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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병 판매학
레이 모이니헌.앨런 커셀스 지음, 홍혜걸 옮김 / 알마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초등학생 때의 일이다. 골다공증을 소개한 기사를 보고 경악을 한 적이 있었다. 당시의 기억에 따르면, 골다공증은 뼈 안이 텅텅 비어 살짝 쳐도 뼈가 부러지게 되는 무서운 증상이었다. 에이즈만큼이나 무서운 병이라고 생각했다. 나이 든 여성에게 쉽게 나타나는 현상이란 설명도 덧붙여졌다. 혹 우리 엄마가 골다공증에는 걸리지 않을까 며칠 간을 전전긍긍 하기도 했다. 내 뼈가 수수깡으로 변하다 가운데가 텅 빈 과자로 다시 변하는 악몽을 꾸기도 했다. 다행이 지금까지도 우리 엄마의 뼈 밀도는 높은 편이며 아직까지 단 한번도 골절상을 입지 않으셨다. 그러나 내게 여전히 골다공증은 에이즈만큼이나 무서운 병이며, 엄마에게 칼슘 섭취를 많이 하라고 강박적으로 얘기하곤 한다.
하지만 무식하면 무서운 법이다. 나이 든 여성의 골 밀도가 줄어드는 것은 노화의 자연스러운 현상 중 하나다. 무지했던 나는 당시 신문을 통해 판매되던 질병을 고대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적어도 <질병판매학>에 따르면 그렇다. 두 명의 의학 저널리스트가 공저한 <질병 판매학>은 전 세계의 제약회사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질병을 판매했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책이다. 다시 말해 내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골다공증도 결국 제약회사가 골다공증 예방약을 판매하기 위해 과장한 증상이라는 것이다. 책은 질병 산업에 대한 충격적인 내용을 방대한 취재 내용과 사례를 들어 차분하게 설명한다. 질병 산업을 이끄는 한 축에는 제약회사가, 다른 축에는 의사와 정부 산하 기관이 있다. 제약회사는 의사의 전문적 지식과 정부의 공익 캠페인을 적절히 이용해 새로운 질병을 판매하고 그 대가로 엄청난 약의 판매 수익을 거둔다.
책에 소개된 병은 총 10가지. 하지만 기본적인 패턴은 비슷하다. 우선 두려움을 마케팅 하는 것이다. (어린 꼬마였던 내가 며칠 간 악몽을 꾸었듯이 말이다.) 일단 새로운 병을 만들어야 한다. 이 경우 골다공증처럼 자연스런 노화나 징후를 질병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이 하나 있다.(폐경도 마찬가지다. 미국에서는 폐경을 병으로 몰아가 엄청난 양의 호르몬 제를 판매했다.) 또 다른 방법은 질병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를 늘리기 위해 고혈압의 기준을 점점 낮춘다. 기준을 낮출 때마다 새로운 고혈압 환자가 탄생한다. (미국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혈압이 120-80인 사람도 고혈압 전 단계로 간주 된다. 새롭게 낮아진 고혈압 가이드라인의 결과, 고혈압 추정 환자는 5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골다공증도 마찬가지여서 미국에선 30세 여성의 골 밀도를 정상의 기준으로 설정해놓았다. 자연히 30세가 넘는 사람은 전부 잠재적인 골다공증 환자다.) 질병을 만들거나, 병의 기준을 낮추는 역할은 의사들이 맡는다. 의사들은 학회나 세미나를 통해 혈압과 콜레스테롤의 정상 수치를 낮게 만든다. 물론 의사들을 움직이는 주체는 제약회사다. 의사들은 제약업계로부터 다양한 연구지원비와 세미나 비용을 지원받는다. 콜레스테롤의 정상 수치를 낮췄던 국립 보건원의 연구원이 제약회사로부터 43만 달러와 2백만 달러에 달하는 주식을 받았다는 사실이 미국 국회 청문회를 통해 드러나기도 했다. 약의 안전성을 평가하는 미국식품의약국의 업무 중 50% 이상이 제약업계의 지원을 통해 이뤄진다.
더 큰 문제는 제약회사의 약이 효능보다 부작용이 크다는 사실이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을 사례로 보자. 이 증후군 역시 의학계에서 질병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논란이 많다. 이를 치료하기 위한 로트로넥스란 약이 등장했다. 하지만 약의 효능은 미비한 반면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로트로넥스는 회수와 재 승인을 반복하다, 결국 미국식품의약국 자문위원회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 조사에서 자문위원회는 로트로넥스의 부작용이 높음을 인정, 관련 교육을 받은 의사만이 처방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또한 제약회사는 효능을 과장하기 위해 통계의 함정을 이용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고혈압 환자는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이 5-6%이고 정상인 사람은 3-4%이다. 고혈압 예방 약을 복용할 경우 심장마비에 걸릴 확률은 5%에서 4%로 감소할 뿐이다. 하지만 제약회사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의 심장마비 걸릴 확률을 20% 감소시켜 드립니다.')
물론 의약업계를 무조건 매도할 수는 없다. 또한 그들의 노력으로 많은 질병이 정복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들의 지나친 이윤 추구다. 비단 제약회사만의 문제는 아니다. 모든 기업들이 오직 이윤만을 최고의 가치로 꼽다 보니 기업이 사회적으로 해야 할 책임은 한 순간에 희석된다. 돈이 된다면 비윤리적인 일도 서슴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 위치한 기업의 현 주소다. <질병판매학>에 등장하는 제약회사들은 신자유주의의 흐름 속에서 탐욕스럽게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한 면모일 뿐이다.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제약회사의 지원으로 여행을 가고 연구를 한 후, 제약회사의 입 맛에 맞는 연구결과를 내 놓는다. 제약회사를 감시해야 할 식품의약국도 제약회사의 돈으로 활동을 하며 그들의 불법 로비에 눈을 감아준다. 결국 이윤을 향해 폭주하는 미친 말을 통제해야 할 사람들이 그 말에 매달려 함께 같은 곳으로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의사와 식품의약국 직원들의 항변에 누구도 강하게 반발하지 못한다. '넌 돈 싫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내가 더 큰 돈을 쫓아 간다는데 뭐가 문제야?' 아무도 자본에서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서 점점 더 희망은 작아진다. 답은 없어 보인다. 결국 모든 것은 자본의 이윤을 위해 이뤄질 뿐.
<질병판매학>은 그럼에도 희망의 작은 불씨가 살아남아 있음을 보여준다. 책에 나오는 정의로운 의사들. 그들이 있기에 제약회사의 질병 판매와 효능 없는 약 판매가 쉽지만은 않다. 수많은 시민단체도 있다. 그들은 의사들과 함께 제약회사를 감시하고 의사, 공무원과 제약회사간의 유착관계를 폭로한다. 미국의 국회도 청문회를 통해 의로운 의사들과 시민단체들에게 제약업계의 구린 구체적 정보를 제공한다. 그 희망의 결과가 <질병판매학>이다. 책 뒷면에 실린 방대한 주석(비판의 근거) 역시 그 노력의 결과다. 자본주의의 맹목적 질주를 거스르는 사람들의 노력이 있기에 아직 희망은 있다. 이 책을 번역한 홍혜걸 기자의 머리말 중 책 전체의 신뢰도를 높여주는 부분이 있다.
"그들(제약회사)의 지원을 이유로 팩트에 벗어난 기사를 쓴 적은 없지만 후원사의 제품이 기사에서 간접적으로나마 돋보이도록 애를 썼던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거대 제약회사들을 감시하는 시민단체와 두 저자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며, 한국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나타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