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커트 코베인을 죽였는가
김경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엘리엇(T.S Eliot)의 <황무지Wasteland> 중 '4월은 잔인한 달' 이란 유명한 시구가 있다. 어째서 유명해졌는지 모르겠지만, 나도 시구의 정확한 의미를 모른 채로 가끔 인용했던 기억이 있다. 예를 들어 화창한 봄날, 도서관에서 중간 고사 준비를 하던 때면 종종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하더니 정말 우리 신세도 잔인하다' 라고 무식하게 얘기하곤 했다. 하지만 엘리엇이 말한 의미는 전혀 달랐다. <황무지>가 시작되기에 앞서, 엘리엇은 고대 무녀(巫女)였던 시빌(Sibyl)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시빌은 신에게 영원한 젊음이 아닌, 영원한 삶을 요구한 댓가로, 늙은 몸으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가야 하는 비극을 겪게 됐다. 이 짧은 이야기는 <황무지>의 주제이자 시작이다. 엘리엇의 눈에 비친 당시 현대 사회의 모습은 시빌의 삶과 유사했다. 어떠한 가치있는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한, 몸은 살아있으면서도 정신은 죽어버린 문명. 그것이 바로 엘리엇이 목도한 현실이었다. 젊음을 잃어버린 채 목숨만 연명해가는 시빌의 삶은 곧 현대 사회의 상징이다. 모든 생명을 잉태하는 4월. 하지만 4월은 기계적이고 반복적으로 잎을 만들고 라일락을 피울 뿐, 이미 우리 문명은 4월이 만들어야 할 가치와 정신을 창조하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겉으로는 모든 것을 창조하면서도 실제론 어떠한 가치 있는 정신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4월의 모습은 역설적으로 더 잔인해 보였던 것이다.


너바나의 리드 보컬 커트 코베인이 바라본 현대문명도 엘리엇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무기력하게 반복되는 기존의 대중 문화를 경멸했고, 스스로 이에 저항하고자 했다. 하지만 저항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그가 가장 혐오해 마지않던 미국의 대중문명은 커트 코베인을 우상으로 만들어버렸다. 그가 파괴하고 저항하고자 했던 문화가 그를 영웅으로 만든 것이다. 여기서 코베인은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자신은 주류 대중 문화를 벗어나 가치있는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자 했지만, 오히려 그의 행위가 주류 대중 문화의 흐름이 되었다. 결국 그는 자신의 존재가 자신의 의지를 거스르는 아이러니에 봉착하게 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의지에 반하는 자신의 존재를 지운 것이다.


난 김경욱의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를 읽는 내내 이 두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다소 과장된 해석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평범했던 여성이 스타가 되고, 그녀를 광적인 팬이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단순한 미치광이의 이야기로만 읽을 수는 없었다. 내 눈에 장미라는 주인공은 우리 사회 대중 문명의 상징이었다. 순수했던 문명이 점차 자본의 욕망에 휩쓸려 의미있는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했던 것처럼, 소설 속 장미도 스타가 되기 위해 점점 더 타락한다. 커트코베인과 엘리엇이 이야기했듯, 정신이 죽어있는 기존의 문명은 더 이상 존재해서는 안 된다. 먼저 뇌사자처럼 목숨만 연명하는 문명의 숨통을 끊어야 한다.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기 위해선 무(無)의 정신으로 되돌아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소설에서 스토커가 계속 언급하는 폐허의 정신이다. 결국 소설 속 스토커는 장미를 구원하기 위해 장미를 살해한다. 그리고 장미는 죽었지만 주변의 포도송이는 다시 되살아 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장미가 타락하기 이전의 상황, 즉 포도로 대변되는 타락 이전의 문명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로 난 해석했다. 참으로 도식적인 해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김경욱이 소설 전반부에 낸 수수께끼 풀기에 동참해 나름의 답을 얻었다는 즐거움을 느꼈다. 방식이야 어떻든 소설읽기의 즐거움이다.


