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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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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갑하고 숨이 막혔다. 목이 죄어 오는 느낌이었다. <로드>를 읽는 내내 불편했다. 침대위를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책을 덮을 수 없었다. 부조리로 점철된 삶에 집착하는 우리네 모습처럼 <로드>가 만들어 놓은 무간도에서 헤어나올 수 없었다. 예전에 위노나 라이더와 에단호크가 주연한 리얼리티 바이츠(한국 제목 청춘스케치)에 에단호크가 부른 'I'm Nuthin'란 노래가 있었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이 노래에 대해 이렇게 평했다. '만약 당신이 교통 정체가 심한 퇴근 길 차 안에서 우울함을 만끽하고 있었다면, 절대 이 노래를 듣지 마라. '난 아무것도 아냐'라고 외치는 에단호크의 염세적인 목소리를 듣다보면 어느 새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다는 강렬한 충동에 빠질 수도 있으니 말이다.' <로드>를 읽으며 에단호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로드>엔 가슴 속에 있는 우울과 몽상의 씨앗을 증폭시키는 능력이 있다. 아마 그 힘은 <로드>의 저자 코맥 매카시가 만들어낸 지옥같은 상황 설정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지독할만큼 건조하고 무덤덤한 그의 문체가 독자의 폐부를 쥐어 짜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통해서 코맥 매카시의 지독한 능력은 이미 눈치챌 수 있었다. 거대한 악 앞에서 그저 동전의 앞면이 나오길 바랄 뿐인 인간의 지독한 무기력함. 노구를 이끌고 악의 뒤를 쫒는 형사의 허무함. 생명이라곤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미국 서부 황무지의 황량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엔 염세적인 암울함이 영화에 팽배해 있었다. 코맥 매카시는 <로드>에서 한 층 더 강력한 지옥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모든 것이 불타버린 세계. 그곳에 홀로남은 아버지와 아들. 그 속에서 부자는 걷기 위해 걷고 살기 위해 산다. 그들의 행동에 목적은 없다. 남쪽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은 폐허 속에서 존재하기 위한 유일한 발부림일 뿐이다. 굶주림에 서로가 서로를 잡아 먹는 인간들은 <로드>의 완벽한 지옥을 완성한다. 아버지는 폐허 이전의 세계를 경험했다. 색이 존재하던 그 시기의 추억이 아비가 맞딱드린 지옥의 세계를 더 흉칙하게 만든다. 밤마다 꾸는 과거의 세계는 그에게 악몽일 뿐이다. 아들은 폐허에서 태어났다. 오직 뿌연 재만 남아있는 폐허만이 아들이 상상할 수 있는 세상의 모습이다. 색이 없는 아이의 세상은 아들이 겪고있는 지옥의 비극을 더 슬프게 만든다.

<로드>엔 오직 폐허를 걷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만 나온다. 그 속에 특별한 이야기나 설명이 없다. 때문에 이 책의 번역가 정영목씨의 말대로 독자는 자유롭게 <로드>의 세계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난 <로드>에서 부조리를 맞딱뜨리고 있는 인간의 실존적 비극을 발견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폐허의 세계. 그 속에서 우린 어떠한 본래적 의미를 찾을 수 없다. 폐허를 피하기 위해 또 다른 폐허를 향해 찾아가는 아버지와 아들의 모습에서 곧 굴러떨어질 바위를 산 위로 올리는 시시프스의 무의미한 노동이 오버랩 된다. 굶주림 앞에서 제 자식도 잡아먹는 인간의 모습은 카프카가 묘사한 '구더기가 들끓고 있는 인간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카프카, 시골의사) 이 같은 비극 앞에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이야기하던 '어떠 어떠한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말하긴 너무 어려워 보인다. 서로를 잡아먹고 짓밟아야만 살아갈 수 있는, 동시에 의미 없는 삶을 계속 이어가야만 하는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한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인간이 처한 비극적 상황을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인간의 나약성 때문이다. 결국 <로드>에 처한 아버지와 아들의 상황은 독자에게 우리의 실존적 비극을 직시하게 만든다. 부자가 처한 극한의 상황은 인간 삶의 알레고리인 셈이다. 책을 읽는 내내 갑갑함을 느낀 것도 이 때문일 게다.


