오렌지를 구입한다. 이 때 식이섬유 섭취에 관심이 없는 신랑 조씨는 육류 코너의 붉은 살코기를 구경한다. 하지만 아내 유씨는 육류 코너를 지나, 생선 코너의 연어를 장 바구니에 넣는다. 스낵코너에서는 술안주로 마른 김이나 다시마, 쥐포 등을 사고, 곧바로 술 매대로 향한다. 보통 와인 한 병에 수입 맥주 6캔을 산다. 쾌변을 중시하는 부부답게 우유, 두유, 쾌변 요구르트 등 유제품은 꽤 많이 산다. 보통 한 번 장볼 때 드는 비용은 약 9-10만 원 선. 한 번 장을 보면 2주 가까이 먹는다.
저널리스트이자 사진가인 피터 멘젤의 <헝그리 플래닛-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는가>를 읽고난 뒤, '나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지' 확인해봤다. 식탁에 올라온 음식은 다양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식탁위의 반조리식품은 우리 부부가 화학조미료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다는 점을 말해줬다. 또한 술, 군것질, 안주 등이 일주일간 먹는 음식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아, 결혼 전에 비해 건강 상태가 나빠졌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비만 부부가 될 흔적도 엿보인다. 연근, 계란후라이, 생선 구이 등을 제외한 반찬 등을 시댁과 처가에서 얻어먹는다는 사실에서, 독립은 했지만 여전히 부모님에게 의존하는 우리 사회 젊은 부부의 모습도 엿볼 수 있다. 종종 밖에서 밥을 먹는다는건, 곧 사회가 젊은 노동자들을 빡빡하게 굴리고 있다는 의미도 된다. 이처럼 한 가족의 식탁엔 많은 정보가 담겨있다. 때문에 피터 멘젤은 식탁 위 음식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은 각 국의 평범한 가족의 식탁을 덤덤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식탁위의 일상적인 음식은 현재 지구상 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사는 두도씨 가족은 일주일치 식품으로 트렁크 가득 장을 보고, 바쁜 일상에서도 식사 시간의 즐거움을 지키려고 애쓴다. 내전으로 도시 전체가 굶주리던 시절을 너무나 잘 기억하기 때문이다. 사라예보에 사는 두도씨 식탁 위에는 동유럽 내전의 아픔이 아직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차드 난민촌에 사는 아부바카르씨 가족은 세 끼 모두 배급받은 곡식으로 아이쉬를 먹는다. 아이쉬는 걸쭉한 죽을 꾸덕꾸덕하게 응고시킨 것이다. 식료품가게는 워낙 비싸 번 돈으로 음식을 사먹긴 어렵다. 브레이드징 난민촌의 식탁에선 절대 빈곤의 이야기가 곧 현실이다. 반면 미국 노스캐롤라이나에 사는 레비스 씨 가족은 한 달에 패스트푸드 음식 구입에만 65,000원 가까이 지출한다. 당연히 가족에게 닥친 가장 큰 문제는 고도 비만이다. 차드와 미국의 식탁은 전지구적인 양극화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영국에 사는 베인톤씨 가족은 일주일 양식의 대부분을 반조리 냉동 피자나 주스 박스로 채운다. 반조리 식품의 확산은 ‘빠르고 편하게’를 외치는 사회의 단면이다. 고도화된 자본주의 사회는 식사를 입이 행복한 시간에서 단순히 배 채우는 시간으로 전락시켰다. 베이징에 사는 둥씨 가족은 까르푸에서 장을 보고 맥도날드를 즐겨 먹는다. 중국 전통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모습은 식탁 위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배급 카드를 통해 음식을 분배 받는 쿠바의 코스타씨 가족. 하지만 해외 친척이 보내주는 돈으로 국영 마켓에서 비싼 식료품을 추가로 사야만 한다. 쿠바의 사회주의 역시 유토피아를 건설하진 못했다. 바다표범을 직접 사냥해 단백질을 보충하는 그린란드의 매드센 가족의 식탁은 아직까지 문명이 오염시키지 않은 자연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지나친 식사로 배가 부르기 전에 젓가락을 놓는다는 의미의 ‘하라 하치 부’를 강조하는 오키나와 노인들의 식탁에서 장수의 비밀을 엿볼 수 있다. 말 그대로 식탁 위에는 국제 정세와 사회 변화, 환경 문제 그리고 사회 문제에서 개인의 건강 문제까지 인류의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다.
에필로그를 보니 이 책은 일본 NHK-TV 다큐멘터리 취재 차 이스탄불로 날아가며 시작됐다고 한다. 실제로 책을 읽는 내내 책의 내용을 TV 프로그램으로 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제작비가 문제겠지만) 예전에 프리미어리그를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고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방송은 모두에게 익숙한 축구 이야기를 시작으로 프리미어리그에 불어닥친 신자유주의의 바람과 그에 저항하는 축구팬들의 열정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전 세계를 지배한 신자유주의. 그 전까지 귀에 딱지가 생기도록 듣던 말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는 너무나 큰 이야기였고, 사람들의 피부에 와닿지 않는 말이었다. 때문에 당시 방송은 프리미어리그라는 구체적 공간의 변화를 통해 커다란 이야기를 우리가 살아 숨 쉬는 공간의 일상적인 이야기로 바꿔놓은 것이었다. 사람의 뇌는 작은 것에 쉽게 반응을 보인다. 때문에 세계적인 양극화라는 큰 단어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편, 차드 주민의 빈곤과 미국인들의 비만이 갖는 의미는 쉽게 이해한다. 인도의 빈곤을 만날 듣는 것보다, <슬럼독밀리어네어>에 비친 주인공의 열악한 삶이 훨씬 가깝게 다가온다. 그런 점에서 <헝그리플래닛>은 전 세계의 식탁 사진을 통해 매우 방대하고 심도 있는 이야기를 암시해준다. 자연스레 우리의 사고는 전 세계의 식탁에서 전 지구적 사회 문제까지 확장된다. <헝그리플래닛>의 강점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씨 부부의 식탁 역시 이야기의 층위를 확장시킨다. 조씨의 경우 건강을 위해 식이섬유 섭취를 늘여야 했고, 신부 유씨 역시 조미료를 줄이기 위해 가급적 집안에서 식사를 해야 했다. 또한 결혼한 자식들 밑반찬 해주느라 고생하는 부모님들을 생각해, 힘들더라도 직접 반찬을 만들어 먹어야 한다. 그말인즉슨, 회사일 못지 않게 집안일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의미고, 이는 다시 신랑 조씨의 설거지 문제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적어도 밑반찬 만드는 데 큰 힘을 보태지 않을 거라면, 신랑 조씨는 설거지라도 적극적으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 그게 싫다면 신랑 조씨는 좋아하는 달걀 조림을 직접 해먹어야 할 것이다. 음식은 결국 인간의 가장 밀접한 생활이다. 때문에 '세계는 지금 무엇을 먹고 있는가'란 단순한 질문은 모든 이야기로 확장될 수 있다. <헝그리 플래닛>이 전한 식탁 이야기는 이제 시작일 뿐이다. 물론 세계 양극화건, 조씨네 설거지 문제건, 이야기를 확장시켜나갈 주인공은 바로 독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