<누가 커트코베인을 죽였는가>에서 나타났듯 김경욱의 작품은 매우 어둡고 허무주의적이다. 그의 글을 보고 있자면 마치 2차 대전 직후 허무주의에 빠져 괴로워하던 20세기 지식인이 떠오른다. 차들이 속력을 내서 달리는 대교 위를 지나가는 거북이의 모습(Insert Coin), 레밍스처럼 자살을 하기 위해 여행을 떠나는 인물들(토니와 사이다)은 실존주의에 빠져들기 직전의 생에 대한 허무감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허무주의는 그가 '누가 커트코베인...'에서 보여줬던 문명에 대한 혐오에서 시작한다. 장애인 소녀를 거침없이 강간하는 인근 상인들(만리장성 너머 붉은 여인숙), 순정이라는 한 여인에 대한 순수함을 지니고 있었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이 사회의 타락한 문명을 몸으로 체화한 세 주인공 (순정아 사랑해)에서 이 사회에 대한 혐오와 허무가 잘 나타난다. 사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란 곳이 그저 달콤하게 웃고 사랑하고 행복해하기엔 너무나 부조리하다. 더 깊게 고민하고 사고한다면 자연스레 우리는 깊은 어둠의 심연 속으로 일단은 침착할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할 뿐이다.


김경욱 소설의 또 다른 강점은 ,'누가 커트코베인.....'에서도 나타났듯, 소설이 매우 다양하게 읽힌다는 점, 즉 열려있는 이야기란 의미다. 난 직접적인 소설은 싫다. A란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B라는 이야기를 매개 삼는 소설은 질색이란 의미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가 돈밖에 모른다' 는 메시지를 말하기 위해 '악질적인 일수업자가 순진한 대학생을 파멸로 몰아 넣는 이야기'는 싫다는 말이다. 직접적인 소설들이 지닌 약점은 메시지와 이야기 사이의 간극이 너무 좁다는 의미다. '호수같은 눈망울' 이란 비유가 평범한 표현인 것도 비유 대상(눈망울)과 비유(호수)의 간극이 너무 좁기 때문이다.(이런 이야기가 늑대인간에 등장하기도 한다) 이런 점에서 김경욱의 소설은 이야기와 메시지의 간극이 매우 넓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나처럼 '누가 커트코베인....' 을 읽고 그 넓은 간극에 나만의 해석을 즐겁게 펼칠 수 있다. 물론 친절한 소설(범인은 누구고 그가 왜 죽였는지 등이 자세하게 설명되는 소설)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답답할 수도 있다.


끝으로 이성을 혐오하면서도 스스로 이성을 매우 효과적으로 사용한다는 점이 개인적으로 끌렸다. 허무주의가 팽배한 분위기 만큼이나 그는 이성과 논리에 호의적이지 않다. 칼처럼 날카로운 이성을 지니고서도 남에게 상처만 주고 스스로는 어떠한 작품도 창조해내지 못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는 소설(늑대인간)에서 알 수 있듯, 그는 반이성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의 소설은 그 누구의 소설보다 계산적이다. 각각의 이야기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어떠한 상황도 허투로 설정되어 있지 않다.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한 상징도 곳곳에 숨어있다. 이성에 대해 적대적이면서도 스스로는 이성적으로 사고하면서 읽어야 재미가 배가되는 소설을 쓰는 것이다. 김경욱이 보여준 역설도 난 매력으로 여겨졌다. 니체가 좋고 카뮈가 좋다고 하면서 논리와 이성으로 밥벌이를 하는 나의 모습과도 오버랩된 것도 있다. 물론 최근에 내가 만난 소설가들도 김경욱 만큼이나 좋은 소설가다. 하지만 소설과와 독자도 결국 관계다. 그 관계는 서로의 취향과 사고가 절묘하게 조화되어야 더 끈끈하게 연결되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김경욱은 내가 만난 최고의 소설가라고 감히 말할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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