삶의 부조리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부조리를 가려줄 수 있는 거짓 세계를 창조해서 살아간다. 하지만 거짓의 천막을 벗겨낸 사람은 극도의 좌절을 겪게 된다. 여기서 일부는 자살이란 방법을 택하게 된다. 시시프스의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할 바엔 바위에 깔려 죽겠다는 심산이다. <로드>에 등장하는 엄마(아내)도 죽음을 택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폐허를 벗어날 수 없다는 비극 앞에서 택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코맥 매카시의 시선은 아버지에게 맞춰져 있다. 아버지의 삶 역시 폐허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무의미한 노동을 지시한 부조리 신에게 대항한 시시프스처럼 아버지는 무의미에서 스스로의 의미를 만들어낸다. 바로 아들이다. 카뮈는 '자살을 택한 행위는 결국 부조리 신에게 인간이 무릎을 꿇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하지만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사람은 부조리 신을 극복할 수 있다. 바위를 올리는 과정에 저만의 의미를 창출해내며 부조리 신에게 강력한 카운터 펀치를 날린 시시프스. 결국 아버지도 폐허만 남은 세계 속에서 아들이란 의미를 갖고 능동적으로 삶을 개척해나가며 부조리를 극복한다.


극도의 염세적 분위기가 책 전체를 휘감고 있는 <로드>. 하지만 코맥 매카시는 마지막으로 인간에 대한 신뢰를 놓지 않는다. 결국 부조리를 극복하는 것도, 부조리한 세상을 계속 이어가는 것도 인간의 능력이다. 인간은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 없는, 완벽하게 객관화 될 수 없는 주체적 존재다. 오로지 행위 자체만으로 실증되는 역동적인 존재다. <로드>에도 이같은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배여있다. 죽은 아버지를 두고 낯선 사내와 함께 길을 나서는 아들의 모습에서 연대라는 힘으로 부조리를 극복했던 과거 선배들의 모습이 떠올렸다. 간만에 소설을 읽으며 눈물을 쏟았다.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다. 극한의 부조리 속에서 희망을 이어가는 인간의 모습에서 느껴지는 연민의 눈물이었다. 양념과 작위로 뒤 범벅인 소설, 거짓 세계의 모습을 확대 재생산하는 소설 사이에서 만난 <로드>는 보물 그 자체다. 코맥 매카시 같은 작가가 존재한다는 것 역시 나에겐 삶의 부조리를 극복할 수 있응 희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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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석제의 농담하는 카메라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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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소설가는 가슴이 뜨거워야 한다고 믿었다. 용암과 같은 열기가 몸 안의 좁은 공간을 견디지 못하고 밖으로 폭발하듯 쏟아질 때, 그 더운 에너지가 이야기의 형식으로 완성된다고 생각했다. 그 열기는 천성일 수도 있고 살면서 겪은 고통의 산물일 수도 있다. 박래부의 <작가의 방>에 등장한 공지영의 모습은 천성적으로 뜨거운 사람이란 인상을 받았다. 내부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 글을 밖으로 토해내지 않을 수 없는 사람. 반면 얼마 전 타계한 박경리 선생은 고통의 인고가 만들어놓은 사리를 가슴 속에 아로 새긴 사람이었다. 한국 전쟁 과정에서 남편과 아들을 잃은 박경리 선생. 그의 외동딸은 실제로 그 시절의 고통이 어머니를 소설가로 만들었다고 밝혔으며, 선생 역시 이를 인정하기도 했다. 극심한 궁핍 속에 <주홍글자>라는 역작을 완성한 미국의 소설가 나다니엘 호손. 그도 외교관 생활을 통해 삶이 안정되어 가면서 예전과 같은 작품을 쓰지 못했다. 개인적으로 고통이 공급하던 내부의 열기가 외부의 안정화와 함께 식은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런 내 생각을 뒤흔드는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성석제다. 그를 보면 치열함, 뜨거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난 성석제를 생각하면 중국 길거리에서 파는 웃통을 훌훌 풀어 제치고 천진난만하게 웃는 스님상이 떠오른다. 인간사의 시름일랑 속세에 묻어놓고 이백과 함께 숲속의 정자에서 달을 안주 삼아 술을 마시고 시를 읊을 것만 같은 사람. 글을 통해 내가 받은 성석제의 인상이다. 예전 블로그에 그를 이빨 센 동네 구라 농사꾼으로 비유한 적이 있다. 분명 그는 가슴 속의 고통이나 뜨거움이 아닌, 낙천과 긍정의 에너지로 이야기를 풀어내는 사람이다. 그에겐 특별한 이야기 소재는 필요 없다. 단지 고개를 돌려 눈에 들어오는 사물이면 모든 그에게 소재가 될 수 있다. 그것이 버스에 붙은 안내문이건, 산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왕파리이건 간에 말이다. 일단 소재가 눈에 포착되면 그의 예리한 관찰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곧 이어 화려한 말발로 어떤 소재든 흥미로운 이야기로 바꿔놓는다. 마치 그의 산문을 읽고 있자니, 동네 주민의 이야기에 잠시 걸음을 멈춘 나그네가 된 기분이다.


그의 산문집 <농담하는 카메라>엔 성석제의 특성이 고스란히 잘 나타나있다.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지만, 구분의 큰 의미는 없다. 그냥 그가 보고 겪은 사소한 일들이 과거 우리 조상들의 해학과 함께 녹아져 있을 뿐이다. 제주도에서 그가 한 표지 여행은 그의 해학을 가장 잘 보여준다. 문자중독증에 걸린 환자답게(자신이 스스로를 칭한 표현) 여행지에서 찾아볼 수 있는 표지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데, 그 집요함이 참으로 유쾌하다. ‘약진하는 제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멀리 펄쳐진 검푸른 바다와 수평선은 매우 아름다우며 비록 해발 148m에 불과한 봉우리지만......’이라고 적혀있는 사라봉 정상의 표지판을 보고 그는 이렇게 궁시렁거린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제주시는 언제나 약진만 하는지, 바다는 늘 검푸르고 수평선은 애무 아름답기만 한 것인지 묻고 싶다. 또 해발 148m에 ’불과한‘이란 표현이 마음에 걸린다. 해벌 몇 미터가 되어야 ’불과한‘이라는 겸손한 표현에서 해방이 될지 궁금하다.’ 산행 도중 김밥과 라면을 먹던 성석제는 자신 주변에 있는 한 무리의 파리떼를 만났던 이야기도 참으로 재미나다. ‘“어이 친구. 김밥이나 라면 중 하나는 양보하는 게 좋을 거야. 둘 다 먹는 건 너무 탐욕스러운 거 아니겠어? 남들도 생각해야지.” 그 파리들 중 어느 녀석에게 발성기관이 있다면 그런 말을 했을 법했다.’ 정말이지 그를 직접 만나보면 얼마나 더 많은 유머를 접할 수 있을지 궁금하다. 동시에 그는 식도락가다. 책에는 음식에 관한 이야기가 상당히 많다. 막국수, 생맥주, 햇쌀밥, 복숭아, 동파육, 중국술, 자장면 등등. 구수하게 풀어내는 그의 음식 이야기를 듣고 있자면 금세 입이 심심해지고 배는 허기져온다. 농사꾼 이미지는 여기서 발견한 것 같다.


아내는 성석제의 글을 이렇게 평했다. “이상하게도 성석제의 산문은 재밌는데도 중독성은 없는 것 같아.” 실제로 나도 <농담하는 카메라>를 읽는 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물론 자기 전 침대에서 그의 책을 펼친 이유도 있겠지만, 그 보다는 그의 글에 자극적 양념이 적다는 것이 더 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도시 이야기꾼이 아닌 시골 이야기꾼을 떠올린 것도 이 때문일테다. 그래서 더욱 난 성석제가 좋다. 잠들기 직전 책을 펴고 있는 순간 만큼은 시골의 어느 마을에선 나그네가 되어 그의 이야기를 편안한 마음으로 듣는다. 책을 덮는 순간 이야기세계의 나그네는 현실 세계로 돌아오지만, 그 속에서 느꼈던 편안한 마음은 고스란히 간직한 채 잠에 빠져든다. 참으로 유쾌한 하루의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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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크루그먼, 미래를 말하다
폴 크루그먼 지음, 예상환 외 옮김 / 현대경제연구원BOOKS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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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요즘 살기 힘들다.’ 많은 한국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실제로 그들의 호소는 엄살이 아니다. 통계에 따르면, 가구당 부채는 무려 3841만원이다. 전체 가구 빚이 640조원을 넘어섰는데, 지난해에 비해 벌써 9조원이나 증가한 수치다. 경제 성장률은 4%로 예상되는 가운데 물가는 5% 이상 인상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어두운 그림자라 어른거린다. 하지만 시민들의 하소연이 엄살이 아님을 보여주는 더 중요한 지표가 있다. 바로 양극화 지수다. IMF직후 97년 0.0485에서 2004년 0.1032로 증가한 이후 떨어지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정권 시절, 평균 실업률은 3.6%에 불과했지만 체감 실업률은 무려 8%에 달했다. KDI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중산층 10명 중 한 명은 빈곤층으로 전락했다. 한국의 빌게이츠 증가로 국가 평균 소득은 계속 증가하지만 나머지 시민들은 더욱 살기 힘들어지는 양극화가 극심해지는 현상이 극명해지고 있다.


너무 힘들었던 국민들은 결국 이명박 후보를 선택했다. 거짓말을 하건, 위장전입을 하건, 과도하게 많은 재산을 갖고 있건 상관없이 경제 하나만 살리라는 게 국민들의 바람이었다. 물론 여기서 경제라 함은 거시적 경제 지표만이 아닌, 오히려 서민 개개인의 지갑 두께를 의미한다. 대통령도 국민들의 욕구를 모르지 않았던 것 같다. 선거 당시 홍보 영상에서 국밥 할머니의 입을 빌어 경제 살리기 운운한 것 보면 말이다. 하지만 미국의 진보적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의 분석에 따르면 불행하게도 국민의 선택은 완전히 잘못됐다. 아니 최악의 선택을 하고 만 것이다.


폴 크루그먼은 그의 신작 <미래를 말한다The Conscience or a Liberal(원제; 진보주의자의 양심)>에서 미국 사회의 양극화를 철저하게 분석한다. 현재 극심한 양극화의 원인은 무엇이며 해결책은 무엇인지를 약 100년에 걸친 미국의 정치경제적 역사를 통해 파헤친다. 결론적으로 그가 분석한 내용의 요지를 말하자면, 양극화 해소를 시장에만 맡겨놓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인 정치경제학적인 방법론의 가치를 확인시켜준다. 그는 미국에서 소득 불평등이 완화되거나 약화된 데 있어 정권이나 연방의회권력의 변화, 즉 정치적 변화가 선행했음을 밝힘으로서 경제적 변화에만 초점을 맞추는 순수경제학적인 접근방법이 현상을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옮긴이의 말. P.10)


그렇다면 왜 양극화가 심해진 것일까? 사실 이에 대한 무수한 분석이 있다. 대표적인 분석이 기술 발전에 따른 소득 불균형론이다. 기술적으로 발달한 사회에서는 과거에 비해 숙련된 인력의 가치가 더 높아졌고 이들에게 더 높은 급여가 제공되었다는 것. 하지만 크루그먼에 따르면 이 논리를 뒷받침할 직접적이고 실증적인 근거는 없다고 말한다. 예전에 10명이 할 일을 1명이 할 수 있게 되면서 양극화가 심해졌다는 의미인데, 크루그먼은 이러한 분석은 소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도나 규범, 정치권력과 같은 사회학 분야는 완전히 무시한 상태에서 그저 수요와 공급만으로 설명한, 불완전한 분석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양극화가 최소였던 60년대 미국에 초점을 맞춘다. 당시 양극화를 줄일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미국의 경기가 호황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강력한 시장 개입주의 정책(뉴딜정책)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그는 말한다. 뉴딜정책의 효과는 미국 경제가 한창 호황 중이던 1920년대와 비교하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시기 정부는 시장에 어떠한 간섭도 보이지 않았고 소득 불평등은 극심했다. 그 결과 1920년대는 도금 시대(The Gilded Age)라는 악명을 얻게 됐다.


크루그먼은 양극화를 불러온 직접적인 근거는 오히려 시장이 아닌 시장 외적인 부분의 변화, 즉 제도와 사회규범이라고 말한다. 제도 중 대표적인 것이 노동조합이다. 전통적으로 미국 노동자의 힘은 강했다. 실제로 가장 평등했던 루즈벨트 대통령 시절 (크루그먼은 이 시기를 대압착시대(Great Compression)로 명명한다. 대공황(Great Depression)에 대응되는 용어로 대공황 직후 미국 사회의 소득 격차가 급격하게 줄어들었다는-소득 차이가 압착되었다는-의미다), 디트로이트에서 전미 자동차 노조는 GM과 역사적인 협상을 이끌어낸다. 그 결과 노동자의 권익은 크게 향상되었고, 경영진과 주주는 예전처럼 자신들의 급여를 자유롭게 인상할 수 없게 됐다. 실제로 전후 경기호황이 끝나던 시절, GM의 CEO이었던 찰스 존슨은 현재의 화폐 가치로 환산하면 약 430만 달러의 연봉을 받았다. 당시에는 호사가의 입방아에 오를 정도로 높은 액수였다. 하지만 현재 월마트의 리스콧 회장의 연봉은 2,300만 달러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기업의 CEO연봉과 비슷한 정도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전후 직후에는 강력한 노동조합이 무차별적인 임금 격차를 막을 수 있는 제도적 힘이 있었다.


더 나아가 당시 사회적 규범이 과도한 양극화를 허락하지 않았다. ‘반발을 통한 제지’와 같은 사회적 규범이 작동한 것이다. 하지만 노동자의 힘과 사회적 규범이 완전히 힘을 잃은 지금 불균형을 제한할 수 있는 힘의 붕괴로 노동자와 경영자의 소득 불균형은 점점 심해져 간다. (크루그먼은 실제로 CEO의 연봉 상승에는 경제적 요소보다 사회적 요소가 많음을 루시언 베드척 교수의 책 <성과와 무성한 보수>를 인용해 분석해낸다. 하나 더. 영국 BP사의 CEO연봉은 회사 규모가 반 정도인 미국 셰브런 사 CEO 연봉의 반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 유럽에서는 아직까지 소득 불평등에 대한 사회적 규범이 작동하는 것이다.) 끝으로 크루그먼은 기술결정론자와 세계화론자들에게 반문한다. “기술발전과 세계화가 양극화의 원인이라면 미국의 양극화와 프랑스, 스웨덴의 양극화 정도가 왜 다르게 나타나냐?”고.


아쉽게도 현 정부의 정책은 1980년대 미국의 소득 불평등을 1920년대 도금 시대 수준으로 악화시킨 레이거노믹스와 상당히 닮아있다. 우선 기업들의 세금 감세를 추구한다. 기업들의 세금을 줄여주면, 기업들이 남는 돈으로 투자와 고용을 늘일 것이라는 발상에서 비롯된 것인데, 이는 과도한 낙관에 근거한 발상이다. 세금 감면이 곧바로 고용과 투자로 이어질 것이란 보장이 없는데다, 부시의 감세 정책에서 알 수 없듯, 감세 효과는 경제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함이 드러났다. 반면 감세 정책 결과 세수가 줄어든 것은 물론이고 불평등은 심화된다. 현 정부는 가끔 시장주의 정책을 고수하다가도 답답한 마음에 시장에 엄청난 정부 간섭을 시도하는 갈지자 행보를 보이기도 한다. 물가 안정을 위한 52개 품목에 대한 관리(한 마디로 정부가 보고 있으니 함부로 올리지 말라는 의미일 것이다.) 정책이나 추경예산 편성 요구 등이 대표적이다. 세계 경제의 악화만을 근거로 현 정권은 시장의 불완전한 작동에 마냥 손을 놓고 있다. 실제로 비즈니스 프렌들리 정권이 들어섰지만 세계 경제의 불안으로 인해 고용이나 투자는 전혀 늘고 있지 않는 실정이다.


제도적으로도 양극화 해소가 요원해보이기는 마찬가지. 친 기업적인 대통령의 등장으로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노조의 힘줄이기에 나섰다.(실제로 노동자들은 올해 사측의 태도가 돌변했다고 말한다. 아예 협상 테이블에 나오지 않는 불성실한 회사도 급증했다고 한다.) 하지만 중산층의 시대가 가능했던 미국의 1950-60년대는 전국 자동차 노조의 강력한 권한과 같은 사회 제도에 힘입었음을 분명히 기억해야 한다. 현 정권이 보이는 반 노동자적 접근은 결코 국민이 애초에 바랐던 ‘국밥 아주머니 지갑 불려주기’는 불가능 할 수밖에 없다. 동시에 현 정부는 복지 예산 증가에 병적인 민감함을 드러냈다. 이명박 대통령이 집권할 초기, 그는 70년대식 빵 불리기 론을 내세웠다. 우선 기업들이 빵을 불려야 그 빵 부스러기들이 국민들에게도 떨어진다는 의미였다. 기업이 부유해져서 그 기업들이 많은 노동자를 고용해 수익을 분배하고 그 수익으로 또 다시 노동자들은 더 많은 소비를 하게 될 것이라는 원초적인 발상이 이명박 정부의 경제 살리기 모델이었다. 하지만 그 동안 서민들이 힘들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빵의 크기가 아닌, 빵을 나눠주는 기제에 문제가 원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충분한 복지 예산은 국민들의 지갑을 최소한 도로 유지해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된다.


철저히 미국식 모델을 추구하는 한국. 때문에 크루그먼이 분석한 미국의 양극화는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폴 크루그먼의 <미래를 말한다>를 읽고 난 더욱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의 예리한 분석에 의거하면 현 정부에게 양극화 해소를 기대하는 것은 그야말로 백일몽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럼에도 우린 현실의 비루함을 억누르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난 허황된 꿈을 가져 본다. 이명박 대통령의 ‘빵불리기론’이 코끼리 뒷걸음질 하다가 쥐 잡는 방식처럼이라도 이뤄지길. 설령 크루그먼과 그에 동조한 내 주장이 헛소리 취급을 받게 된다 하더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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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의 와인의 세계, 세계의 와인 2 - 세계의 와인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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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는 이름이 브랜드다. 그가 책을 내면 전부 베스트셀러가 된다. 우리나라에 이만한 브랜드를 가진 소설가가 누가 있을까 싶을 정도다. 브랜드 파워의 시작은 스테디셀러 <먼나라 이웃나라>. <먼나라 이웃나라>의 성공에는 이원복 교수가 지니고 있는 브랜드 파워의 실체가 숨겨져 있다. 우선 그의 책은 쉽다. 특히 어렵고 딱딱한 내용을 쉽게 설명한다. 관련 내용에 대한 완벽한 이해 없이는 불가능한 능력이다. 여기에 이원복 교수 특유의 유쾌한 만화적 표현력이 어려운 주제가 갖고 있는 어깨의 힘을 한 번에 빼버린다. 또한 그가 다루는 영역은 상당히 광범위하다. 송병락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함께 경제문제를 다루기도 했으며 <현대문명진단>에선 사회학 고전을 쉽게 풀어 설명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인문학의 정수인 철학, 신화, 종교를 다룬 <신의나라 인간의 나라> 시리즈를 내기도 했다.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디자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인 이원복 교수의 르네상스맨적 기질이 완벽히 구현된 특성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한 번쯤은 그의 책을 읽어보게 됐다.


이원복 브랜드의 파워를 고려할 때, 최근 와인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는 내가 이원복 교수가 쓴 와인 책을 선택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1권인 <와인의 세계>를 먼저 봤고 이후 한 달 정도 후에 2권 <세계의 와인>을 구입했다. 먼저 말해 둔다면 2권을 구입하게 만든 것은 분명 이원복 브랜드의 힘이었다. 1권 <와인의 세계>는 몹시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우선 딱딱한 내용도 만화처럼 쉽게 만들어버리는 이 교수의 전기밥솥 효과는 <와인의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만화책을 읽는건지, 두꺼운 와인 전문 서적을 읽는건지 분간이 잘 안 갔다. 사실 그는 전작에서 세부적인 재미 못지않게 전체의 흐름을 한 눈에 이해하게 도와주는 넓은 시야를 자랑했다. 하지만 <와인의 세계>에서는 설겁게 묶여서 조각조각 형태를 구성하는 짧은 소주제들로 구성되어 있다. 책을 읽어도 봉사가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듯한 답답함은 지울 수 없었다. 물론 와인이라는 주제가 워낙 방대했을 수도 있겠다. 다른 와인 서적과 비교하면 이원복 교수의 책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다뤘던 다른 주제들이 언제 한 번 가볍고 쉬운 적이 있었던가. 그가 브랜드 파워를 얻을 수 있었던 것도, 손에 잡히지 않는 커다란 이야기를 한 입에 쏙 들어가도록 만들어 줬기 때문이었다.


2권을 보고 좀 더 큰 실망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1권과 겹치는 내용이 많았다. 예전 그의 책에서는 찾아 볼 수 없던 부분이다. 애초에 기획부터 덜 완벽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각 국가의 와인을 정리해 놓는 부분도 와인의 역사란 커다란 책을 그저 작게 요약만 해놓은 느낌이었다. 너무나 많은 백과사전식 지식들이 어수선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저자가 유럽에서 유학을 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유럽이 와인의 고장이란 판단 때문일까. 세계의 와인이라고 하기엔 최근 떠오르는 신대륙 와인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마치 신대륙 와인 설명 부분은 고등학교 국사 수업 시간에, 기말고사 범위에도 포함되지 않아 항상 구렁이 담 넘어가듯 지나간 현대사 부분을 보는 듯했다.


이원복 브랜드에 이처럼 뒤바뀐 평가를 하는 데는 독자의 변화도 한 몫했단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실용서적의 내용은 둘째 치더라도 백과사전식 정보 사이사이에 얼굴을 내미는 이념이 불편했다. 이미 중앙일보에 <세계사 산책>이란 이름으로 중앙일보 만평 수준의 정치색을 드러냈던 이원복 교수. 와인을 설명하면서도 부지불식간에 자유 무역 및 자율은 미덕이며 시장경제에 반하는 규제는 좋지 못하다는 인식을 끊임없이 강조한다. 정확히 지적할 수는 없겠지만 어찌 신대륙 지역 와인의 성장 이면에 탈규제만이 있었겠는가. 오히려 한 편으로는 유럽에서 와인에 대한 엄격한 규제를 했기 때문에, 현재의 전통과 명성을 유지하는 이유가 된 것은 아닐까.


예전엔 쉽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철학에 관심이 있으면 일단 이원복 교수의 <신의나라 인간의 나라>를 읽어봐. 정말 대단한 책이야.” “애가 책을 잘 안 읽으면 일단 <먼나라 이웃나라>를 사줘요. 어느 순간에 얘가 나름 유식해질테니” 하지만 지금 난 와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에게 선뜻 이 책을 권하기 어렵다. 그가 예전에 비해 능력이 줄어들었던, 땀을 덜 흘렸던 간에 기존의 저작에 비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다만 이번에 느꼈던 이원복 브랜드 광팬의 실망이 일시적이었으면 하는 바람은 있다. 예전에 선배가 김탁환의 리심 2권을 읽고 이렇게 말했던 적이 있다. “2권 내용이 너무 루즈한게 출판사에서 강제로 3권을 요구한 게 아닌가 싶더라고.” 참으로 소설가에 대한 애정이 담긴 해석이다. 나도 그냥 애정이 담긴 음모론을 제기하고 싶다. “혹시 최근 불고 있는 와인 붐을 이용하기 위한 출판사의 과도하고 조급한 기획이 이원복 브랜드의 진가의 발휘를 방해한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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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장하준 교수가 또 책을 들고 나왔다. 여기서 '또' 란 의미는 '촘스키가 또 새로운 책을 냈다' 에 사용된 '또'와 비슷하다. 기존의 주장을 더욱 정교하게 포장해 들고 왔다는 의미다. 실제로 장하준 교수의 신작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전작 <사다리 걷어차기>의 연장선상에 있다. 사다리를 걷어차던 사람들이 나쁜 사마리아 인으로 바뀌었을 뿐, 그의 주장은 한결같다. 보호무역으로 성장한 선진국들이 국가 성장에 적합하지 않은 신자유주의 전략을 개발도상국에게 강요한다는 이야기. 하지만 <나쁜 사마리아인>은 보다 심도 있는 비판을 가한다. <사다리 걷어차기>의 주요 비판 근거가 역사적 사례였다면(영국도, 독일도, 미국도 초창기에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강요하는 다양한 정책들을 전혀 따르지 않았다는 역사적 사실), 이번에는 논리적인 이론을 근거로 신자유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사다리 걷어차기>가 장하준 교수 이론의 윤곽을 드러냈다면, <나쁜 사마리아인들>은 드러난 윤곽의 눈, 코, 입을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장하준 교수가 지적하는 신자유주의의 이론적 한계도 한 두 개가 아니다. 우선 신자유주의는 실제로 '자유롭지' 못하다. 다시 말해 자유로운 경쟁이 이뤄질 만한 토대가 마련돼있지 않다. 장하준 교수는 이를 '기울어진 경기장' 이라고 표현한다. 예를 들어 관세 철폐의 경우 개발도상국의 타격이 훨씬 크다. (미국의 관세는 WTO 이후 7%에서 3%로 줄어들었다. 반면 인도는 71%에서 32%로 감소했다.) 지적재산권 보호 강화도 특허가 거의 없는 개발도상국에게 큰 이득이 없는 조항이다. (게다가 보호 기간은 계속 늘어나고 있다.) 기업규제가 완화되면서 선진국의 기업들은 활개를 치겠지만, 개발도상국은 활개 칠 기업조차 갖고 있지 않다. 금융자유화도 마찬가지다. 개발도상국으로 들어오는 금융자본은 신자유주의자들이 얘기하는 것만큼 경제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자본의 유동성 위험-외국 자본이 한 번에 빠져나갈 위험- 은 둘째치고, 외국인 직접투자의 경우도 인클레이브 시설투자-해당 지역 노동자들에게 단순 조립 업무만 맡기는 방식의 투자-로 인해 파급 효과가 미미한 경우가 많다.) 민영화도 국영화 오류의 해답이 될 수 없다. 독점 민영화 기업이나 정부의 보조를 받는 민영 기업의 경우 국영 기업의 모순을 그대로 지닐 수 있다. 문제의 핵심은 민영화/국영화 구분의 소유 방식이 아니란 의미다. 공기업의 문제점은 민영화가 아닌 방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공기업인 르노는 민간기업인 푸조-시트로엥과 직접 경쟁을 벌여 공기업의 폐해를 피할 수 있었다.)

 

이처럼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를 조목조목 비판한다. 하지만 비판이 지나치게 강해서 일까. 논리의 과정에서 지나치게 낙관적인 부분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세계은행이 주장하는 재정균형강조가 지나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국가의 재정불균형은 국가 부도로 이어질 수 있다. 국가 부도는 인근 국가의 경제 침체를 연쇄적으로 불러 온다. 때문에 재정불균형에 대한 경계는 엄격해야 한다. 물론 미래를 내다보는 선지자가 20년 재정 미래를 계산해, 당장의 재정 불균형을 14년 뒤의 재정 흑자로 채울 계획을 갖고 있다면 문제는 없다. 하지만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겠는가. 대부분 당장의 인기에 급급해 재정지출을 늘리고, 뚜렷한 대책 없이 부도를 맞은 경우가 그 동안 허다하지 않았던가. 또한 뛰어난 경영인이 국가 도움을 받아 설탕에서 번 돈으로 20년 째 적자를 보는 반도체 사업에 돈을 투자해 국가 기반 사업으로 발전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반도체에서 번 돈으로 자동차 산업에 돈을 투여해 10년 넘게 적자를 보다가, 영영 그 돈을 회수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공무원들도 마찬가지다. 뛰어나고 현명한 공무원들이라면 국가 주도 하에 현명한 경제 계획을 짜겠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가 주도하는 사업의 결과는 너무 참혹하다. (우리나라도 공적 자금을 얼마나 낭비했던가.) 바꿔 말해 뛰어난 리더가 나타난다면 국가 주도의 경제 발전이 더 효과적일 수 있지만 무능한 리더가 이끄는 국가의 경우 그 국가의 경제 구성원들이 져야 할 짐이 너무 무겁다. 

 


재벌 역시 마찬가지다. 당장은 재벌이 국가 경제 발전에 큰 도움을 줄 수 있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나타났듯, 재벌의 힘이 지나치게 강해져 사회 전체의 시스템을 뒤흔들기도 한다. 장교수의 주장대로라면 재벌의 원활한 경영활동을 위해 금산분리나 순환출자금지 등은 폐지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기업 소유자가 소수의 지분을 이용해 기업 전체를 지배하는 방식은 소유자가 유능한 경우에만 긍정적인 결과를 나을 수 있다. 반대의 경우 계열사 전체의 동시 몰락을 가져올 수 있다. (동시에 소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경우 경영권 불법 승계의 위험에도 언제나 노출되어 있다.) 6살짜리 아이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다려 줘야 한다는 주장(개발도상국이 독립할 수 있을 때까지는 보호무역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도 맞다. 하지만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아무도 모른다. 보조금을 무조건 부정할 수도 없지만 언제까지 인정해줘야 할지도 애매하다.(현재도 보조금 유예기간은 있다.) 이런 대목은 대안이 없는 비판 같다는 인상이 들기도 했다.

 

 

그렇다고 만약 모든 국가가 신자유주의 정책을 폐지하고 보호무역을 펼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한국은 여전히 6.25의 폐허더미를 부여잡고 힘겹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외국 기업의 투자가 끊어지면 방글라데시의 한 소녀는 나이키 공장에서 신발 밑창을 붙여서 벌던  작은 돈도 그 나마 잃게 된다. 모든 국가가 무시무시한 관세를 붙이기 시작한다면, 독일 보다 베트남이 더 큰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보호무역주의로의 회귀가 신자유주의의 문제 해결의 답은 아니다. 장하준 교수도 신자유주의 비판을 통해 모두가 보호무역주의로 돌아가자고 말하진 않는다. 우선 장하준 교수는 선진국이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파헤쳐 그들의 위선을 폭로한다. 이 과정을 통해 선진국에게 자신들이 사다리를 올라갔듯, 후발 주자들이 사다리에 올라올 동안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첫 번째 과정은 그의 날카로운 논리력으로 충분한 성과를 얻은 듯 하다. 하지만 두 번째 그의 메시지는 매우 정확하지만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현실 세계에서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지 의문이다. <나쁜 사마리아인>을 보고 나니, 현실의 모순을 보면서도 답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더욱 마음만 답답해진다.

 

신자유주의의 이론의 문제점은 이미 만천하에 공개됐다. 다만 이론의 허점을 현실 세계의 힘이 막고 있을 뿐이다. 실제로 허점은 쉽게 발견된다. 얼마 전 말라위의 식량난 극복 사례가 국제적으로 화제가 됐었다. 2년 전만 해도 인구의 1/3이 굶던 말라위가 옥수수 몇 십만 톤을 외국에 수출한 것이다. 방법은 간단했다. 정부가 보조금을 제공해 비료의 공급을 늘렸다. 하지만 세계은행은 이미 10여년 전, 두 차례에 걸쳐 말라위의 비료 보조금 정책을 폐지시켰다. 말라위는 옥수수가 아닌, 수익성 작물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비료 보조금 폐지로 비료 값은 폭등했고, 비료를 사용하지 않는 말라위의 농업생산량은 감소해갔다. 결국 최근 세계은행은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미시간 주립대학은 최근 보고서에서 신자유주의가 그토록 경멸하는 보조금 정책이 성공의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제프리 삭스 교수도 "지원을 한다고 나선 이들이 정부의 역할을 빼앗아 재앙이 닥쳤다" 며 세계은행의 신자유주의 정책을 비판했다. 이런 사례는 찾으면 무수하게 나오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신자유주의는 결코 개발도상국의 경제성장에는 적합한 방식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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